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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과 노자 하상공주 10장 ~ 19장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8-15 11:40
조회
145
우쌤 말씀대로 하상공에 비하면 왕필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경험하는 시간보다는 밀도가 중요하다지만 이십대의 나이로는 추상을 비근한 경험으로 구체화해서 얘기하기에는 확실히 부족했나 봅니다. 반면에 하상공은 오랜 기간 수련한 백전연마의 노장 같습니다. 같은 글자, 비슷한 얘기지만 하상공은 그걸 물리적, 신체적(?)으로 풀어준달까나? 흠흠, 어쨌든 왕필이나 하상공이나 한 글자도 놓칠 수 없는 건 분명합니다.

 

10. 能爲

載營魄, 抱一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如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爲乎? 天門開闔, 能無雌乎? 明白四達, 能無知乎?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사람은] 혼백(魂帛)을 타서, 하나로 해서 능히 분리시키지 않을 수 있는가? 기를 온전히 하고 [몸을] 유연하게 하는 것을 어린아이와 같이 할 수 있는가? 현람(玄覽)의 먼지를 씻고 닦아서 흠이 없을 수 있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무위(無爲)로 할 수 있는가? 하늘의 문을 열고 닫음에 있어서 암컷처럼 [유연하게] 할 수 있는가? 사방을 명백하게 하지만 알려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 낳아주고 길러주며, 낳아주지만 소유하지 않고, 베풀지만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크게 자라게 하지만 도구로 쓰지 않으니, 이를 일러 현덕(玄德)이라 한다.

10장의 제목은 능위(能爲)입니다. “~할 수 있겠느냐?” 이런 뜻이죠. 도(道)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능(能) ~ 호(乎)”의 반복과 연결됩니다.

재(載)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데 우쌤은 그 중 네 가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첫째는 발어사로 봐서 해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재(哉)로 보고 9장의 끝에 붙이는 것입니다. 셋째는 처할 처(處)의 의미로 보는 것인데 왕필이 이것을 따랐습니다. 넷째가 하상공이 따른 것을 실을 재(載)로 보는 것입니다.

영(營)은 혼(魂)과 통용되서 쓰입니다.

우쌤은 유(柔)를 유연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히 기(氣)가 잘 순환되는 사람은 신체가 어린아이와 같아져서 뻣뻣하지 않게 되나 봅니다. 몸에 관한 여러 얘기를 들으면서 제가 얼마나 신선과 거리가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ㅋㅋ;;

현람(玄覽)은 주로 ‘현묘한 거울’이라고 해석됩니다. 왕필이 이렇게 해석했죠. 근데 하상공은 현(玄)과 람(覽)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1장에서 현(玄)이 천(天)이었다면, 여기서는 ‘마음 깊은 곳’을 뜻합니다. 람(覽)은 인간이 타고난 인식능력으로 우쌤은 《대학(大學)》의 허령불매(虛靈不昧)라고 얘기해주셨습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마음이 현명(玄冥)의 자리에 처하면, 인간의 인식능력이 만사를 안다고 했습니다. 우쌤은 이걸 한 단어로 정리하면 정(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백성을 아낀다는 것은 백성이 타고난 에너지, 정기(精氣)를 소모시키지 않음을 뜻합니다. 유가에서 백성을 교화(敎化)시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천문(天門)이 열고 닫히는 것은 코의 들숨과 날숨을 말합니다. 6장을 참고하면 하늘에 해당되는 게 인간에게는 코라고 했죠.

우쌤은 하상공에서 도(道)가 하는 일을 정리한다면, 생지휵지(生之畜之), 만물을 생하게 하고 기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왕필은 재(宰)를 ‘주관하다’로 봤습니다. 그런데 재(宰)에는 ‘고기요리를 맡은 요리사’라는 뜻도 있다고 합니다. 우쌤은 쉐프라고 말씀하신 게 떠오르네요. 그래서 재할(宰割)이라고 하면 ‘고기를 저미다’, ‘요리하다’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10장에서는 함부로 자신의 도구로 쓰기 위해 입맛에 맡게 요리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11. 無用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植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서른 개의 바퀴살을 하나의 바퀴통에 공유하는데, 그 빈 곳이 있어서 수레의 쓰임이 있다. 흙을 다져서 그릇을 만드는데, 빈 곳이 있어서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서 방을 만드는데, 빈 곳이 있어서 집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있음이 이로운 것이 되는 것은 빈 곳을 쓰임으로 삼기 때문이다.

