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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토요일 동사서독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16-06-07 14:36
조회
3574
동사서독 선생님들 안녕하시니까. 이번 후기를 쓰게 된 민호입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6월입니다. 벌써 2016년의 반이 지나가고 제가 규문에서 공부한지 일 년이 다 되어가네요! 지금은 규문 선생님들이 소세키와 루쉰의 자취를 찾아 그 기운을 받으러 일본 여행 중이신데요, 재밌는 추억 많이 만들고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싸오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안전하고 신나는 여행되셨으면 합니다~!!

지난주에는 1918년부터 1925년까지 루쉰이 망위안, 위쓰, 신청년, 천바오 부간 등 잡지에 여러 필명으로 기고한 잡문들의 모음집인 무덤 뒷부분과 열풍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 선집도 읽어왔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다시 루쉰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 잡문들이 전에 읽었을 때와 비교했을 때 새롭고, 저번에 눈치 채지 못했던 것들을 여러 가지 발견하셨을 거라 생각이 됩니다. 처음 읽으시는 분들도 소세키를 읽고 난 후에 읽으시는 것이니 둘을 견주어가며 또 다른 방식으로 읽어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암송으로는 제가 루쉰의 덤덤한 회상이 느껴지는 「무덤 뒤에 쓰다」의 뒷부분을 외웠고, 태욱 선생님이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에서 루쉰이 문학가였지 계몽가이지 않았기 때문에 계몽가일 수 있었다는 역설이 두드러지는 부분을 외워주셨고, 은남 선생님이 생명의 ‘흥겨운’ 원리를 쓰고 있는 「수감록49」를 외워주셨습니다. 은남 선생님의 유려하신 암송으로 저도 그리고 여성 선생님들도 ‘흥겹게’ 패스 받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ㅎㅎ하하

문학에서부터 출발한 소세키와 비교했을 때 루쉰은 실용학문으로부터 출발했다. 어린시절 서당을 다닌 이후 광무철도학교,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면서 루쉰에게는 진화론과 천연론 등이 뜨겁게 다가왔다. 근본적 차원에서의 과학적 사유가 루쉰의 밑바닥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가 받아들인 자연이란 인정사정 없는 것, 도덕법칙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즉 진화에는 방향성도 어떤 것도 없이, 성장하는 것은 성장하고, 쇠퇴하는 것은 쇠퇴하는 “그냥 그런 것”이라는 동양의 자연관과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굳이 서양의 자연관과 비교한다면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신생은 흥겹게 나아가고, 오래된 것은 흥겹게 소멸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루쉰에게 서양은 배워야할 어떤 것이 아니고, 동양은 극복해야 할 낡은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 대면해야 할 것은 소년의 공기를 마셔버리며 아직도 지배적 위치에 있는 낡은 가치들, 바로 ‘식인의 향연’이었다. 그것은 과거 또는 역사의 문제가 이니라 지금 진행되는 이 현재를 대면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개체의 정신의 변혁, 그것 없이 서양의 문물을 접붙인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아Q는 자기에게 벌어지는 사건을 관념으로 개조할 뿐이지 자기 정신을 혁명하지 않는다. 그런 아Q를 자신과 구별 지으려는 구경꾼들의 비겁함도 아Q인 것이다. 관념으로 조작하고 유지하려는 습성. 그것을 일신하려하는 자기변혁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 루쉰의 진단이라고. 그런데 그것이 쉬운가.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 글쓰기의 본질을 ‘속죄의식’이라는 어두움으로 보았다. 지난 1월, 루쉰 에세이를 쓸 때 이를 이해해보려 쩔쩔맸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루쉰 글에는 그런 어두움 뿐 아니라 유머, 유쾌한 면도 상당히 녹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채운 선생님은 다케우치 요시미가 물론 시대상황에 의해 해석적으로 루쉰을 봤겠지만 이 지점을 간과한 것 같다고 하셨다. 루쉰은 쉬광핑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대가 허무와 폐허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폐허와 허무와 맞서 싸우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폐허임을 직시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의 행위는 능동적이다...

