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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인류학] 0922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7-09-23 21:14
조회
146
170922 동화인류학 후기


<선녀와 나무꾼>, <도량넓은 남편>, <구렁덩덩신선비>, <신비한 전생 인연>, <개구리 왕자>, <진짜 신부>, <어부와 아내>


동화인류학 가족 편, 첫 번째 관계는 ‘부부’입니다. 부부란 무엇일까요. 저는 결혼을 안 해서 잘 모릅니다만^^;; 결혼식장에서 맺어지는 두 사람, 그때부터 ‘부부’라고 선언하는 두 사람이 떠오릅니다. 부부란, 그 전까지는 완전한 타인이었던 두 사람이 사회적으로 ‘한 묶음’으로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제도가 만들어낸 남녀관계가 곧 부부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인정을 받았다고 해도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맥락의 삶을 살아온 타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동화에 나타난 부부는 단지 ‘사랑으로 맺어진’‘가정의 주축’이라기엔 일관되지 않은, 다른 양상을 보여주니까요.

먼저 <선녀와 나무꾼>을 보면, 이 두 사람은 일단 사는 차원이 다릅니다. 숲속에서 나무해서 먹고사는 나무꾼과 하늘나라에 사는 선녀. 두 사람이 사는 방식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였겠지요. 하지만 선녀는 나무꾼과 부부가 됩니다. 어떻게? 아시다시피 나무꾼이 선녀의 날개옷을 훔쳐 냈거든요! 저는 이 부부 관계가 ‘도둑질’로 성립된다고 생각했는데 토론 중에 ‘권력 ’문제가 둘 사이에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부부는 서로 평등하게 ‘계약’하고 서로의 재산이나 권리를 ‘교환’하는 관계가 아니라, 더 욕망하는 자가 더 큰 힘을 뻗어서 상대방을 갈취하는 그런 불균형 상태를 끊임없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선녀와 나무꾼>은 보여주는 것이죠. 아무리 사랑하고 계약한다 해도 결국 타인인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관계인 부부는 서로에게 절도라는 불법적인 힘을 행사할 때만 성립되고, 끊어지고, 이어지는 관계라는 것.

그런데 이렇게 생판 남에게 힘을 행사하는 부부관계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왜 외적 조건이 딱 맞는 것 같은데 어떤 부부는 힘없이 흩어지는가 하면 전혀 맞지 않는 두 사람 같은데 어떤 부부는 오랫동안 이어질까요? 그 비밀을 알려주는 것은 <신기한 전생 인연>이었습니다. 이 동화에는 <사랑과 전쟁>에나 나올 부부 3세트가 등장합니다. 집나간 아내, 바람난 아내, 그리고 아내 바꾸기. 그런데 이 세 이야기의 톤은 한결같이 ‘쿨’합니다. 집 나간 아내를 찾아내 ‘잘 사시오’라고 하는 남편, 외간 남자와 살겠다는 아내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구는 남편,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너와 나의 아내를 바꿔보자는 남편들. 이들에게 죄책감이나 악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왜일까요? 수경쌤은 이야기에서 ‘전생’이라고 하는 것을 ‘자연법칙’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아내는 자신의 힘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찾는, 자연스러운 행동의 일환으로 다른 남편을 찾아간 것이라고요. 이런 자연법칙에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이들 이야기에 나오는 부부가 관계를 소유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쿨’한 관계만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집착남’김도령이 나오는 <도량 넓은 남편>이 있지요. 어찌나 전 약혼녀에 대한 마음이 절절한지 공부 꽤나 한 도령이 여장을 마다않고 신방에 숨어듭니다. 아버지 세대간에 결혼담이 오갈 때는 이런 김도령의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관계에 돌입하면서 김도령이 ‘여장하고 신방에 숨어드는’사람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타인과의 관계는 이렇듯 ‘나’를 드러나게 합니다. 거기다 김도령은 ‘남자’라든가 ‘양반’이라는 사회적 코드를 벗어나 여장을 하여 성적 정체성을 해체시키고 다른 사람과 결혼한 최낭자에게 접근하지요. 재밌는 것은 최낭자와 결혼한 박도령의 반응입니다. 신방에 숨어든 김도령을 보고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가니까요. 이 남자, 최낭자를 자신의 아내로만 고정시키지 않는 ‘큰 사람’일까요 아니면 결혼은 단지 자신을 이루는 관계 중 하나로 보는 출세지향주의의 ‘편집증자’일까요. 어느 쪽으로 보든 서로를 동일시하고 소유하려고 하는 지금의 ‘부부’상에서는 벗어난 ‘도량 넓은 남편’같습니다.