11장의 제목은 무용(無用), 무(無)의 쓰임입니다. 《장자》에도 무용(無用)을 대용(大用)이라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근데 쓸모없어서 삶아진 거위를 보면 쓸모없음 자체가 장려되는 것은 아닙니다. 용(用)과 무용(無用) 두 개를 놓고 같이 사유해야 하는데, 그건 《장자》 때 기대해보죠. ^^

복(輻)은 ‘바퀴살’이고, 곡(穀)은 그 ‘바퀴살들이 모이는 비어있는 통’을 말합니다.

당(當)은 “~있어서”입니다.

무(無)는 공허(空虛), ‘비어 있음’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몸을 닦는 것은 마땅히 정욕(情欲)을 제거하고, 오장(五臟)을 비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신(神)이 쌓일 수 있다고 합니다. 우쌤은 의사가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욕(情欲)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병자는 누구든 치료를 해주고 값은 나중에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의사만큼 짭짤할 직업도 없게 됐네요. 우쌤은 하상공에서 의학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 걸 보니 어쩌면 의사집단일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연식(埏埴)은 ‘흙을 다지다’입니다.

 

12. 檢欲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田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화려한 색은 눈을 멀게 하고, 화려한 음악은 사람의 귀를 어둡게 하고, 맛있는 음식은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하고,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12장의 제목은 검욕(檢欲)입니다. 검(檢)은 ‘묶다’라는 뜻으로 “욕망을 묶어라”라는 게 이 장의 제목입니다.

주석에 호색을 탐하면 정(精)이 상해서 실명(失明)하게 된다고 합니다. 우쌤은 옛날 일가 어른 중 색을 좋아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도 실명했다고 하네요. 요즘은 눈 큰 게 하나의 트렌드라서 수술을 해서 일부러 넓히지만, 눈이 크면 정(精)이 밖으로 새어나간다고 합니다. 눈이 작아서 다행이네요. ㅎㅎ 하지만 색에 관련된 이야기는 섬뜩하네요. 흠흠;;

듣는 것에 심취하는 것도 화기(和氣)가 마음을 떠나서 심장에 장애가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면 도(道)를 들을 수 없다고 하네요.

주석을 참고하면, 사람의 정(精)과 신(神)은 안정된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치빙(馳騁), 호흡이 부산하게 들뜨게 되면 정(精)과 신(神)이 흩어지고 발광하게 된다고 합니다. 감각기관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 진리인 것 같습니다.

 

13. 猒恥

寵辱若驚, 貴大患若身. 何謂寵? 辱爲下.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寵辱若驚. 何謂貴大患若身?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 及吾無身, 吾有何患! 故貴以身爲天下者, 則可寄於天下 ; 愛以身爲天下者, 乃可以託天下.

총애와 욕됨을 놀란 듯이 하고, 큰 근심이 내 몸에 미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무엇을 놀란 것이라 하는가? [총애를 잃어서] 욕되어 하천(下賤)하게 된다. 얻어도 놀란 듯이 하고, 싫어도 놀란 듯이 하니, 이를 일러 총애와 욕됨을 놀란 듯이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일러 큰 근심이 내 몸에 미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하는가? 내가 큰 근심이 있는 까닭은 내게 몸이 있기 때문이니, 내가 몸이 없는 것에 이른다면, 내가 어떤 근심을 가지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몸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잠시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 몸을 천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라면 천하를 믿고 완전히 맡길 수 있다.

13장의 제목은 염치(猒恥), “수치스러운 일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때 수치스러운 것은 놀라는 것으로, 총애와 욕됨을 경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쌤은 귀대환약신(貴大患若身)을 귀신약대환(貴身若大患)으로 바꿔서 읽으셨습니다. 귀(貴)는 ‘두려워하다’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몸을 갖고 있는 것은 큰 근심이 되는 것은 근로(勤勞)가 있게 되고, 굶주림과 추위를 생각하게 되고, 정욕(情慾)이 촉발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구체적인 무엇과 부딪힐 때마다 마음이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쌤은 기(奇)와 탁(託)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왕필은 이 둘을 같은 것으로 봤지만, 하상공은 다르게 봤습니다. 기(奇)는 ‘잠시 맡기다’이고, 탁(託)은 ‘완전히 믿고 맡기다’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군주가 자기 몸을 귀히 여기면서 타인을 천하게 여기면 오래될 수 없고, 군주가 자기 몸을 아끼면서 에너지를 쓸데없이 소모하지 않으면 만민의 부모가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몸을 다스리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동시에 가져가는 사유를 볼 수 있습니다.

