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세미나

모비딕 후반부 후기입니다

작성자
정은하
작성일
2016-05-22 12:00
조회
4054
지난주 문학세미나에서는 모비딕 책 끝까지 읽고 와서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책의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줄거리는 사실 굉장히 단순할 수 있습니다.

모비딕에 미쳐서 항해를 떠나는 선장 에이허브와 그 선장에 동조해서 같이 항해의 목적을 맞추는 선원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마지막 모비딕과의 조우에서 이 소설의 나래이터인 이슈마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비극적인 최후.

이 단순한 이야기 안에서 세미나에서 참석했던 사람들이 가장 의아해 했던 부분이 두가지 였던거 같습니다.  왜 이책의 2/3가 이 소설의 맥락과 전혀 맞닿아 있지 않은 고래의 학술적 지식으로 채워져 있는지. 그리고 모비딕에 대한 편집증적 복수심에 사로잡힌 에이허브 선장은 그렇다 치고, 왜 그 선원들은 그 선장에 같이 동조해서 결국 같은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었는지.

건화샘은 이러한 모비딕의 형식에 대해서, 문학과 과학이 둘다 신체변용의 이미지를 사용한다는 점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확연히 구분되는 걸로 생각하는 현실적 관점을 거부하기 위해 저자가 의도적으로 취한 형식일것 같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고래에 대한 기나긴 백과사전식 기술과 문학적 서사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고래에 대해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라는 이슈마엘의 고백은 '안다'라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수경샘은 이러한 고래에 대한 온갖 기술로 고래가 무엇인지를 전달하려는 의도 자체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1인칭 화자는 작위적이고 3인칭 화자는 무책임하고 글자 자체는 결코 세상을 그대로 구현할 수 없다' 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모비딕을 에이허브 선장의 모험으로만 읽는 것 자체가 명백한 오독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고래에 대한 기나긴 잡학적 기술이 지루하게 느껴졌다면, 그것이 그 소설의 주 맥락과 상관없는부차적인 부분(엄청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부차적인것이 아니라, 에이허브 선장의 이야기와 버금가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요 축이라는 것이지요.

서사적 흐름의 모비딕 이야기가 흰고래에 사로잡힌 에이허브의 편집증적 복수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학술적 기술로 보여주는 고래의 이야기는 이 소설의 화자인 이슈마엘의 고래에 대한 또 다른 편집증적 광기를 드러내는 장치라는 것입니다. 결국 둘 다 ‘고래에 미친 놈’의 이야기라는 해석이 흥미로왔습니다. 그러면서 수경샘은 이렇게 서사와 무관한 내용을 한 소설안에 섞어버리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 의도적으로 하나로 수렴되는 것을 방해하는 장치로서의 문학적 실험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의도적 혼란 이라는 것이지요.

이번 세미나에서 여러 책을 읽으면서, 이 모든 책을 관통하는 공통된 부분이 있을까 궁금 하기는 했지만, 일단 일종의 ‘실험’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이 가는 것 같기는 합니다. ‘어떠한 결론도 주지 않는 실험 그 자체’가 이번 문학세미나에서 받은 가장 큰 인상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근대이전의 모험문학과 현대문학의 가장 큰 차이점이 결론이 주인공의 ‘귀향’으로 귀착 되는지 여부에 있다고 이야기 했던 수경샘의 이야기와 관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아처럼 바다에 홀로 떠다니는 이슈마엘의 모습이 모비딕의 마지막인 것과 같이, 현대 문학은 귀향이 보장되지 않은 채 세계로부터 격리되어 부유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결론으로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모험의 마지막이 또 다른 모험의 시작이라는 것이 정말 망망 대해를 끊임없이 표류하는 것과 같은 삶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고, 상상만으로도 피로함을 느끼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ㅎㅎ  실험도 어떤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임시 과정에 불과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실험 과정 그 자체가 결론이고 전부 일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두 번째의 의문사항이였던 선원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분분 했었습니다. 선장이 힘없는 선원들을 자신의 복수계획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라는 의견부터 육지의 안정된 삶보다 포경선의 불안정한 생활을 좋아하는 선원들의 기질 자체가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선장에 수긍 했을것이라는 현숙샘의 해석이 있었습니다.

소현샘은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모험을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해낸다는 점에서 영웅적이라 할 수 있지만, 선장은 선원들을 부추겨서 그들의 힘을 자신의 모험에 이용했다는 인상이 있어서 그의 모험과 죽음을 ‘영웅적 위대함’으로 단정짓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현샘은 모비딕과 선장의 운명을 ‘공동 운명체’를 가진 사람들의 결말이라 이야기 했는데, 선장과 선원들의 운명 역시 ‘공동 운명체’의 하나라고 같이 볼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공동 운명체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라는 이야기를 오래 했던 것 같습니다. 서로의 필요성으로 얽어있는 것을 ‘공동 운명체’라고 해석하기에는 맞지 않은 부분이 많었지요.(모비딕은 선장을 필요로 하지 않은것 같은데..같은) 그보다는 공동 운명체를 ‘힘의 관계에 들어온 존재’들의 운명체, 또는 ‘힘의 업’안에 같이 깃들어 있는 존재들의 운명체를 가리키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힘의 자장안에는 어떤 선악도 존재하지 않고 힘에 의한 지배-복종 또는 힘에 의한 합성-해체 관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에이허브가 모비딕에 끌리는 것도, 그 많은 선원들이 선장의 편집증적 복수심에 쉽게 동조 되는 것도 힘의 관계에 끌림과 결합상태 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 자신의 계획에 선원들을 끌어들인 선장의 방식이 윤리적이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는 지점이 있다는 것 같습니다. 동료를 만들 수 있는 능력도 강자의 덕 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문제에는 항상 애매함과 석연치 않음이 남아있기 마련인데, 이날 니체를 공부하고 있는 소현샘도 ‘힘의 관계에 선악이 없다’ 라는 것에 대한 의문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몇일 전에 일어났던 강남역 근처의 묻지마 살인을 단순히 ‘힘의 관계’에 의한 우연적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모비딕과 선장의 첫만남이 이러한 힘과 힘의 충돌에 의해서 생긴 우발적 사건 이였던것과 같이, 강남역 사건도 어떤 의미도 목적도 없는 힘의 충돌에서 생긴 비극적 사건이라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였는데, 이것을 모비딕-선장의 힘과 비유하는 것은 무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강남역의 가해자가 한 행위는 가장 전형적인 약자적 방식 이였다는 것이지요. 몰려있는 사람들이 택하는 가장 뒤틀린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힘의 관계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 관계를 그대로 수용하고 긍정하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 힘이 강자적 방식이였든, 약자적 방식이였든 그것을 당하는 사람입장에서는 항상 폭력적으로 다가올 것 같다는 인상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힘의 관계를 ‘가해자-피해자’ 또는 ‘강자-약자’의 구도로만 자꾸 환원시키려는 제 관념도 문제지만. 강자-강자의 힘의 관계를 삶 속에서 별로 체험해 보지 못한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결론은 ‘니체를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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