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숙제방

시즌2 에세이

작성자
영우
작성일
2017-09-07 14:00
조회
80
변신에 대한 질문

 

소설 ‘변신’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보니 해충이 되어버린 그레고르 잠자와 그의 가족의 일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곤충으로 변신하는 날까지 그레고르에게 병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그처럼 변할만한 어떠한 징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다만 어느 회사의 외무 사원으로서 부모와 여동생을 둔 평범한 성인 남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이처럼 곤충으로의 그의 변신은 어떠한 예고도 없었던 것이기에 그만큼 돌발적이고 당황스럽게 찾아온다.

사람에서 곤충이 되어버린 그레고르. 그런데 그의 반응은 너무나, 너무나도 담담하다. 몸은 껍질로 뒤덮이고 사지는 온데간데 없어진채 몸통 밑에는 수많은 발들만 무성하다. 입으로 나오는 말은 이미 사람의 말이 아니다. 손가락 하나만 잘려져도 병원. 산재. 등등 무수한 낯선 단어들이 일상 속으로 개입해 들어오고 삶은 뒤죽박죽이 된다. 하지만 해충이라는 벌레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히려 자신의 변신으로 인해 충격받을 가족들과 당장의 출근을 걱정한다. 그의 평정심은 마치 현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변신에 대해 그레고르나 가족중 어느 누구도 ‘왜?’라는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왜?’일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해충으로 변신한 그로 인해 그와 그의 가족들간의 관계는 점차 변해간다. 관계뿐만이 아니라 가족들 자체의 모습을 변화시켜간다.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가족들은 혼돈의 와중에 당장의 경제적 상황을 고민하며 점차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변해가는 것은 가족뿐만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환경 또한 또 다른 성격으로 변화의 대열에 동참한다. 신체가 변화하자 그를 둘러싼 환경 또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익숙한 변신 - 질문의 부재

 

스스로 나비가 되었다고 장자가 말한다면 조금은 그럴수도 있다고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레고르에게는 그렇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충으로의 변신은 그에게는 심한 감기 몸살로 인해 출근을 못하는 정도에 불과한 것처럼 보여진다. 오히려 ‘오늘 자기한테 일어난 일과 흡사한 일이 지배인에게도 언젠가는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p.116)듯 그에게는 꿈에서 깨어나면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처럼 평범한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작은 사건들의 하나로 여긴다. 아마 가족들의 놀아워하는 반응이 없었더라면 그 낯선 몸을 이끌고 기차역으로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생동안 곤충으로 바뀌는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또한 많은 부분이 변해간다. 하지만 대다수의 경우 자신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아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가끔 빛바랜 사진을 바라보며 낯선 자신을 발견하곤 할 때가 아니면 쉽게 알아챌 수가 없다. 물론 그러한 변화는 외모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성격이나 행동 같은 것들도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변해가기도 한다. 물론 가족을 포함한 주변의 타자들은 이를 쉽게 알아본다. 다만 자신만이 인지하지 못 할 뿐이다. 이처럼 일상을 통해서 우리는 무수한 변신의 과정을 거쳐가곤 한다. 따라서 우리의 모습은 항상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익숙함에 젖은 채 누군가의 질문에 항상 ‘나는 누구다’라고 확고에 찬 목소리로 답한다.

 

내 생이 아직 확실하지 않을 때, 어머니가 발코니에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묻는 소리를 들었네, “무엇을 하시나요?” 한 여인이 정원에서 대답했지, “정원에서 간식을 들고 있는 중이어요.” 나는 사람들이 생을 영위해 나가는 확고함에 놀랐네.

 

어머니와 이웃 집 여인과의 자연스런 대화. 이게 무슨 놀랄 일인가. 하지만 카프카에게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놀라운 장면으로 다가온다. 카프카의 생각대로라면 어머니의 ‘무엇’이란 질문이 진정 무엇을 질문한 것인지도 알 수 없고, 여인이 대답한 ‘정원’이나 ‘간식’ 같은 것들도 명확히 규명된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그 단어가 지칭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음으로 해서 생긴 카프카의 놀라움 또한 아니다. 그가 놀라워 하는 것은 전혀 확실하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확고한 답을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항상 그러하듯이.