 

14. 贊玄

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皦,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狀. 是謂忽恍.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以知古始, 是謂道紀.

보려 해도 보지 못하는 것을 이()라 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을 희()라 하고, 잡으려 해도 잡지 못하는 것을 미()라고 한다. 이 세 가지는 따져 물을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세 가지를 합하여 일이 되게 한다. [()] 위라고 해서 밝지 않고, 아래라고 해서 어둡지 않으며, 끝없이 이어져서 이름할 수 없으니, 형체를 갖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이를 일러 형체 없는 것의 형체라 하고, 형체를 갖지 않은 것의 모습이라 한다. 이를 일러 홀황(忽恍)이라 한다. 맞이하려 해도 그 앞을 볼 수 없고, 쫓아가도 그 뒤를 볼 수 없다. [성인이] 옛날의 도()를 잡음으로써 지금 있는 것에 작용하니, 이로써 옛날의 시작을 알고, 이를 일러 도기(道紀)라고 한다.

14장의 제목은 찬현(贊玄), ‘현(玄)을 찬미하다’입니다.

이(夷), 희(希), 미(微) 모두 감각기관으로 지각할 수 없는 도(道)를 말하는 것입니다.

혼이위일(混而爲一)에 대한 사유가 왕필과 약간 다릅니다. 왕필은 분별할 수는 없지만 뭔가 섞여있는 상태를 혼(混)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상공은 혼(混)을 합(合)으로 풀었습니다. 그래서 세 가지를 합한 것을 일(一)이라고 하는 것이죠.

승승(繩繩)에 대해서 왕필은 ‘보일 듯 말 듯 끝없이 가늘게 이어져있음’으로 해석했다면, 하상공은 ‘움직이는데 끝이 없다’고 해석했습니다.

復 이 글자는 “복”으로 읽습니다. 왕필은 “부”로 읽었죠. 물(物)은 질(質), 바탕으로 복귀어무물(復歸於無物)은 형체를 갖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쌤은 도(道) 자체는 형체가 없지만 형체가 있는 것을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도기(道紀)에 대해서 하상공은 강기(綱紀), 그물을 펼쳤다 오므리는 작용이라고 해석했습니다.

 

15. 顯德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與焉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朴, 曠兮其若谷, 渾兮其若濁. 孰能濁, 以止靜之, 徐淸? 孰能安, 以久動之, 徐生?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옛날에 도()를 체득한 군주는 미묘하여 하늘과 통하고, 너무도 깊어서 다 설명할 수 없다. 오직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억지로 다음과 같이 말해보겠다. 머뭇거리는 것이 겨울의 강을 건너는 것과 같고, 망설이는 것이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고, 의젓한 것이 손님과 같고, 풀어지는 것이 얼음이 녹는 것과 같고, 진실됨이 통나무와 같고, 포용력 있는 것이 텅 빈 계곡과 같고, 흐릿한 것이 탁한 것과 같다. 누가 능히 탁해지면 그침으로써 고요하게 해서 서서히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능히 안정됨을 오래하여 움직여서 오래 살 수 있겠는가? 이 도()를 보호하는 사람은 꽉 채우려 하지 않는다. 오직 꽉 채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가릴 뿐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는다.

15장의 제목은 현덕(顯德), “덕을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시면 알겠지만, 그 방법은 결국 잘 사는 것이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사람들 앞에 뽐내지 않고 숨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고지선위사자(古之善爲士者)는 조금씩 다르게 해석됩니다. 진고응은 “도(道)를 잘 행한 사람”이라고 해석했는데, 하상공은 “도(道)를 체득한 군주”라고 해석했습니다.

15장에서 현(玄)은 천(天)의 의미입니다.

