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오! 번역기계] 팀 잉골드, <선線> 번역 연재를 시작합니다~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4-19 09:54
조회
394
# 이번 주부터 새로운 번역 연재를 시작합니다. 규문에서 니체와 들뢰즈를 공부하고 계신 오정아 샘의 번역으로 만나게 될 책은 팀 잉골드Tim Ingold의 <선들Lines: A Brief History>(Routledge, Oxon, UK.)입니다. 우리말 번역서로는 <팀 잉골드의 인류학 강의>라는 개론서 한 권밖에 없지만, 팀 잉골드는 다양한 영역을 가로지르며 흥미로운 사유를 보여주는  인류학자입니다. 팀 잉골드의 <선들>은 2주마다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이 글이 더 많은 생각을 촉발하고 더 다양한 공부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연재를 시작합니다~^^

# 알라딘 서점에 나와 있는 저자 소개

영국의 인류학자. 애버딘 대학교 사회인류학과 학장이며, 영국학사원(British Academy)과 에딘버러 왕립학회(Royal Society of Edinburgh) 회원이다. 케임브리지 처칠 칼리지에 입학할 당시 자연과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곧 인류학으로 전공을 바꿔 1976년 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3~74년 헬싱키 대학을 시작으로 맨체스터 대학교를 거쳐 1999년 이후부터는 애버딘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관심사가 매우 다양하고 학문적 접근 또한 사적이어서 환경문제, 언어, 기술, 예술, 건축, 진화론, 인간과 동물의 관계 등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 아래는 일본학자가 쓴 팀 잉골드에 대한 글의 일부입니다.

“인류학자인 팀 잉골드(Tim Ingold)는 이 ‘도주선’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선’(line)이라는 개념을 기축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들뢰즈&가타리가 전제한 정신분석이라는 맥락을 완전히 도외시한 채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데, 잉골드가 한 사람의 인류학자로서 오리지널한 모색을 전개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개념의 응용 자체가 비판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그의 독해는 가타리는 물론 적어도 들뢰즈 철학의 큰 테두리에서 일탈하지는 않는다. 잉골드는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앙리 베르그송을 잇는 노선에 들뢰즈&가타리를 위치짓고, 삶에 관해 그들의 이해를 매우 충실하게 공유한다. 잉골드를 포함하여 그들이 공유하는 삶의 이해란 다음과 같다. ‘살아 있는 것’은 분단할 수 없는 ‘흐름’이자 ‘운동’이며, 이 ‘운동’에는 외부가 없고 또 이 ‘운동’을 잘라 나눈 부분들의 집합으로 다뤄질 수 없다.”(야나기사와 타미(柳澤田美,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どのように線を描けばよいのか」,『現代思想』, 2017年3月 臨時増刊号) / 출처: https://sarantoya12.tistory.com/114)


(): 간략한 역사


번역 / 오정아



서론


걷기, 직물짜기, 관찰하기, 노래하기, 이야기하기, 그리기, 쓰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이런저런 종류의 선을 따라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나는 선의 인류학이라 불릴 만한 것의 기초를 세우고자 한다.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친구와 동료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대부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자기가 잘못 들은 거냐고, ‘라이언(lion)’을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고, 그러면 나는 라이언이 아니라 라인(line)이 맞다고 확인해주어야 했다. 그들이 이처럼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선이라니? 전통적으로 볼 때도 관심의 초점이 될 만한 주제는 아니다. 지금까지 시각예술, 음악과 춤, 언어와 글쓰기, 기술과 물질문화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는 있어 왔지만 선의 생성과 중요성에 관한 연구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잠깐만 생각해봐도 사방에서 선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걷고,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인 인간은 어디를 가든지 선을 만든다. 이는 단지 걷고, 말하고, 손짓하는 행위처럼 선을 만드는 행위가 흔하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이 행위가 일상적인 인간 활동의 모든 측면을 포함한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그런 활동들을 하나의 연구 분야로 통합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분야이다.

하지만 이 길에 처음 들어섰을 때는 그런 거창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겉으로 보기에는 선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것은 말과 노래 사이의 구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관한 문제였는데, 이 둘을 구분하게 된 것은 서양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적어도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형태로 구분하게 된 것은 그러하다. 오랫동안 음악은 언어 예술로 이해되었다. 노래에서 음악적 본질은 노랫말이 울려퍼지는 것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음악이 ‘노랫말 없는 노래’로, 언어의 요소가 박탈된 상태로 이해된다. 그런가 하면 언어는 발화된 실제 소리와 어느 정도 무관하게 주어지는 단어와 의미의 체계로 이해된다. 음악에서 말이 사라지고, 언어에서는 소리가 사라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 나는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입에서 손으로, 낭독에서 손의 움직임으로, 그 움직임과 그것이 다양한 표면에 남기는 표시 사이의 관계로 관심을 옮겨갔다. 혹시 언어에서 소리가 사라지게 된 것이 글쓰기 자체가 이해되는 방식의 변화, 즉 손으로 쓰인 예술로서가 아니라 언어로 구성된 예술로 여겨지게 된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선 만들기’에 대한 나의 탐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선 자체나 선을 만드는 손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이내 밝혀졌다. 선이 그려지는 표면과 선 사이의 관계도 고려해야 했다. 선의 종류가 엄청나게 많았으므로 나는 임시 분류 체계를 마련해야 했다. 완벽하게 나뉘진 않았지만 두 종류의 선이 두드러져 보였고, 그것들을 ‘실(thread)’과 ‘흔적(trace)’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실과 흔적은 서로가 서로의 변형에 불과할 정도로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실은 흔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흔적은 또 실로 변했다. 게다가 실이 흔적으로 변할 때마다 표면이 생겨났고, 흔적이 실로 변할 때면 표면이 사라졌다. 이런 변형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다시 글과 문자에서 구불구불한 미로로, 자수와 직물 공예로 관심을 옮겨갔다. 그리고 돌고 돌아 마침내 다시 글로 되돌아가게 된 것은 직물짜기에 관해 알아보면서였다. 하지만 직물로 짜인 실로 마주하든 글로 쓰인 흔적으로 마주하든 모든 선은 하나의 운동이며 성장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그 많은 선들은 어째서 그처럼 정적으로 보일까? ‘선’이나 ‘선형성’ 같은 단어가 언급되는 순간, 어째서 현대의 많은 사상가들이 현대 분석 사상의 융통성 없는 논리, 편협함, 빈약함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일까?

