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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작성자
지은
작성일
2017-09-15 23:28
조회
33
절차탁마 M/ 170915/ 두도시이야기/ 지은

 

듣기, 또 다른 나로 다시 태어나다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들이 있다. 집 밖에서 들려오는 자연소리나 행인의 발소리, 집 안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등 다양하다. 한 개인은 이러한 소리들을 듣는 주체가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를 기다리는 객체가 되기도 한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두 도시 이야기』에 등장하는 두 주요인물 루시 마네트와 시드니 카턴은 이러한 ‘듣기’ 행위에 있어서 상반된 행보를 보인다.

루시 마네트는 모두가 귀기울여 듣는 사람이다. 그녀의 남편 찰스 다네이, 아버지 마네트 박사, 그의 절친한 친구 로리,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시드니 카턴까지 모두 그녀에게 귀를 기울이며 관심을 쏟는다. 반면에 시드니 카턴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변호사로, 그를 사랑하는 이가 있기는 커녕 아무도 그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는 ‘들리지 않는 자’다.

루시 마네트와 시드니 카턴은 듣는 행위에 있어서도 서로 반대된다. 루시는 오직 가족의 소리만을 듣는다. 세상이 돌아가는 소리보다는 아이가 어떻게 커가는지, 남편이나 아버지의 건강은 안녕한지의 여부에만 신경쓰면서 오직 그녀의 가족에게만 귀기울이는 것이다. 반면 카턴은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다 (506).

결과적으로 루시는 프랑스 대혁명 속에서도 늘 그렇듯 자신의 가족, 즉 남편인 찰스 다네이의 안위가 최우선이었다. 결국 그는 살아돌아오고 루시 가족은 허겁지겁 파리에서 런던으로 도망치면서 파리라는 무대에서 소멸된다. 반면에 카턴은 가족주의에서 벗어난 면모를 보이는데, 사랑하는 루시를 위해 죽기를 결심했지만 그 과정에서 생전 처음 보는 여인에게 희망이 되어준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예언자적 존재로서 ‘들리지 않는 자’에서 ‘모두가 듣는 자’로 거듭난다.

앞에서 말했듯이 루시 마네트는 ‘모두가 듣는 자’이며, 시드니 카턴은 ‘들리지 않는 자’이다. 하지만 루시 마네트의 ‘모두’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한정되는데 반해 카턴은 그의 존재가 주목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늘 그는 타인을 위해 행동한다.

루시는 딸 또는 딸 같은 존재로서 마네트 박사와 로리에게, 아내 또는 ‘잠재적 아내’로서 다네이, 스트라이버, 카턴에게 사랑을 받는다. 모두가 그녀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가족 또는 그녀의 잠재적 가족일 뿐이다. 그들 중 가장 유대관계가 느슨한 스트라이버는 루시에게 직접 청혼하기도 전에 로리의 충고만을 듣고 바로 마음을 접어버리고 그녀에 대한 관심을 일절 접어버린다. 즉 루시의 가족이 아니면 그녀를 ‘듣지 않는’것이다.

시드니 카턴은 루시와 다르게 ‘모두가 듣지 않는 자’이다. 영국에서의 재판에서 다네이가 무죄를 선고받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로리는 카턴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만큼 카턴은 능력은 뛰어나지만 도무지 주목을 받지 못한다. 스트라이버가 일을 잘 할수 있도록 중추적 역할을 하지만 그는 항상 주변적 존재로 머문다.

“스트라이버는 카턴 없이는 어떤 사건도 맡지 않았고, 두 사람이 맡은 사건이 처리되는 법정에 가보면 카턴이 언제나 주머니에 손을 넣을 채 법정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 시드니 카턴은 사자는 아니라도 유능한 자칼이며, 그래서 능력이 부족한 스트라이버의 부하 노릇을 해준다는 말이 돌았다.” (126)

카턴은 아무도 알아주지는 않지만 처음 본 낯선 사람인 다네이를 구했고 가족이 아닌 그저 친구일 뿐인 스트라이버 곁에서 늘 그의 숙제를 대신 해준다. 그의 역할무대는 가족이 아닌 타인을 향한다.

