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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화의 독서노트]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자기돌봄 ― 《세네카의 대화 : 인생에 관하여》[2]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11-16 19:14
조회
859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자기돌봄
-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세네카의 대화 : 인생에 관하여》(까치)



“각자가 스스로를 돌보는 일은 그것 자체로 타인들에게 유익을 행하는 것입니다.”(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세네카의 대화 : 인생에 관하여》, 까치, 253쪽)

두어 달 전, ‘담마 코리아’라는 명상센터에 다녀왔다. 꽉 채워서 10일 동안 불교의 오계(五戒)를 충실히 지키며 깨어있는 내내 명상법을 배우는 프로그램이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좋은 경험이었지만, 여기서는 나와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내 예상과 달리 동료 남자 수련생들 중 대다수가 30대 초~중반이었고(젊다!), 슬럼프를 이겨내거나 마음의 불안을 해소하려는 저마다의 현실적인 이유를 갖고 센터를 찾아왔다. 모두 성실하고 진지하게 수행에 임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돈 벌고 돈 쓰기 바쁜(걸로 알려져 있는) 30대들로 하여금 힘든 수련코스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유발 하라리가 이 명상센테를 추천했다는 것도 그 하나이겠으나, 보다 중요한 건 지금 젊은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마음을 돌보는 일과 그렇게 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 그만큼 절실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너무 거창한 말인가 싶긴 한데, 정말로 마음의 문제야말로 지금 우리의 시대적 아젠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십 년 전만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노동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해내는 것은 이제 축복받은(?)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일이다. 시선을 살짝 돌려 소비에서 만족을 구하고자 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마냥 결여감만 재생산될 뿐이다. 사회를 바꾸면 문제가 해결될까? 잘 모르겠다. 우리가 함께 꿈꾸어야 할 좋은 사회가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온갖 이미지들과 정보들은 우리의 갈 곳 잃은 마음을 파고들어 결과적으로 우리의 정신과 신체를 더욱 피폐하게 만든다. 이런 조건 속에서 우리의 마음에 집중하는 것은, 어쩌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에 직면하는 길일지도 모른다. 돈이 많건 적건, 정규직이건 백수건, 학벌이 좋건 나쁘건 우리 대다수의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다는 것. 이것은 기존의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일 테니까. 마크 피셔가 말하듯, 정신 건강의 문제는 후기자본주의의 근원적 불능성을 폭로한다.

그런데 스스로를 돌본다는 건 뭘까? 우리는 마음의 문제를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마음을 돌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고 있는 듯하다. 걸리적거리는 마음의 불순물들을 서둘러 제거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문제는 이렇게 할 때 결국 모든 게 ‘적응’에 달려 있는 것처럼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목표가 주어진 조건에 다시 적응하는 것으로 설정되는 한, 모든 종류의 자기 돌봄은 의심의 눈초리를 면하기 어렵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미국의 평균 가계부채가 130%에 육박하는 가운데 금욕을 설교하는 기만적 도덕이 활개치는 기이한 현상을 지적한 바 있다. 개인의 빚을 그 사람 자신의 방종 탓으로 돌리는 도덕적 설교가 유행하고, 그와 더불어 부채는 ‘새로운 지방덩어리’ 취급을 받게 된다. 미국의 TV 프로그램 중에는 심지어 채무에 짓눌린 개인에게 환생할 수 있는 요령을 가르쳐주는 일종의 ‘부채 쇼’도 존재한다고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TV에 나와 공황장애나 우울증을 극복한 힘든 과정을 고백하고 동정과 격려를 받는 연예인들을 보면 비슷한 오싹함을 느낀다. 자신의 병을 유발한 현실에 더욱 잘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교정하는 것이 자기돌봄이라면, 그것은 스스로의 예속을 강화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세네카의 말은 너무나 획기적이다. 그에 따르면 스스로를 돌보는 것은 그 자체로 타인에게 유익을 행하는 일이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자면 우리가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근대적 자아의 개념,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분할에 관한 관념,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한 담론들을 전면적으로 해부해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간단히 말하자면 ‘자기를 돌본다’라고 말할 때 세네카가 이해하고 있는 ‘자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듯 보인다. 세네카는 은둔하는 삶을 비판하는 자들에 맞서, 스스로를 돌보는 것은 공적인 업무에 헌신하는 것만큼이나 정치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공적인 업무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아테네인이나 카르타고인의 국가 또는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만을 포괄하는” ‘작은 국가’에 힘을 쓴다면, 스스로를 돌보고 관조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은 “신과 인간을 포함하여 이리저리 나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지나는 곳을 국가의 경계로 삼는”(253쪽) ‘큰 국가’에 힘을 쓴다.


