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530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5-26 17:00
조회
464
언제나 사흘 뒤에나 올리는 게으른 공지... 이제사 올립니다. 기다리셨나요? ^^;
<금강경>이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남은 두 주도 모쪼록 신심을 가지고 성실히 나아갑시다.
다음 주는 바렐라의 <몸의 인지과학> 1, 2부 진도 나갑니다. 수영이가 벌써부터 열심히 발제 준비 중이어요. ㅎㅎ
간식은 수정쌤께서 해주시겠습니다.
자, 그럼 수업 정리 나갑니다.

21. 非說所說分 (말도, 말의 대상도 아님)
須菩提 汝勿謂 如來作是念 我當 有所說法 莫作是念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마땅히 설한 바 법이 있다고 하지 말지니
何以故 若人言 如來有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무슨 까닭인가 하면 만약 사람이 말하길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하면 이는 곧 부처님을 비방함이니라. 능히 내가 설한 바를 알지 못한 연고니라.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수보리야, 설법이란 것은 법을 가히 설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설법이라 하느니라.”
爾時 慧命須菩提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 聞說是法 生信心不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 非衆生 是名衆生 그때에 혜명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미래세에 이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저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 함은 여래가 설하되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

앞서 나온 이야기들의 반복 같지만, 그 중 謗佛이라는 단어에 눈이 갑니다.
어떤 것이 부처를 비방하는 것인가? 채운쌤 설명에 따르면 그건 실제로 험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말을 도그마화 하는 것, 空의 가르침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방식으로 스승의 말을 대하는 것이랍니다.
성경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도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서 그것의 도그마화 여부가 판가름 나는 것처럼, 붓다의 가르침 역시 가르침의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그것이 제 스승에 대한 비방이 되기도 하고 스승의 길을 함께 가는 길이 되기도 한다는 거죠.
채운쌤에 따르면 인간이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들도 실상 인연조건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인연조건이란 게 어디 머무는 적이 있나요. 인연조건은 곧바로 흩어지고 마는 것, 하여 진리 또한 그렇다는 겁니다.
설령 그게 가장 존경하는 스승의 말씀이더라도 그것을 고집하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스승의 말씀을 가장 강하게 왜곡하는 것이 됩니다.  그 가르침으로부터 다양한 접속 능력을 앗아가는 것이 되니 말이죠.
만약 들뢰즈의 논리 하나로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키려 한다면, 니체나 스피노자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그 철학의 혁명성과 열린 체계를 다 앗아가는 것, 그 철학자들을 비방하는 꼴이 된다는 겁니다.
이는 지금 우리로 하여금 공부란 어떤 것인지, 공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같지요.
조금이라도 아니다 싶은 이야기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거나 낮게 보는 건 아닌지, 이런 철학자의 책은 볼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내가 배운 것들로 모든 사회․문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22. 無法可得分 (법은 가히 얻을 것이 없음)
須菩提白佛言 世尊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爲無所得耶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乃至 無有所法可得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얻은 바 없음이 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내지 작은 법이라도 가히 얻음이 없으므로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23. 淨心行善分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함)
復次 須菩提 是法平等無有高下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다시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하느니라.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 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 卽非善法 是名善法 수보리야, 말한 바 선법이란 것은 여래가 설하되 곧 선법이 아니고 그 이름이 선법이니라.

