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스피드웨건화] 2화 : "푸코 스캔들 털기"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6-29 23:05
조회
502

2화 : 푸코 스캔들 털기


글 : 건화



1. 푸코에게 무슨 일이?


두어 달 전, 매우 뜬금없는 뉴스를 접했다. 푸코가 튀니지에 체류하던 당시 휴양지인 시디부사이드에서 8~10세 아동들을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것. 이러한 논란은 기 소르망의 신작 에세이 『Mon dictionnaire du Bullshit』(3월 출간)에서 시작되었다. 아래는 문제가 된 구절들이다.

“나는 튀니지에서 푸코가 돈을 주고 어린 소년들을 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 그는 소년들과 시디부사이드의 묘지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묘지에서 그들을 강간했을 것이다.”
“그는 동전을 던져주며 ‘10시에 늘 만나던 곳에서 보자’라고 했다. (…) 그는 어린 소년들과 무덤 위에서 사랑을 나눴을 것이다. 동의여부에 대한 문제는 무시되었으리라.”

기 소르망은 1969년 휴가차 푸코를 방문했을 때 해당 장면을 목격했다고 주장한다. 영국언론 《The Sunday Times》와의 인터뷰에서 소르망은 공식적으로 혐의를 제기했고, 당시 프랑스에서 푸코가 ‘철학의 왕’이었기 때문에 언론인들이 성착취 사실을 알면서도 쉬쉬했다고 고발했다. 한 술 더 떠서 푸코가 프랑스에서라면 그런 행동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제국주의자라는 의혹까지 얹었다. 이를 《Le nouvel observatuer》, 《C News》, 《Valeurs actuelles》를 포함한 다수 언론들에서 아무런 팩트체크 없이 그대로 퍼 나르고, 또 그것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면서 스캔들은 일파만파 퍼져갔다.

세미나에서나 듣던 푸코의 이름을 포털 사이트 뉴스 섹션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범죄 혐의와 관련해서일 줄은! 1969년, 튀니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예민하고 고결한 비판가 푸코의 실체는 추악한 성범죄자였단 말인가? 당혹스런 마음에 관련 기사들을 살펴보았다.

 




2. 무엇을 알게 되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스캔들은 기 소르망의 ‘관종’ 기질과 조회수를 노리는 언론의 부화뇌동이 만들어낸 공허한 소동이었다. 밝혀진 사실들을 나열해보자. 우선 실제로 ‘성착취’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묘지에서’ 행해졌을 수는 없다. 프랑스 언론《Jeune Afrique》의 후속 취재에 따르면, 푸코와 알고 지냈던 현지인들은 다른 마그레브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디부사이드에서도 묘지가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으며 신성모독 행위를 막기 위해 늘 엄중한 감시 하에 놓여 있었다고 증언한다. 제기된 혐의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푸코 역시 묘지에 깃든 마을 수호성인의 바라카(baraka)[1]를 훼손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푸코가 8~10세의 소년들과 만났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시디부사이드의 오랜 주민인 몬셰프 벤 아브(Moncef Ben Abbes)는 푸코가 종종 소년들과 어울리곤 했지만, 그들은 8~10세가 아니라 17~18세였다고 회상한다[2].

성착취 혐의 자체에 대해서도 반대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L'express》는 소르망과 함께 푸코를 방문했던 동료를 인터뷰 했는데, 그는 소르망이 말한 것과 거의 비슷한 장면을 회상하지만 거기에서 성적 맥락을 배제 한다. 아이들이 ‘미셸!’을 외쳤고 푸코가 엘리트 백인 남성이 으레 제 3세계인들을 대하는 태도로 동전을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성적 학대가 일어났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 나아가 당시 푸코는 학생들의 반정부 투쟁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튀니지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는데, 이를 고려할 때 소르망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행각이 아직까지 비밀로 숨겨져 있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3].

현재 기 소르망은 언론의 해명 요청을 거부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정황상 그는 거짓말을 했거나, 몇 가지 정황을 가지고 과장된 추측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분명한 것은 그가 제시하는 증거는 제기되고 있는 혐의의 중대함에 비해 매우 빈약하다는 점이다. 아니, 사실 그의 자극적인 고발을 뒷받침하는 증거나 증언은 전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왜 이렇게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과거의 기억을 들춰내야 했던 걸까?

