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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從心所慾不踰矩'의 스피노자식 해석(채운 선생님의 스피노자 강의 소감 포함)

작성자
임병철
작성일
2019-04-25 23:39
조회
153
오늘 수원 평생학습관에서 채운 선생님의 스피노자 강의가 대망의 막을 내렸습니다.

8주동안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를 통해 나의 지식의 양이 증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스피노자를 통해, 채운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나의 삶이 조금 더 행복해지고, 조금 더 자유로와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앞으로도 계속 추구하고자 노력 할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단편적 인식이 아닌,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더 많은 연관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당위성을 알았으며,

그 앎이 앎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수 많은 관계들 속에서

매 순간 내 몸을 통해 변용되어 발생하는 관념이

적합한 관념, 기쁨의 정서가 되도록 항상 깨어 있으려 노력하고 싶어 졌습니다.

그 노력은 무엇을 얻기 위해 인내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노력의 과정 자체가 기쁨이며

타자와 함께 역량이 증가되는 경험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실험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나의 지성의 힘이 커지고,

그 지성의 힘이 커질수록 더 적합한 인식을 함으로써

내 속에 있는 모든 타자들 뿐만이 아니라,

나의 외부에 있는 모든 타자들에 대해 고마움과 사랑을 느끼고 싶습니다.

 

나의 존재의 원인, 나의 존재의 근거인

그 타자들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매 순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스피노자가 말한 '지덕'일 것이며, 붓다의 자비가 아닌가 합니다.

 

강의 소감은 여기서 마치고,

글 제목에 충실한 저의 생각을 적어 봅니다.

이 저의 생각의 바탕은 채운 선생님입니다.

강의 때 선생님께서 언급하신 내용을 바탕으로 제가 이해한 것입니다. (당연히 틀릴 수 있겠지요;;)

 

공자는 나이 70에 종심소욕불유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뜻은 다 아실테니 이것을 스피노자식으로 풀어 보겠습니다.

 

慾은 욕망,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존재를 존속시키려는 노력, 힘.

矩는 자연의 질서, 즉 자연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변하고 있으며

또한 그 모든 사물은 결코 혼자 존재하지 못하며 서로 복잡한 연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법칙.

 

나이 70에 최고의 지성의 경지에 오른 공자는

자신의 욕망(코나투스)의 실현이 자신을 알아주는 어떤 군주의 밑에 들어가

자신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정치를 통해서는 이루어 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결국 각 개인을 있게 한 타자(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사물)들에 의해서이며,

그래서 그들 각 존재가 진정으로 코나투스를 실현하는 것은

나를 있게 해주는 그 타자들의 역량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타자를 위하는 것이 곧 나의 존재를 위하는 것이며,

그것은 단순히 나의 존재의 이익을 위해 타자를 위해주는 이기적인 마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나를 진정으로 있게 해주는 이 기적과도 같은 우주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깊은 감사를 뼈속 깊이 체득한 바탕에서 나온 결과이므로

'나'라는 인식조차도 초월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를 깨달은 공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욕망'은

타자를 살리고 싶은 마음, 타자에게 감사를 표하고픈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라면 그 어찌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요.

 

이른바 현자, 성인이라고 불리는 공자나 붓다 또한 자연 안에 있는 존재이므로

당연히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코나투스를 실현하는 것이

자신을 포함한 이 자연안에 있는 모든 존재의 역량을 증가시킴으로써 진정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반 사람들 즉, 현자들과 같은 지성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그래서 적합한 인식을 매 순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코나투스를 실현하는 방법을 다른데서 찾습니다.

돈, 명예, 권력, 종교, 특정인물 등등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시키고, 또는 지켜주는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이지요.

 

결국 적합한 인식을 통해 이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신체의 변용을 통해 일차적으로 발생하는 단편적 관념에 사로 잡히고,

거기서 발생하는 정서에 예속됨으로써 ‘苦“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공자는 이것을 70세에 깨달았고, 석가모니는 35세에 깨달았네요.

여기서 깨달았다는 것은 그냥 그런 원리를 알았다,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 있음으로 인해 그 이해와 일치되게 느끼면서 자신의 삶을 영위했다는 말일 것입니다.

 

많이 부족한 공부를 바탕으로

나름의 이해를 글로 적어 보았습니다.

혹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기술된 문구나 단어가 있다면

누구라도 지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채운 선생님, 스피노자를 알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기회되시면 수원 평생학습관에서 장자나 붓다 또는 들뢰즈 등의 철학자에 대한 강의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기를 기대하며 글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체 2

  • 2019-05-01 18:38
    선생님께서 이해하신 만큼을 가지고, 거기서 또 시작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시작하는 자리가 우리가 이르게 된 자리이기도 하니까요.^^ 이런 후기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수원에서 또 뵐 기회가 있겠지요. 대학로에 오시거든 규문에 꼭 한번 들러주세요~!

    • 2019-05-01 21:50
      채운 선생님 답글 감사합니다. 공자는 50에 지천명 했는데 나는 뭐냐 하시면서 그때와 지금은 나이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아직은 괜찮다는 뜻으로 겸손의 말씀을 하셨는데, 제 나이도 50인지라 선생님의 그 말씀에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또 규문에 불쑥 들러고픈 제 마음을 어떻게 아시고 초대 아닌 초대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원에서 강의로 다시 뵐 날을 기대하며, 제 나름대로 동서양의 사유 세계를 횡단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