용(容)은 하구(下句), ‘다음 구절’입니다.

왕필본에 비해서 다른 글자들이 있지만 뜻은 다 똑같습니다. 왕필본에는 예(豫)로 되어있는 게 하상공본에는 여(與)로 돼있습니다. 둘 다 ‘머뭇거리다’, ‘망설이다’의 뜻입니다. 다산의 여유당(與猶堂)의 여(與)도 여기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유(猶)도 여(與)와 같은 뜻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사람이 법을 범해서 사방 이웃이 그것을 알까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엄(儼)은 ‘의젓하다’입니다.

환(渙)은 ‘(얼음이 녹듯) 풀어지다’입니다.

돈(敦)은 ‘진실되다’입니다.

박(朴)은 박(樸)과 같이 쪼개지지 않은 통나무입니다.

광(曠)은 ‘포용력이 있다’입니다.

혼(渾)은 혼(混)과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생(生)은 장생(長生)입니다.

폐(蔽)는 낡을 폐(弊)로 읽거나 ‘가리다’의 의미로 본다고 합니다. 왕필은 낡을 폐(弊)로 봤지만 하상공은 ‘가리다’로 봤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감추다’가 되는데, 주석을 참고하면 광영(光榮)을 숨긴다고 했습니다. 우쌤은 자신을 정(靜)하게 하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6. 歸根

至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其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靜曰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 .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의 극치에 이르고, ()을 돈독히 하는 걸 지켜라. 만물은 나란히 만들어지고, 나는 그럼으로써 그 돌아가는 것을 본다. 사물은 무성해지고, 각자 그 뿌리로 돌아간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정()이라 하고, ()을 명()을 회복하는 것이라 하고, ()을 회복하는 것을 상()이라 하고, ()을 아는 것을 명()이라 한다. ()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행동하면 흉()하게 된다. 알면 포용력이 있게 되고, 포용력이 있게 되면 공정해지고, 공정해지면 왕이 되고, 왕이 되면 하늘과 통하게 되고, 하늘과 통하면 도()와 같아지고, ()와 같아지면 오래 살 수 있다. 내 몸이 사라질 때까지 위태롭지 않게 된다.

16장의 제목은 귀근(歸根), “뿌리로 돌아가다”입니다. 그런데 뿌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물체가 소멸되는 것을 본다는 것이니, 이러한 움직임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필은 치허극(致虛極)이라고 했지만, 하상공은 지허극(至虛極)이라고 했습니다.

만물이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만물은 고락(枯落), 시들고 마름이 없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 왜 소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복명(復命)을 하상공은 도(道)의 항상된 움직임으로 풀었습니다. 여기서 항상된다는 것은 어떤 것이 뿌리로 돌아가는 에너지가 또 다른 사물을 만드는 에너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쌤은 지상용(知常容)을 풀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지상(知常)이 명(明)이라면 명내용(明乃容)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대로 본다면, “상(常)을 알면 명(明)해지고, 명(明)해지면 받아들일 수 있다.”가 됩니다.

왕(王)이 된다는 것은 신명(神明)과 통하는 것인데, 이것은 천지의 맑은 기운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왕(王)은 하늘과 통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덕(德)이 하늘과 통하면 도(道)와 같아져서 장구(長久)할 수 있다고 합니다.

17장부터는 2권인데, 우쌤은 딱히 어떤 뚜렷한 기준에 의해 나눴다기보다는 아마 두루마리의 분량에 의해 구별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도경(道經)과 덕경(德經)도 뚜렷한 의미의 구분보다 그냥 두 개의 두루마리로 나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17. 淳風

太上, 下知有之 ; 其次, 親之譽之 ; 其次, 畏之侮之. 信不足, 焉有不信 ; 猶兮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태고시대의 군주는 백성들이 있다는 것만 알았고 [섬기지는 않았다.] 그 다음은 친하게 여기고 기리는 것이다. 그 다음은 두려워하고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군주가 백성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면 이에 [백성들도] 믿지 않게 된다. 느린 것이 말을 아끼는 것과 같다. 공을 이루어도 도()를 따르니, 백성이 모두 나는 원래 이렇다라고 말한다.

17장부터 20장까지는 사람들이 사는 얘기, 정치에 관한 얘기입니다.