카프카가 놀랍다고 지적하는 점은 그러한 ‘확고함’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확고함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행동들이다. 그가 보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에 확고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자기자신조차 ‘내가 누구다’라고 확고하게 답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태도는 정원에 나와 있는 여인의 대답과도 같다. 그는 변신의 중대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원래부터 해충인 것처럼 행동한다. 다음 날은 지배인이 해충으로 변하고 그 다음 날은 또 누군가가 해충으로 변할것을 예상하듯 변신 자체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충으로 변신한 스스로를 대하는 그레고르의 모습은 무지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사람에서 곤충으로의 변신이란 극적인 상황으로까지 던져졌지만 본인은 사건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사이코패스인 자들이 자신의 범행에 대해 담담한 표정을 짓는 모습과도 같다. 그가 자신의 몸을 확인하고 생각하는 것들이란 ‘어찌 된 일일까?’ ‘좀더 잠을 청해 이런 어리석은 일을 잊도록 하자.’(p.109) ‘아아! 이렇게도 힘든 직업을 택하다니. 매일같이 여행이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니까 사람이 멍청해지는군.’(p.110)이라는 것들 뿐이다. 자신의 모습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그를 보면 심지어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따라서 이러한 극적인 설정은 일상의 변신에 무감각해져 있는 우리들에게 변신이 일어났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와도 같다. 그레고르 또한 그냥 모른체 지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만큼 그의 변신은 확고부동한 사실이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그레고르의 반응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런 질문이 없다. 그레고르와 가족 어느 누구도 ‘왜’라는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 왜 곤충이 되었는지. 어떻게 곤충이 되었는지. 다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우리 또한 자연스럽고 뻔한 일상속에서 ‘왜’라는 질문을 잊은지 오래일지도 모른다. 해가 떠서 아침이 오는지 아침이 와서 해가 뜨는지. 그런 것들을 일일이 질문하고 고민하는 것조차 번거로운 일이다. 발제하기도 바쁜데 언제 그런 고민을 하겠는가. 그런데 카프카는 그런 점에 놀라워 한다.

 

변신하는 가족들

 

그의 변신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그레고르 본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그와 함께 살아가던 가족들에게 정신적 신체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이처럼 한 사람의 변신의 여파는 가족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가족이라는 틀은 그레고르에게 ‘낯익은 네 개의 벽’처럼 네 명의 가족에 의해서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그 한쪽 벽이 뒤틀어버리자 서로를 기둥 삼아 버티고 있던 나머지 세 개의 벽도 점차 그리고 당연한 듯 뒤틀어져간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레고르가 차지한 것은 한 면의 벽이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벽은 사실 육면의 벽이다. 천장과 바닥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채 놓여있는 또 하나의 벽이다. 사람으로 살아갈 때 그는 단지 하나의 벽만을 디디고 있었다. 하지만 해충이 됨과 동시에 그는 여섯 개의 벽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여기저기 벽을 기어다닐 수 있게 되면서 그를 둘러싼 벽들은 이제 모두 바닥이 된다. 그리고 그레고르가 만드는 벽은 가족이라는 또 다른 벽들과 관계한다. <굴>에서 동굴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들은 그의 가족들이 만들어 내는 벽들의 소음이다. 그리고 벽들은 열린 방문을 통해 서로 소통하기도 하고 방문을 잠금으로 해서 단절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레고르는 온 식구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또 실제로 감당했던 정도로 돈을 많이 벌어들였지만, 그런 시절이 적어도 그렇게 화려하게는 되풀이되지 않았다. 식구들이나 그레고르나 그것에 습관이 되고 만 것이었다. 식구들은 고맙게 돈을 받고 그는 기꺼이 돈을 대주었지만, 거기에 특별한 온정 같은 것은 두 번 다시 없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그레고르는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으로 인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경제적 가장의 자리를 갖는다. 하지만 어느 영화에서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라고 생각’하듯 부모와 동생은 그의 노력에 대해 마음으로부터의 감사 대신 가족으로서 당연히 받아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충으로 변해버린 그레고르는 더 이상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이사조차 갈수 없게 하는 등 가족의 생계를 방해하는 천덕꾸러기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카프카가 펼쳐 놓는 놀라운 광경이 보여진다. 그레고르가 곤충으로 변하고 나자 나머지 가족들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오년 째 백수 생활중인 아버지의 변화는 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나이가 들긴 했지만 ‘피곤에 지쳐서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p.146)고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해서 반갑다는 표시로 손만 쳐들던 사람’이며 ‘산책을 갈 때면 워낙 느리게 걷는 그레고르와 어머니 사이에 서서 낡은 외투를 몸에 두른 채 언제나 조심조심 지팡이를 내디디며 더욱 천천히 가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꼿꼿하게 서 있으면서 은행 급사처럼 금단추가 달린 푸른 제복을 입고, 상의의 높고 빳빳한 칼라 위에는 억센 이중 턱이 나와 있고, 숱이 많은 눈썹 아래에는 검은 눈이 생생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p.147)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는 마치 당당하게 가장으로의 복귀를 알리는 상징과도 같다.

동생의 변화는 또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가족 내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미미한 것이었다. 부모들은 ‘좀 쓸모 없는 계집아이라고 여기고 여동생에 대해 화내는 적이 많았었다.’(p.139) 하지만 이제 그녀가 아무도 내키지 않는 곤충의 식사와 방 청소를 담당하면서부터 여동생은 점점 더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곤충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부모에게 맞서는 모습까지도 보여준다. 오빠의 변신을 통해 동생의 자존감이 한껏 높여진 것이다. 그리고 이 자존감은 기존에 갖고 있던 오빠에 대한 애정마저 희미하게 만든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곤충이 있는 방 청소나 식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형식적인 일상이 되었으며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일하는 곳에 관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열일곱살 어린아이가 아니다. 하긴 처음부터 그녀를 어린아이 취급한 것은 그레고르이지 않았던가.