이번 공통과제를 쓰면서 제가 문제의식을 느낀 지점은 바로 잡문들과 「무덤 뒤에 쓰다」에서 느껴지는 루쉰의 차이였다. 그 당시 문학계에서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말을 그대로 따와서 이를 풍자하고, 모순을 폭로하고, 공격 받고 공격하는 속도감 있는 잡문들에 비해서 무덤과 열풍의 서문, 후기는 차분하고 담담한 자기 고백적 필체로 쓰여져 있다. 수록된 잡문들은 그 당시 신문예의 성격을 띠는 잡지에 실리는 글들이어서 그 독자들과 시대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글이었다. 또한 루쉰은 사소한 것들을 소재로 많은 잡문을 썼다. 그에게 사소함과 일상을 쓴다는 것은, 그 사소함을 가로지르는 습속들을 꿰뚫어 보여주는 것이다. 문화 또는 습속이라는 것은 인간의 신체와 삶의 양식을 파고들어 거기에 남아 있다는 거라는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니체의 말, “모든 문화는 피로 만들어졌다.” 루쉰은 그 사소함과 싸웠던 것이다.
자신이 몇 년 전, 많게는 십 몇 년 전에 쓴 그러한 글들을 스스로 교정하지 않고 엮으면서 루쉰에게 여러 가지 생각이 일었을 것이다. ‘무덤 뒤에 쓰다’에서는 자신의 책을 사간 청년이 쥐어준 돈에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음을 느끼면서, 내가 저런 청년들을 독살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그래서 그에게는 수많은 망설임과 회상이 있다고 한다. 나의 의문은 어떻게 이런 막막한 자기반성과 죄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쓸쓸함 속에서, 루쉰의 실제 글은 거침없고 신랄하며 가끔은 유쾌하기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채운 선생님은 여기서 루쉰과 소세키를 같이 이야기하시면서, 그 둘에게서는 확신의 세계가 아니라, 망설임과 머뭇거림이 계속된다고 하셨다. 바로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싸울 수 있다, 자기 확신이 있는 자는 오히려 자길 지키려할 뿐이라고 하셨다.

작년에는 ‘무덤’이라는 제목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떻게 자신의 첫 작품집을 ‘무덤’이라고 제목을 지을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했을 뿐이다. 루쉰에게는 세상을 생명적 차원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중간물일 뿐이며 교량에 불과하다는 것. 채운선생님은 글 또한 그래야 한다고 했다. “시대의 폐단을 담은 글은 그 시대의 폐단과 함께 사라져야 한다.” 글은 자신의 과거의 생각의 흔적이고 삶의 흔적일 뿐이다. 내가 지금 쓰는 글은 지금 여기에서 쓸 수 있는 것이지, 내일 보면 시체라는 생각, 그 자체가 생명인 것이다. 소모해가며 가는 것이다. 단지 그럼에도 글을 쓰는 것은 바로 자신의 글을 편애하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며, 정인군자 무리를 불편하게 하고 싶고 그들의 좋은 세상에 얼마간 결함을 남겨주기 위해서이다. 그가 말한 중간물의 인무, 얼른 깨달은 다음에 새로운 목소리를 질러대는 것, 그리고 소멸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글 모음집을 ‘무덤’이라 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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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점점 무르익어가는 동사서독입니다. 루쉰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가시면서도 소세키와 루쉰을 근대라는 배경에서 비교하며 읽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소세키가 가지는 불유쾌함, 루쉰이 갖는 냉혹함, 그럼에도 글에서 느껴지는 유머러스함과 가벼움이 있었구요. 소세키에게 자연, 루쉰에게 자연 이 두 가지도 비교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그들이 가지는 머뭇거림과 망설임, 니체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 지식인에 대한 태도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보는 것도 좋겠네요.

16주차인 6월 11일 이번 주 토요일에 읽어 오실 책은 루쉰전집 2권 외침입니다. 근대소설의 막을 열었다는 루쉰의 소설집인데요, 소설 하나하나를 깊이 읽어오라고 당부하셨었습니다.

일본여행 무사히 재밌게 마무리하실 줄 알며, 그럼 무더위에도 정진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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