17장의 제목은 순풍(淳風), “순박한 풍속”으로 사람들의 후덕한 품성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장입니다.

태상(太上)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왕필과 진고응은 ‘최고 수준의 군주’, ‘최고의 시대’로 풀었는데, 하상공은 ‘태고시대의 군주’로 풀었습니다.

우쌤은 하지유지(下知有之)를 ‘왕이 있음은 알았지만 세금을 내지 않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외지모지(畏之侮之)를 왕필은 붙이지 않고 떨어트려놨습니다. 의미상 ‘두려워하다’와 ‘우습게 여기다’가 같이 붙어있는 게 이상해서 우쌤도 아마 기차(其次)가 생략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언(焉)은 신부족(信不足)에 붙이느냐, 그대로 두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여기서는 그대로 두는 것에 따랐는데 그러면 언(焉)은 이에 내(乃)가 됩니다. 신부족(信不足)의 주체는 군주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언유불신(焉有不信)의 주체는 백성입니다. 우쌤은 군주가 백성에 대해 믿음이 부족한 것은 백성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의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유(猶)는 왕필본에 유(悠)로 돼있습니다. 뜻은 ‘늦추다’입니다.

 

18. 俗薄

大道廢, 焉有仁義. 智惠出, 焉有大僞. 六親不和, 焉有孝慈. 國家昏亂, 焉有忠臣.

큰 도()가 폐한 이후에, 이에 인의(仁義)가 있게 된다. 지혜가 나오고 나서, 지혜가 나오고 큰 거짓이 있게 됐다. 육친이 불화한 이후에 이에 효자(孝慈)가 있게 됐다. 군가가 어지러워진 이후에 충신(忠臣)이 있게 됐다.

18장은 17장과 반대의 의미를 가진 장입니다. 18장의 제목은 속박(俗薄)으로 풍속이 박해졌다는 뜻입니다.

왕필본에 없었던 언(焉)이 나오는데 17장처럼 이에 내(乃)의 의미입니다.

 

19. 還淳

絶聖棄智, 民利百倍 ; 絶仁棄義, 民復孝慈 ; 絶巧棄利, 盜賊無有. 此三者, 以爲文不足 ;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을 버리고 지()를 끊으니 백성의 이로움이 백 배가 되고, ()을 끊고 의()를 버리니, 백성은 효()와 자()를 회복한다. 교묘함을 끊고 이로움을 버리면 도적이 없게 된다. 이 세 가지로는 백성을 교화시키기에 부족하니, 그러므로 따르는 바를 있게 하니, 소박함을 드러내고 질박함을 안고, 사사로움을 적게 하고, 욕심을 덜어내야 한다.

19장의 제목은 환순(還淳), “순박함으로 돌아가다”입니다. “절(絶)~기(棄)~”가 반복돼서 나오는데 순박함으로 돌아가기 위해 끊고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장입니다.

성(聖)은 오제(五帝)가 만든 제도입니다. 지혜(智惠)를 버린다는 것은 무위(無爲)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상공은 유가에서 얘기하는 인의(仁義)를 버리면 백성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관계가 회복된다고 본 것 같습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은혜(恩惠)를 보여주는 인(仁)을 끊고, 화려한 말을 숭상하는 의(義)를 버리라고 했습니다.

문(文)은 경우에 따라 좋은 의미이기도 하고, 나쁜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따라야 할 모범적인 것입니다.

현소포박(見素抱樸)은 하상공이 생각하는 정치입니다. 현소(見素)는 진(眞)을 지키는 것이고, 포박(抱樸)은 질박함을 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줘서 법칙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합니다. 뭔가 보여주기 식의 정치 같지만, 여태껏 논의를 살펴보면 실제로 도(道)를 깨우치지 않으면 보여주기 식이라는 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소사(少私)는 정(正)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고, 과욕(寡欲)은 족함을 아는 것입니다.

왕필은 욕망을 최대한 줄이라고 얘기하는데, 하상공은 정욕(情欲)을 제거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확실히 적극적이네요. 그리고 그걸 따르지 않으면 수명이 단축된다는 것도 섬뜩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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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8-15 15:09
    이십대라고 같은 이십대가 아니란다.^^ 왕필을 20대의 역부족으로 정리해버리고마는, 21세기 이십대의 오만!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