세네카는 물론 은둔을 위한 은둔에 대해서는 선을 긋는다.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자발적 고립을 권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실천을 위한 실천도 문제 삼는다. 스스로에 대한 배려나 자신의 덕의 함양과 무관하게 단지 공적인 업무에 끌려다니는 맹목적 실천은 자기 자신에게도 타인들에게도 전혀 이로움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관조와 실천의 이분법을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실천하는 자는 언제나 특정한 인식 속에서 자신의 실천을 구성할 것이고, 관조하는 삶을 사는 자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자신의 인식에 따라 특정한 행위의 양식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는 세네카에게서 단절되어 있지 않다. 특정한 공적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는 스스로의 마음을 닦고 자기중심을 만들어내지 않는 한 외부적 힘들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반대로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보는 데 힘을 쓰는 사람이라 해도, 그의 자기돌봄은 그의 행위를 변형하고 그가 다른 존재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체화된다는 점에서 분명히 어떤 정치성을 함축한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세네카처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심지어는 정치적이기까지 한 자기돌봄을 상상하고 실험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내게는 이것이 몹시 긴급한 문제로 다가온다. 세네카를 비롯한 고대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힌트 하나는, 그들에게 자기 돌봄이란 스스로를 ‘개선’, ‘향상’,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존재방식을 ‘변형’하는 실천이었다는 데에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예속적 상태, 우리의 정처 없는 마음과 무절제한 욕망은 ‘나’의 고유한 악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다른 모든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돌보고 덕을 수양한다는 것은 특정한 사회적 규범에 맞춰 자신을 교정하거나 자신이 갈망하는 이상적 상태에 이르고자 스스로를 계발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근본적인 차원의 실천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를 사로잡는 문제가 단지 사라지기를 소망하는 방식으로는, 그것이 발생하게 된 진정한 원인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예속적인 의존과 굴종적인 적응일 것이다.

우리는 ‘나아지기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해보기를’ 실험해야 하는 게 아닐까? 다르게 해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많은 것들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한 현실적 조건을 분석하고, 그러한 조건에 일방적으로 규정당하도록 한 우리 자신의 상식적 관념들을 검토하고, 다른 존재의 양식을 실험하기 위한 계기들을 마련하고, 그것을 함께하기 위한 관계들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어렵지만, 이것보다 더욱 충만한 정치적 실천이 또 있을까?


글 : 건화

전체 2

  • 2021-11-17 12:33
    정치라는 것은 국가와 관련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와 더 긴말한 관계를 구축할 수도 있다고 하니 놀랍네요~ 그러나 '세네카'라는 인물이 시민과 노예가 나누어진 삶을 편안히 여기는 시대의 사람이라는점이 저에게는 고정관념이 되어서 세네카의 말에 전폭적인 지지를 하게 되지는 않습니다만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보는 데 힘을 쓰는 사람이라 해도, 그의 자기돌봄은 그의 행위를 변형하고 그가 다른 존재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구체화된다는 점에서 분명히 어떤 정치성을 함축한다.'는 말은 사회와 나를 돌아보는 성찰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건화쌤의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2-01-16 01:07
    jpa5l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