기 소르망의 정치적 프로필을 살펴보는 일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레이건, 대처, 피노체트와 같은 신자유주의 정치인들에 대한 옹호로 유명하며 68혁명의 유산을 청산하고자 하는 일련의 작업들로 알려져 있다. 《Ludi Matin》은 그가 맑스주의를 비롯한 모든 비판적 사유의 영향을 프랑스 사회로부터 추방하려는 일관된 목적 하에 움직이고 있다고 추정한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푸코에게 누명을 씌움으로써 ‘성’과 ‘권력’에 관한 그의 비판 작업들을 부도덕한 자기정당화의 수단으로 격하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다. 어쨌든, 이 모든 소동이 실은 자신의 책을 홍보하기 위한 소르망의 노이즈 마케팅이었으리라는 추측이 좀더 설득력 있게 들리기는 한다[4].

참으로 공허한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말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 사건이 푸코에 대해 새롭게 알게 해준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미국의 언론인 프랭클린 포어는 저널리즘이 테크 기업들에 점령당함에 따라 오직 “구글과 페이스북의 알고리듬에 맞춰 쉽게 발견될 수 있는 방법”만을 고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뉴스 공급자들이 클릭 수를 올리기 위해 선정주의를 마다하지 않고, 진위가 의심스러운 기사를 발행하고, 음모와 선동을 퍼뜨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몰아다 주었고, 결국 그들 중 하나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5]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경계선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바이럴’( virality : 이미지 혹은 비디오가 급속하게 유포되는 상황)뿐이다. 바이럴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푸코를 아동성범죄자로 만든다.





* 한국의 주요 언론 중에서는 조선일보, 연합뉴스, 경향신문이 스캔들을 퍼 날랐는데, 내가 이 글을 쓰는 이 시점까지 어느 언론사에서도 후속기사나 정정보도를 내보내지 않았다. 결국 “철학의 왕 미셸 푸코, 소년들 性착취”(조선일보)라는 선정적인 기사 제목만 남았다. 댓글들은 더 가관인데 굳이 옮기지는 않겠다. 아무튼, 이래서 내가 뉴스를 안 본다(?).



3. 창작자와 창작물의 관계


푸코로 돌아 가보자.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푸코가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푸코의 책을 다 읽어보지도 못했고 그의 개념들을 이해하고 소화해내는 데 늘 애를 먹고 있지만, 나는 푸코를 스승으로 여기고 있다(익살스런 표현이긴 하지만, 나는 동료들과 얘기할 때 종종 그를 ‘푸코 선생님’이라고 지칭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객관적일 수 없었다. 처음에는 혐의 자체를 부인하다가 고발자를 의심하고, 그 다음엔 잠시 동안이지만 이대로 계속 푸코를 공부해도 좋은지 고민하기도 했다. 다행히 이번 사건은 원만하게(?) 넘어갔지만 만약 혐의가 사실이었다면 어땠을까? 혹은 푸코에게 아직 밝혀지지 않은 더러운 비밀이 있다면 어떨까? 그때마다 나는 매번 동요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져봄직하다. 어느 철학자의 개인적 생애와 그의 사유 및 저서를 어떻게 관계설정 해야 할까? 어떤 철학자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의 철학도 폐기처분해야 마땅할까? 아니면 철학자의 삶과 그의 철학을 분리시키고 그 철학이 지금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유용함만을 취하면 되는 것일까? 쉽게 결론내릴 수 없는 문제다. 도움을 좀 받아볼까 하여 이리저리 서칭을 하다 《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라는 책을 발견했는데, 하이데거를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저자는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단 하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무려 5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을 썼다고 한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라는 얘기.

 




