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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낌새 알아채기' - 주역 수업(11.7)을 듣고

작성자
재원
작성일
2015-11-12 15:43
조회
872
지난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 채운샘께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런 저런 일들로 절 구박하시던 중이었어요.

재원 : 요즘 잘 지내고 있어요. 아, 진짜, 완전 잘 지낸다니까, 왜 이러세요?

채운 : 넌 잘 지낼 때 조심해야 돼. 그게 잘 지내는 게 아니라니까.

견빙(堅氷)이 지(至)한다잖아.

재원 : 앗, 그럼 제가 리상(履霜)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하핫. 이 얼마나 아름다운 대화입니까!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무언가를 물어보시면 쭈뼛거리거나 먼 산을 쳐다보거나,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마음대로 창의적인 이해(말하는 이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해)를 주로 하던 제가, 주역수업 4주 만에 효사를 인용하여 선문답(?)을 할 수 있게 되는 경지라니요! 얼마나 이해를 했든, 일단 외우고 볼일입니다. 한문은 외우고 보는 것이 진리라는 걸, 이렇게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물론 아직까지는 건괘, 곤괘 밖에 외우지 않아서 지금 머리에 들어있는 게 그닥 많지 않아 헷갈릴 거리가 없긴 했지만요. 아무튼 두고두고 뿌듯한(!!) 마음입니다. 흐흐. 앞으로도 열심히 외워보아요.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 하자면, 위의 대화는 곤괘의 초육 효사지요. 초육(初六)은 리상(履霜)하면 견빙(堅氷)이 지(至)하니라. 직역하자면, 지금 서리가 내린 땅을 밟고 있다면 나중에는 견고한 얼음이 이를 것을 알라는 말이에요. 조금씩 추워지는 상황이라면, 곧 본격적인 겨울이 닥쳐온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겠지만요. 사람들은 조금만 멈춰서 생각해보면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인데도, 한치 앞을 내다보지 않고 지금 당장 코앞에 닥친 것에만 전전긍긍하기 쉽죠. 곤괘로 보면 음이 점점 자라날 것(효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차곡차곡 쌓이니까요.)이라는 말로도 볼 수 있고요. 양을 군자로, 음을 소인으로 본다면 곧 소인이 득세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다고도 해요. 큰 추위, 즉 겨울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이런 싸이클의 흐름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지만, 어려움이 닥쳐올 것을 알고 미리 조심하라는 거예요. 그 조짐을 잘 읽어서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거죠.

이 초육에 대한 문언(文言曰~)에는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거나(臣弑其君), 자식이 아버지를 시해하는(子弑其父) -여기서 굳이 ‘시해(弑)’라는 표현을 쓴 건요. ‘부도덕한 하극상’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다고 해요. 아버지가 어떤 성품이든 자식이 혈육관계의 아버지를 죽이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고요. 계약관계인 군신관계에서는, 신하가 죽어 마땅한 임금을 죽였을 경우에는 시(弑) 대신에 살(殺)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하네요.- 경우에, 그런 일은 하루아침에(정확히 말하자면 하루아침저녁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非一朝一夕之故)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연유는(其所由來者) 점차적인 과정을 통한 거였을 거(漸矣)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 상황이나 조짐 같은 것을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보다 일찍 분변했어야 했지만 그것에 실패한 까닭(由辯之不早辯也)이라고요. 여기서 아버지나 임금을 죽이는 좀 극단적인 비유를 들었기 때문에 우리 삶이랑 너무 동떨어지게 느껴져서 바로 다가오는 게 없을 수도 있겠지만요. 사실 우리가 살면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생각보다는 훨씬 많은 일들이, 단순한 우연이라기보다는 이미 내가 만든 맥락이나 기운의 장 속에서 인과관계에 따라 점차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다만 우리가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산만해 있거나, 욕심이나 감정 같은 거에 눈이 어두워져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요는, 정신을 차리자, 인 것 같네요. 채운샘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제발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는 메시지를 최근에 받은 저로써는 뜨끔하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이었습니다. 모두, 정신을 똑바로 차립시다!

모두들 사진을 기대하시는 것 같으니, 오늘은 규문에서 ‘바람직한 공부의 자세’를 보여주신 몇 분의 몰카(초상권을 좀 덜 침해하고자 사진용량과 크기를 대폭 줄였어요)를 올리는 것으로 글을 마치도록 할게요. 절대 설정이 아님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고 짧은 시간에도 모두 폭풍 같은 집중력을 보여주시더군요.  저는 책상에 앉아서 글자 하나라도 볼라치면, 일단 분위기도 잡혀야 하고, 뭐도 정리되어야 하고, 많고 많은 핑계가 필요한데 말이죠.  특히 천자문을 외우는 S양의 깜찍한 분홍색 집게가 기특해요.

그럼,  모두 정신을 차려서 오늘, 내일 잘 보내시고!  모두 토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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