여기서 보여지는 그레고르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지금의 여느 어머니와도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신체적 허약함도 있겠지만 아버지와 동생의 뒤에서 묵묵히 아들을 바라보고 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적극적 행동도 없으며 달리 수동적이라고 할만한 행동도 없어 보인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해충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다르지 않다. 문제의 해결을 위한 행동은 없다. 단지 눈물만이 앞을 가릴뿐이다. 그런데 그 눈물은 해충이 되어버린 아들이 아니다. 그녀가 눈물 짓는 것은 해충 이전의 그레고르일 뿐이다. ‘그 앤 불쌍한 아이야. 내가 그 애한테 가야 한다는 걸 왜 이해 못하는 거지’(p.139)라고 말하지만 정작 해충을 대면하고는 두려움에 몸을 사린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녀에게 각인되어 있는 아들이란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사랑스런 아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아들이 어떻게 변하던 그것은 그녀가 아들이라고 단정지어 놓은 아들의 형상이다. 그녀에게 해충이란 아들의 변모가 아니라 그야말로 아들을 잡아먹은 해충에 불과하다.

카프카가 보여주는 그레고르의 변신과 죽음은 어처구니 없기도 하다. 해충이 된 설정도 너무 억지 아닌가. 하지만 그레고르가 사람의 모습이었을 때 어쩌면 가족들이 해충이었을지 않았을까. 여기서 보여지는 해충이라는 신체는 무기력한 모습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몇 발짝 내딛기도 힘들어하며 스스로의 힘으로는 생존조차도 힘든 모습이다. 그런데 그의 가족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살이 찐 채 침대에 늘어져 있던 아버지. 호흡 곤란으로 모든 것이 소극적인 어머니.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른 채 가족 내에 묻혀 있던 동생. 그들의 모습은 다분히 그레고르가 곤충으로 변신한 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그러한 곤충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레고르가 있었기 때문이다.

 

떠다니는 완장

어느 날 곤충 그레고르는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여동생의 생각보다 더 확고’함을 지니고 숨을 멎는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하지만 그것은 해충의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생계를 유지해 주던 변신 이전의 그레고르의 소멸에 대한 슬픔이다. 그들은 더 이상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처음 발견한 파출부가 ‘그것이 죽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단지 ‘그것’일 뿐이다. 그와 동시에 이름이 없었던 부모는 ‘잠자 부부’ ‘잠자 부인’이라는 명칭으로 되살아 난다. 그레고르가 가장이었을 때는 단지 부모였지만 이제 그들이 가장으로서 가족을 대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변신을 하였다. 아무런 생활력이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이 이제 각자의 신체에 맞춘 경제 생할을 해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레고르는 이들의 변신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분명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욕구와는 상반된 일임에도 회사 일에 매진하여 말단 사원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외무 사원의 지위까지 이른다. 하지만 그의 경제적 능력은 나머지 가족들의 사회적 경쟁력을 감소시켰다. 그가 가지고 있던 가장의 지위는 가족들로 하여금 그레고르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스스로를 무능력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흔히 ‘가부장’이라고 할 때 그것은 가정을 대표하는 남자 어른을 말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단순히 생물적 조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생계를 책임지는 경제적 요인도 포함된다. 따라서 생계를 책임지는 남자 어른에 대해 우리는 ‘가부장’의 이름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것이 부정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이 지위로 인해 나머지 가족들에게 미치는 좋지 않은 영향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완장’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권력으로 인정 받지도 않은 것이 권력인양 행동한다. 처음에 가족들은 ‘그들이 손을 뻗치면, 옆으로 물러서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긴’것처럼 그레고르의 완장을 거부하지 않은 채 그에게 의존하고 안주한다. 하지만 그의 변신에 따라 완장의 주인은 바뀐다. 아버지에게 넘어갔다가 동생이 잠시 빌려쓰기도 한다. 그러다가 월세를 앞세운 세입자들에게도 잠시 옮겨간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일을 하기 싫어서였을까? 능력이 없어서? 사법고시 비슷한 것에 붙은 그가 능력이 부재하다고는 볼 수 없다. 파업은 아니더라도 태업의 모습은 역력하다. 거기에는 완장을 차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너무나도 확고 부동한 자본의 삶 자체에 대한 끝없는 고민이 그를 불면에 고통받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거기에는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왜’라는 질문이 있었을지 모른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행동을 하는 것인지. 우리가 흔히 하지 않는 하늘이 왜 파란지에 대한 질문처럼 누구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들에 대한 확고함에 대한 질문들. 해충으로 변한 그레고를 보면서 그가 바뀌고 가족이 바뀌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 그가 왜 해충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해답이 없을거 같음에도 불구하고 ‘왜’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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