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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정리 및 공지(6.18)

작성자
하동
작성일
2016-06-12 12:13
조회
589

1912년 고향에서 베이징으로 올라온 루쉰은, 교육부 첨사직을 수행하면서 사오싱 회관에서 비문을 베끼고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고대의 소설사를 연구하면서 긴 적막과 무료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 1918년 신문화 운동을 주도하던 문예 잡지 <신청년>의 편집자인 친구 진신이의 제안으로 처녀작인 <광인 일기>를 쓰게 됩니다. 말하자면 서른 여덟의 나이로 소설가로 데뷔하게 되는 셈이지요. 요새로 치면 한참 늦은 나이일텐데, 이후 56세로 죽을 때까지 18년의 시간 동안 중국 근대 문학사의 한 복판에서 비껴나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진신이의 권유가 아니었더라도 내면에 꿈틀대는 뭔가를 풀어놓을 기회나 장을 루쉰 본인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물론, 그냥 주수인이란 이름으로 고대의 문학과 문헌을 연구하면서 적막 속에 고요히 살다갈 작정이었을지도 모르겠지요. 여튼 신문화 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던 때에 그는 오랜 웅크림에서 벗어나, 4천년 중국의 역사를 식인의 연회로 규정하고 있는 이 문제적인 작품을 필두로, 소설이든 잡문이든 강연문이든 글의 형식을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쏟아냅니다. 이번에 읽은 <외침>은, 그렇게 1922년까지 4-5년에 걸쳐 쓰여진 글들 중에 소설 10여편을 묶은 소설집입니다. 여기엔, 그 유명한 <아큐정전>이나 <고향> 같은 것들서부터 <작은 사건>이나 <오리의 희극>과 같은 소품들까지,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상당히 편폭이 넓습니다.이 중에서 어떤 작품이 맘에 드셨는지 모르겠는데요, 전 개인적으로 이번에 <야단법석>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소박해 보이는 대로, 혁명이 가져온 일상의 술렁임과 그 속에서의 개인들의 욕망이나 갈등을 경쾌하고 자연스럽게 잘 그려낸 작품이라 해야 할까요? 현실적인 문제의식은 생생하게 살아있으되, 작가의 목소리는 깊이 가라앉아 있는 듯해 부담도 덜 했던 것 같고요. 무엇보다 짧은 이야기 안에 캐릭터들 하나하나가 손에 잡힐 듯 살아있는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가 멋진 이야기꾼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라고 해야 할지~^^.


저희 조에서는 좋은 공통과제를 준비해 오신 은남샘의 글을 두고, 루쉰과 소세키의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눴습니다. 채운 샘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옌푸의 <천연론>을 통해 서구의 진화론을 자기식으로 받아들인 루쉰의 경우엔, 인간의 삶과 역사를 ‘방향성 없이 무심히 생장소멸하는 자연(생명)의 질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고 바라보는 관점이 눈에 띄는 데 비해, 소세키의 경우엔 인위적인 제도 및 문명과 대비되는 인간 내부의 자연스러운 본성과 관련지어 자연을 바라보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었지요. 개인적 스타일의 차이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당시 중국과 일본이 처한 현실의 차이가 이같은 관점의 차이를 갈라놓지 않았나 싶다는 게 중론이었습니다. 어쨌든,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자연’에 대한 개념이나 맥락 자체가 좀 다른 면이 있어서,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게 참 어려운 일이었는데요, 근대라는 중층적인 시공간 속에서 상이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모습은 근대의 극복이라는 작금의 우리의 과제와 관련해서도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듯합니다.(시간 되시면 은남샘 공통과제를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요^^)