존재하는 모든 이에게는 평등하게 佛性이 있다고 하죠. 세미나 때 이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아무래도 처음 불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쉬이 오해가 생길 수 있죠.
불성을 도덕성과 관련하여 가치 있는 것이라 이해하는 것, 가령 맹자의 四端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자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 그들도 부처일 수 있다는 말이 잘 납득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채운쌤 설명에 따르면 불성은 도덕과 무관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란 ‘전환할 수 있는 잠재성’이라고 하네요.
우리 모두 매일 같이 크고 작은 일들을 저지릅니다. 어떤 일들은 내가 생각하기에 괜찮은 일이고 어떤 일은 아니죠. 어떤 일은 생각하기에 괜찮은 결과를 낳고 어떤 일은 또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내 의지로, 내 알음알이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
불교의 설명에 따르면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연조건에 따른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과들이 겹치고 얽혀 끊임없이 일들이 벌어지는 게 이 세상인 거죠.
그러므로 행위 자체를 가지고 시시비비를 따지는 건 참으로 무망한 일입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게다가 행위자의 의지와 의도로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니까요.
스피노자가 말한 자연이 그렇죠. 이곳은 개물들이 서로의 힘을 발휘하며 사는 곳, 그래서 서로에게 작용하고 작용되면서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곳입니다. 각자가 코나투스를 발휘하며 안간힘 쓰는 이곳에서, 어떤 일이 나 때문이라고, 너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허용되고 어떤 판단도 어떤 책임도 불필요하다는 건 아닙니다. 불성을 이 지점에서 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위 ‘이후’ 그가 무엇을 하는가, 관건은 여기 있다고 불교는 말하지요.
그가 그것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글자 그대로 解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비극 속 영웅 내지 영웅을 닮은 근대 소설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바가 바로 이 풀어냄이죠.
저지른 일은 저지른 일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동침했고, 맥베스는 왕위를 찬탈했고, 라스콜리니코프는 두 여자를 죽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작품들은 죄의 동기를 추궁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고, 행위자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들은 일어난 사건 자체를 모른 척하거나 무마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실행한 일의 결과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관건은 오직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가 아니고는 세계 안에서 일어난 어떤 일도 사실상 풀리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해 ‘적법’한 절차로 이를 해결하는 제3의 기구는 사실상 아무것도 풀지 못하지요.
제 손으로 복수를 한 금자씨와 달리, 용서한다던 신애는 그래서 미쳐 쓰러지잖아요.
최근에 한 살인자의 얼굴을 공개한 일이 있었죠? 이거야말로 하나의 쇼 아닌가요? 어떤 것도 실제로 풀지 않는 대신(푸는 걸 금지하는 대신) 공중이 욕할 표적-가면을 세워두는 것, 이게 액정 저편에서 움직이는 포르노 배우의 역할과 얼마나 다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 더. 모두가 불성이 있다고 하나 모두가 금생에서 깨닫지 못하는 것, 이를 불교에서는 선업과 선근으로 설명합니다.
채운쌤 설명이 흥미로웠는데, 이때 선업이란 ‘내가’ 한 어떤 좋은 일이 아니랍니다. 이런 사고 자체가 불교적 세계관과 배치되는 것이라고.
다만 인연장 안에서 어떤 좋은 일이 왔을 때 이를 내 의지나 능력이 아니라 선업에 의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연들에 의해 하필 고맙고 좋은 일이 내게 이때 생긴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죠.
깨달음도 그런 거겠죠? 내 능력만으로, 내 욕망만으로 내가 해탈하고 열반에 들 수는 없는 것.
그러니 선업과 선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까 살인자를 이야기했을 때처럼, 삶을 무위적 태도로 일관하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는 없습니다.
어떤 자에게는 선근이 애초 구비되어 있고 어떤 자에게는 그렇지 않고… 이 말은 다만 인연조건을 지칭하는 것일 따름이라고 이해해도 좋다는 거예요.
우리는 다만 할 뿐입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확신하거나 기대하지 않은 채로. 그리고 인연조건에 따라 내게 오는 결과를 감당하고 풀어내는 거죠.
인연장이 서로에게 작용하고 작용 받는 개물들이 이룬 세계라면, 나 역시 무위가 아니라 어떤 힘을 발현하며 살고 있고 또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24. 福智無比分 (복덕과 지혜는 비교할 수 없음)
須菩提 若三千大千世界中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 持用布施 若人 以此般若波羅蜜經 乃至 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他人說 於前福德 百分 不及一 百千萬億分 乃至 算數譬喩 所不能及 수보리야, 만약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있는 모든 수미산왕과 같은 칠보무더기들을 어떤 사람이 가져다 보시하더라도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내지 사구게 등을 수지독송하여 남을 위해 말해주면 앞의 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여 백천만억분과 내지 산수나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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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7 07:00
    언제나 자세한 후기! 고맙습니다1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