듣는 주체로서의 루시와 카턴 또한 매우 다른데, 루시는 영국에서는 가족의 행복한 소리만을 듣고, 파리에서는 성난 군중들의 발소리가 덮쳐오지만 그녀는 남편을 걱정할 뿐 남편과 같은 처지일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오직 가족들만 그녀에게 귀기울였듯이 그녀도 마찬가지다.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금실을 부지런히 감으며, 행복의 씨실과 날실로 인생이라는 천을 자아 어디에도 없는 멋진 가정을 일구던 몇 년 동안, 루시는 길모퉁이를 울리는 소리 속에서도 친절과 위안의 소리만 들었다. 그 와중에 남편의 발소리는 점점 강하고 튼실해졌으며, 아버지의 발소리는 더욱 건강하고 안정감이 있어졌다.” (302)

카턴의 듣는 행위는 타인을 향한다. 그는 영국에 있을 때에는 그의 행위는 타인을 향한 것이어도 늘 그들을 통해 자신을 ‘들었다’. 그와 매우 모습이 흡사한 다네이로부터는 자신의 빛났던 과거를 반추했고, 스트라이버로부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 다른 친구들 숙제를 해”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볼 뿐 다네이나 스트라이버 개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130). 하지만 파리에 온 그는 온갖 소리를 듣는 자가 되는데, 생전 처음 보는 여성 즉 타자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그녀를 안심시키고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곧 그들이 처형을 당할 단두대 앞이라는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서로에게 집중한다 (533). 루시에게 주위의 소리가 그저 ‘배경음’이 되었다면, 죽음을 기다리는 카턴을 묘사할 때 디킨스가 그리는 풍경은 죽음을 묘사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구체적 모습이 담겨있다.

“호송 마차에 탄 죄수들은 이런 사람들 모습이나 마지막 가는 길에 보이는 것들을 무심하게 멍하니 바라본다. 또 어떤 죄수는 삶의 방식이나 인간에 대해 약간의 미련이 남아 있는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절망한 얼굴로 고객를 푹 숙이고 말없이 앉아 있는 죄수들도 있다. (…) 하지만 어떤 죄수도 표정이나 몸짓으로 군중의 동정을 사려고 하지 않는다.” (533)

그렇게 서로 다른 듣기의 방식을 지닌 루시와 카턴은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서로 다른 마지막을 맺는다. 루시는 카턴의 희생으로 급히 마차를 타고 로리, 마네트 박사, 다네이와 프랑스를 떠난다. 이 과정에서 가족이 아닌 미스 프로스와 크런처는 너무 많은 인원이 가면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 그리고 영국인이기 때문에 좀 더 파리를 빠져나오기 쉬울 것이라는 판단으로 마차에 함께 오르지 않는다. 결국 정말 가족만 쏙 빠져나가는 것이다 (로리는 마네트의 친구이지만 루시의 목숨을 구하고 마네트 박사를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무사히 빠져나오게 한 은인이다).

이에 반해 카턴은 가족이 아닌 찰스 다네이를 대신해 죽기를 선택하고 생전 처음 보는 타자와 깊은 교감을 한다. 그 과정에서 ‘들리지 않는 자’에서 ‘모두가 듣는 자’로 거듭난다. 그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은 직후 그의 너무도 평안한 마지막 모습이 마치 예언자 같았다는 소문이 도시 전체에 퍼진다. 또한 루시 가족과 그 후손들은 대를 이어 그의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538)

어떤 것을 듣느냐는 자신의 존재를 결정한다. 가족의 울타리에 머문 루시는 자신에게 익숙하고 안정된 것만 들으려 했기 때문에, 그녀의 듣는 행위는 단순한 자기의 확장일 뿐이다. 하지만 카턴의 듣기는 낯선 타자들을 향하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고 남을 향한 행위이다. 그가 단두대에 서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되살아났듯이, 타자를 향한 도약은 자기를 죽이는 행위임과 동시에 또 다른 나로 다시 태어나는 행위이다. 디킨스는 루시를 통해 그 때 당시 영국 가족주의의 배타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가족주의에 머물지 않는 카턴을 배치함으로써 ‘집’이 아닌 ‘광장’에서 벌어지는, 타자와의 교감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서 거듭나기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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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9-19 17:27
    무엇을 듣는 자가 될 것인가? 어떤 소리들을 향해 자신의 귀와 영혼을 열 것인가? 집에서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에 울려퍼지던 무수한 소리에 대한 글이네요.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