남편이 달아나는 이야기의 경우, 그러니까 <구렁덩덩신선비>에서 남편이 도망가면서 아내가 길 위에 섭니다. 유현정 쌤께선 <구렁덩덩신선비>가 부부가 서로의 美와 醜의 양면성을 자각하고 중도를 찾는 이야기로 보셨지요. 장자댁 셋째 딸은 남편을 찾아 여러 육체노동을 하면서 남편이 있는 방향을 알아냅니다. 노동은 집에 갇혔던 각시가 길 위로 나서며 온 몸을 바쳐서 삶을 알도록 하지요. 남편을 찾았을 때 아내는 몰라보게 지혜로워져 있었습니다. 이때 남편은 목적이 아니라 도착의 한 상태이지요. 아내는 남편 덕분에 미처 몰랐던 생의 다른 부분을 박진감 넘치게 겪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이야기 중 가장 ‘어이없는’이야기는 <개구리 왕자> 입니다. 공주는 싫다고 울고 개구리는 끈덕지게 매달리고, 거기다 이 둘의 관계를 해결하는 것은 공주가 개구리를 벽에 던지는 살해미수(?) 덕분이었습니다. 나의 짝은 사실 ‘나를 있는 힘껏 던질 수 있는 자’라는 깨달음(!)을 주는 동화. 이 동화에는 어떤 선한 의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밖에 모르는 개구리와 공주간의 욕망이 충돌하는 양상만 나오지요. 하지만 이렇게 충돌하는 타인이 곧 부부가 된다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선언이 (벽으로 내동댕이) 있고 난 다음에야 타자는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살 수 있는 것이지요. <개구리 왕자>는 부부란 타자가 함께 살면서 서로 바닥을 노출한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동화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보면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관계일수록 그 거리를 분석해야 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반면 서로 너무 닮은 부부, <진짜 신부>가 있습니다. 저는 이 동화가 <신데렐라> 같더니 갑자기 <헨젤과 그레텔>처럼 변해서 무섭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습니다. 분명 처음에는 노동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 같았는데 갑자기 살림을 있는 대로 키우고 나자 새엄마(마녀)를 그 안에서 퇴장시키는 용의주도함이란. 거기다 기어코 왕자를 자기가 사는 성으로 데리고 오는 집념까지 있습니다. 소녀는 확실히 ‘나’의 살림을 키우려는 욕망이 확실한 캐릭터 같습니다. 그녀만은 다른 동화와 달리 길 위에 섰는데도 변하거나 다른 길을 찾거나 하지 않지요. 목적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목적한 바를 획득하면 바로 자신의 성으로 돌아온 소녀는 성장하고 또 어른이 되었는데도 새엄마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선민쌤께서 소녀와 왕자가 한 쌍의 편집증 커플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동일한 욕망의 수로를 타고 성으로 돌아가는 소녀와 왕자의 모습은 무섭기도 하고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집념의 아내 하면 <어부와 아내>가 있습니다.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려는 아내와 말리는 것 같지만 결국 그녀와 같은 욕망을 공유하는 남편이 나오는 동화. 만약 이 욕망이 순기능으로 작동하면 부부는 사회적 책임을 갖고 이웃과 관계 맺는 존재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당한 욕망으로 흘렀고, 그로 인해 우주 전체가 움직이게 되었지요. 김현정쌤께서는 아내의 마지막 소원, 그러니까 ‘하느님이 되고 싶다’는 소원에는 사실 ‘내 스스로’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고 싶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넙치는 그 소원을 읽어내 ‘내 스스로’모든 것을 해야 하는 돼지우리 같은 오막살이로 원상복귀 시켜 준 것이라고요. <신기한 전생 인연>에서도 그랬지만, 동화는 결국 ‘내 스스로’힘을 모두 펼치는 자연법칙 안에 있어야 존재는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는 계속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요. 부부관계는 그런 ‘내 스스로’할 수 있는 일이 드러나도록 하는 가장 먼 타인간의 관계이고요.

부부에 대한 동화들은 거듭거듭 다른 환경, 차원으로 가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타인간의 결속, 부부관계를 통해 나는 힘을 행사하고 변형되고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부는 단지 두 사람만의 관계가 아니라 그 사이에 수많은 관계들이 드나드는 만큼 더욱 타인을 통해 드러나는 나를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렇게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고 해석하는 것이 없이, 나와 닮은 것만 좋아하고 좇으면 그 관계의 욕망은 점점 단단해지고 신축성이 없어집니다. ‘나’의 동일성에만 집중하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주어진 ‘모델’에만 맞추려고 하게 되지요. 이렇게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계속되면 나타나는 것은 아무래도 <사랑과 전쟁>에 나오는 그런 악다구니들 같습니다. 단단한 관계, 출구 없는 욕망이 서로를 공격하고 결국 내파되는 것이지요.



다음 시간은 <안티 오이디푸스> 강의가 있습니다.


이번에 쓰신 과제는 ‘동.파.육.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3

  • 2017-09-23 21:49
    재미난 동화 읽기 시간이었어요~ 둘만 바라보는 관계로는 "영원히 오래오래 살" 수 없다는 걸 많은 동화들에게서 배웠네요. 다음 번 동화도 기대기대, 장화홍련 기대기대~

  • 2017-09-23 21:50
    신기하고 알흠답고, 무지무시 앗쌀한 동화나라!
    부부란 가장 가깝지만 너무나도 먼 타인, 결국 우리가 어떻게 남을 남으로 겪으면서, 다양한 욕망의 회로를 만들 것인가? 하는 화두가 남습니다. ^^
    저의 베스트는 역시 <개구리 왕자> !! ^^

  • 2017-09-24 14:43
    다음 시간 <앙띠 오이디푸스>는 '3장 9. 문명 자본주의 기계'를 읽고 만납니다. 최대한 여러 번 읽으시라는 채운 선생님 주문입니다. 이번에도 개별적으로 문자 쑝쑝 날려드리지요. 금욜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