당장 떠오르는 두 사례가 있다. 우선 니체의 여성혐오 이슈. 정치적 올바름 감별기에 불합격 판정을 받은 몇몇 구절들로 인해, 니체는 대표적인 성차별주의 철학자로 오해받곤 한다. 그런데 여기서 니체의 (가정된) 여성혐오를 설명하는 데 종종 그의 개인사가 동원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여성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자라야 했으며, 태생적으로 몸이 약하고 예민한 성격을 지녔던 니체는 자신이 갖지 못한 남성성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되었다, 여기에 계속된 연애의 실패가 그의 여성혐오를 심화시켰다, 라는 식의 설명.[6] 이것은 폭력적인 오독의 종합세트다. 우선 니체의 구절을 그 맥락과 무관하게 단장취의(斷章取義)했고, 그것을 우리시대의 올바름으로 손쉽게 재단했으며, 니체의 몇 가지 프로필들을 가져다 그의 삶과 사유를 단정 짓는 데 사용했다. 이것은 한 철학자의 개인사를 그의 사상을 평가하는 준거로 삼는 것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이건 푸코는 게이이기 때문에 성의 역사를 연구했으며, 나폴레옹은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로 권력에 대한 욕망을 품었으리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다. 자기 자신에게 이런 잣대가 적용되는 것을 용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한 사례는 김기덕의 미투 사건이다. 여기선 문제가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그 자신도 영화계에 몸담고 있는 김곡에 따르면, 김기덕의 성폭행은 영화계 내부에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작가의 자아와 작품의 정체성이 분리 불가능한 유비”[7]를 이루고 있다. 단순히 그의 주인공들이 으레 성폭행범이라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김곡에 따르면 가해자가 구원자가 되기 위해 일부러 죄를 저지르고 여자는 성녀가 되기 위해 일부러 창녀가 되어야 한다는 김기덕의 구도에는 강간범의 자의식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 평단은 김기덕의 범죄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이 그대로 반영된 그의 영화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선을 적용하려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해외 영화제에서 거둔 성공과 ‘거장’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어쨌든 창작자와 창작물을 분리시켜서 보아야 한다는 상식이 여기에 작동했을 것이다. 이 경우엔 예술가의 행적과 그의 작품을 밀접하게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상반된 두 사례는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가 수집한 몇몇 개인사로 누군가의 작품이나 저서를 환원시켜버리는 것은 무지몽매한 짓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생산물을 그 자신의 행위나 신념이나 정체성 따위와 일대일대응 시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창작자와 창작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분리불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 그로부터 글쓴이의 고유한 호흡이나 리듬 같은 것을 느끼지 않는가. 그래서 내 결론은, 정답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환원불가능함’과 ‘분리불가능함’ 사이에서 최대한의 섬세함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4. 푸코를 '쓰자'

다만 어떤 것이 우리의 시야를 확장하는 해석방식인지를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어떤 철학자의 전기적 사실을 외면하는 것도,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푸코가 한 때 BDSM과 마약을 즐기는 쾌락의 화신이었다는 것, 니체가 생의 마지막 10년 간 광기에 지배당했다는 것, ‘긍정의 철학자’인 들뢰즈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배움의 의지를 꺾는 장해물이 아니라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다양화할 수 있는 해석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한 철학자의 삶의 맥락과 사유의 여정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접하는 우리 자신의 자리에 대해 섬세한 이해를 시도한다는 것이 전제 된다면 말이다.

결국 중요한 건 누군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가 도덕적이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사실을 접하고 그것을 나의 해석을 단념해야 할 이유로 삼을 것인지 더욱 세밀한 해석을 촉발하는 계기로 삼을 것인지의 문제다. 심판자나 관망하는 자의 위치에 멈춰 설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해석의 차원들을 늘려나갈 것인가. 이 두 선택지 사이에서 어디에 서게 되느냐는, 텍스트와 타인들과 세계와 삶에 대해 갖는 관심과 애정의 정도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때의 관심과 애정이란 호기심이나 친밀감 같은 것이 아니라, 낯선 마주침들을 통해 스스로의 관점을 변용시킬 수 있는 정신과 신체의 역량을 말한다.

 




짧게나마 푸코를 공부하는 동안, 나는 내 나름 다양한 푸코‘들’을 만나왔다. 처음에는 그의 섹시한 권력이론이 눈에 들어왔고, 그 다음에는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8]를 알고자 끊임없이 계획을 수정하고 관점을 이동하는 지적 성실성이 보였으며, 최근 들어서는 길들여지지 않는 실존을 구성하고자 하는 한 사람의 고행과 자기 훈련이 느껴진다. 애초에 내게 훼손되어서는 안 될 단 하나의 푸코의 형상 같은 게 존재한 적은 없다. 중요한 것은 푸코를 보는 나의 관점이 달라질 때마다 내가 나의 삶을 이해하는 관점 또한 확장되고 변주되어왔다는 점일 것이다. 푸코와 새롭게 만날 때마다 나는 이전과 다르게 질문을 던지고 사건들을 다르게 감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푸코의 감춰진 행적 같은 것을 새롭게 알게 된다고 해서 절망할 이유는 없다. 당황스럽고 골치 아플지라도 나는 그것을 내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 삼을 것이다. 푸코는 자신의 삶과 사유를 우리에게 선물했다. 우리 몫으로 남겨진 것은 그것들을 연장으로 삼아 스스로의 인식과 실존을 변형하는 일이다. ‘푸코’를 아낌없이 사용하는 것. 이것은 푸코에게 존경과 애정을 표하고 배움을 구하는 최선의 방식이기도 하다.