수업 시간에는 <외침>의 서문을 중심으로 많은 얘기를 하셨네요. 루쉰이 의학을 지속하지 않고 문학으로 전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환등기 사건을 아주 배제하고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어쩌면 중국인들이 영원히 비겁하고 몽매한 구경꾼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절박한 문제 의식이 그로 하여금 문예를 택하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고 하셨지요. 물론, 의학은 다른 실용적인 근대 학문들처럼 ‘공리’의 차원에서는 도움이 되겠지만, 정신승리법으로 현실의 실패를 무마하려는 아큐나 ‘입을 헤벌리고’ 조림돌림 당하는 아큐를 지켜보며 환호하는 무리들 하나하나의 정신을 개조시켜 진정한 변화, ‘혁명’을 가져 올 수 있으려면 아무래도 ‘글’이나 ‘말’로써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더구나 니체를 통해 ‘무리의 도덕’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노예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깊은 환멸을 품고 있었을 루쉰에게, 개개인을 자각시켜 여기서 벗어나게 할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문학 말고는 달리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으로 돌아선 그가 지속적으로 느껴야 했던 게 ‘적막’과 ‘무의미’입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다케우치 요시미 같은 이는 이를 루쉰 문학이 기반한 가장 근원적인 지점과도 같다고 했는데요, 그렇담 사람들이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알아주지 않는 데서 오는 단순한 외로움이나 몇 번의 실패의 경험이 안겨주었을 절망감이나 배신감의 그늘 같은 건 아닐 게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나 민족, 국가적으로 최악의 상황에서, ‘공리’를 위해서 청년 루쉰은 열정적인 자세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도하고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물론이고 세상은 바뀐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연이 그것들에 품었던 희망이나 기대는 무너져 내렸을 테고. 채운 샘은, 그 적막감이라는 게 외부성보다는, 자신이 세계에 대해 품고 있던 상이 무너진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냐고, 그간 자신에게나 청년들, 나아가 국가나 사회에 대해 가졌던 희망이나 절망 같은 게 모두 자신이 만들어낸 헛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데서 생겨난 게 아니겠냐고 하셨네요. 결국, 절망이 그러한 것처럼 희망 또한 창녀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루쉰이 생각한 진화의 법칙이나 생명의 질서 또한 ‘적막’하고 ‘무의미’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고요. 그러고 그 긴 적막의 시간 속에서 그는 청년 시절의 비분강개라든가 또 그 여분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고대로 돌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채 그렇게 ‘무용’한 것들과 더불어 생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깊은 침잠의 시간 속에서 뭔가가 배태되고 있었으리라는 것이 또한 삶과 생명의 놀랍고도 비밀스러운 지점인 듯도 한 것 같네요.


저 유명한 ‘철방’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지요. 창문도 없고 부술 수도 없는 숨막히는 공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과연 그들을 일으켜 세워 현실을 직시토록 일깨우는 것이 잘하는 짓이겠냐는, 그들에게 도리어 미안한 일이 아니겠냐는 물음은 참으로 인간적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가 이 철방의 외부에 있었다고 하면 사실 고민이 필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내부의 사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으니, 그냥 문을 두드려대고 소리를 질러대면 되는 거겠죠. 왜 어리석게 그러고들 있는가고 말이죠. 그러니까, 루쉰의 자리는 철방 안에 갇힌 자들의 위나 바깥, 또는 앞이 아닌 그들의 옆이거나 속이었다는 것, 이로 인해 루쉰은 당대의 다른 선각자나 지식인과는 분명히 다른 면모를 보일 수 있었고, 글 또한 그토록 뜨겁고 예리할 수 있었다는 게 채운 샘의 말씀이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주인공 아큐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민족이나 국가, 계급적 차원의 추상적인 변화나 혁명이란, 다시 말해 아큐들 하나하나의 개체적 차원의 정신적인 자각이나 변화를 수반하지 못하는 혁명이란 결국 가짜가 되거나 무의미할 뿐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가 당대의 무수한 혁명론자들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지 않았겠냐 싶습니다. 개개인의 일상과 꿈, 관계들이 온통 신자유주의적 질서와 자본적 욕망의 그물망에 포획되어 버린, 숨막히도록 고요한 이 시대에 혁명이라는 게 요구된다면 과연 어떤 식이어야 할지를 루쉰을 통해 배울 바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래저래 많은 말씀들이 더 있었는데, 결국 그의 텍스트들을 머리가 아닌, 몸과 피로, 얼마나 더 치열하게 읽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더 세게, 강렬하게 부딪쳐 우리의 신체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새겨보도록 하지요.^^


1. 읽어올 책 : <방황>


2. 발제 : 윤재원 샘


3. 간식 : 락쿤 샘과 감자


4. 다함께 : 공통과제+ 암송


                                                      길을 까마득히 먼데, 나는 오르내리며 찾아 구하고자 하네


                                                                                -굴원의 <이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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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12 17:35
    넵! ㅋㅋㅋ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새겨보도록...
    글고보니 수업 전마다 암송이라도 잘 해가야지 하는데 것도 쉽지 않고만요-
    근데 마지막 <이소> 인용은... 샘, 운 후기 스타일 입니까. 오르내리며 찾아 구해보겠슴미당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