[1] 아라비아어로 <축복>을 의미하는데, 신이 예언자들 및 성자들에게 준 초인적 능력을 가리켜서 이용되는 말. 생존 중일 때만이 아니라, 사후에도 그 힘은 존속한다고 믿어지며, 무함마드나 성자들의 묘석, 그 주위, 유체나 유품에 바라카가 있다고 여겨져 숭상된다. (종교학대사전)
[2]  〈Michel Foucault n’était pas pédophile, mais il était séduit par les jeunes éphèbes〉, 《Jeune Afrique》, 2021.04.01
[3]  〈Michel Foucault et la pédophilie : enquête sur un emballement médiatique〉, 《L'express》, 2021.04.09
[4]  〈THE BLACK MASSES OF MICHEL FOUCAULT, THE BULLSHIT OF GUY SORMAN〉, 《Ludi Matin》, 2021.04.16
[5]  프랭클린 포어, 《생각을 빼앗긴 세계》, 반비, 18쪽
[6]  어떤 블로거가 〈브런치〉에 올린 글을 참조했다 (https://brunch.co.kr/@yoonheekim9/11)
[7]  김곡, 〈김기덕은 어떻게 거장이 되었나〉, 《한겨레》, 2018.03.18
[8]  미셸 푸코, 《성의 역사 Ⅱ》, 나남, 28쪽
전체 7

  • 2021-06-30 10:22
    소식을 듣고부터, 아냐 푸코는 분명 아이들에게 해코지는 커녕 닭고기 수프를 끓여줬을 거야! 라고 생각했던 1인입니다.
    결론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우리는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이 어떤 얼룩도 모순도 없기를 바라지만, 그런 마음 자체가 어딘지 불순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가 좋아하는 그가 깨끗하고 훌륭해야만 한다는, 그래서 나의 좋아함이 정당해야 한다는... 이 사고는 언제나 초조할 수밖에요.
    저는 솔직히 <천개의고원> 내내 자살하지 말고 살라고 당부했던 들뢰즈의 자살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아직도 혼란스러운데요.
    하지만 애정(집착)의 관점이 아닌, 우리 상식으로 정리되지 않는 한 철학자의 면면들을 생각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더 많은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 2021-06-30 10:59
    당황이란 감정을 이렇게 미세하게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고정관념, 내가 믿는 것에 대한 옳음 등이 딱 있었네요. 나에게 배움이 될 수 있는 모든 방편이 스승일텐데 ... 저도 존경이란 이름으로 나의 옳음을 증명할 신처럼 고결하고 완벽한 스승이란 우상을 필요로 했겠구나 싶네요. 내가 배움을 만들어내야 바로소 스승이 스승이 된다는 것 고것이 바로 스승에 대한 존경이겠다는 발견~^^ 잼있게 읽었습니다~

  • 2021-06-30 14:46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실을 접하고 그것을 ........ 더욱 세밀한 해석을 촉발하는 계기로 삼을 것인지의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 길위에 선 이들은 '심판자나 관망하는 자의 위치에 멈춰 서'지 말고 '계속해서 해석의 차원들을 늘려나가 낯선 마주침들을 통해 스스로의 관점을 변용시킬 수 있는 정신과 신체의 역량을 키워야'할 것이다. - 건화쌤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도 보여서 살짝 그 앞에 앉았습니다. ㅎㅎㅎ

  • 2021-07-01 09:04
    푸코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건화샘의 글을 읽으면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판단의 잣대가 아닌,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고 유용한 것일까. 여러가지 생각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

  • 2021-07-03 06:13
    부분만 보는 것! 부분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그 강박은 어떤 힘의지일까 ᆢ푸코는 살다갔을 뿐인데 그의 삶의 부분을 도려내 착취하려는 그 노인네의 기괴한 반응적힘의지에 대해 저도 기괴한 반응을 하려고 하지만 ᆢ뭣땜에 그딴데 고귀한 힘을 쏟나, 싶네요. 그 시간에 푸코를 더 읽자!!!

  • 2021-07-17 12:48
    잘 읽고 갑니다~

  • 2021-08-02 14:43
    푸코나 들뢰즈, 니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모르게 그들의 사유까지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은 오히려 그들의 철학을 더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어주는군요! 건화샘 글 덕분에 환원불가능함과, 분리불가능함 '사이'에서, 그들의 사유를 힘 닿는 데까지 섬세하게 이해해보겠다는 의욕이 샘솟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