인류학자들은 역사와 세대,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는 현대 서구인들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직선적인 데가 있다고 주장하는 습성이 있다. 그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확고해서, 비서구인들의 삶에서 선형성을 찾아보려는 시도는 좋게 봐야 민족중심주의적인 것으로, 나쁘게는 서구인들이 나머지 세계를 지배하는 데 이용해온 식민 지배 사업에 가담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지며 일축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타자성(alterity)이 비선형적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언급은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삶이란 길을 따라가며 사는 것이 아닌, 어떤 장소, 한 지점에서 사는 것이라는 생각. 하지만 사람들이 오고 가지 않는다면 장소라는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한 지점에 사는 삶은 장소에 대한 경험, 어떤 ‘곳’에 있는 경험을 주지 못한다. 장소가 되려면 모든 ‘어떤 곳’이 다른 곳으로 오고 가는 길들 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 삶이란, 내가 판단하기로는, 장소에서 사는 게 아니라 길을 따라가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길들은 일종의 선이다. 우리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알게 되는 것도, 그 세계를 이야기로 묘사하는 것도 이 길들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식민주의는 비선형적 세계에 선형성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한 종류의 선에 다른 종류의 선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는 삶이 따라가는 길들을 경계로 바꾸어 삶을 가두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렇게 분리된 공동체들, 각각 한 지점에 고립된 공동체들을 연결하여 수직적 집합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길을 따라가는 삶과 연결된 삶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게 나는 운동과 성장의 선과는 정반대인 점선으로 관심을 옮겼다. 선이 아닌 선, 어떤 것도 운동하거나 성장하지 않는 순간들의 연속. 그러자 곧바로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보여준 그 유명한 도표가 떠올랐다. 수천 세대에 걸친 생명의 진화과정을 보여주는 이 도표에서 모든 계통의 선은 일련의 점들로 표시된다! 다윈은 각각의 삶을 선이 아닌 점으로 표현했다. 인류학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가계도를 그린다. 가계도의 선들은 서로 연결되지만, 삶의 선도 아닐 뿐 아니라 어떤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다. 근대 사상은 장소를 공간적 위치에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듯이 인간에게도 비슷한 영향을 미친 듯하다. 인간의 삶을 순간들 안에 위치시킨 것이다. 이러한 결과를 뒤집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진화 자체를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다윈의 도표처럼 삶 자체를 점선으로 이루어진 생명나무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모든 존재, 모든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복잡한 관계 사이로 길을 찾아가면서 만드는 무수한 가닥들로 짜인 다양체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면 진화과정과 우리 자신의 역사를 끝없이 펼쳐지는 과정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각각의 존재가 자신의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 서로의 삶을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으로. 정말이지 선들은 세상을 바꿀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런 생각으로 용기를 얻어 나는 다시 쓰기의 문제로 되돌아갔다. 많은 학자들은 쓰기가 인간의 의식에 선형화의 개념을 심어주었다고 주장해왔다. 문자 사용 이전에는 없던 개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말과 제스처를 시작한 이래로 인간은 선을 만들고 선을 따라가며 살아왔다. 쓰기가 ‘표면에 뭔가를 새기는 행위’라는 원래의 의미로 이해되는 한, 그리기와 쓰기, 제도사와 필경사의 기술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과거와는 다른 개념의 선형화가 두 점 사이의 연결, 즉 점들을 잇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작가(쓰는 사람)라고 부르는 사람은 필경사가 아니라 문장가이고 저술가이다. 그가 구성하는 언어의 집합들은 기계적인 처리 과정만으로 종이 위에 새겨진다. 타이핑과 인쇄의 과정에서는 손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이 새기는 흔적 사이의 밀접한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선을 표현하는 것으로가 아닌 단어를 선택하는 것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이 점을 이해하자 마침내 처음에 가졌던 문제의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언어가 음악에서 분리되고, 말이 노래에서 분리되었는지. 물론 쓰기와 그리기도 같은 논리에 의해 분리되었고, 이제 이 둘은 기술과 예술 사이의 가장 중요하고 현대적인 이분법의 양극단에 놓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다(go stright to the point)’는 말의 의미가 궁금해졌다. 이는 우리 일상이나 일상의 대화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주제에 마음이 끌리면 관련된 이야기를 두서없이 주고받지만, 정작 주제에 다다를 무렵이면 그것은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덕을 오르다가 정상에 다다르면 더는 그것이 언덕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선이라고 하면 다들 직선을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사회에서 직선성(straightness)은 합리적 사고와 논쟁뿐 아니라 정중함과 도덕적 올바름이라는 가치의 전형이 된 듯하다. 점들을 연결하는 직선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이천 년도 더 전인 유클리드의 기하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것이 원인과 결과와 그 둘의 관계에 대한 우리 생각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선 이후일 것이다. 직선의 역사적 근원을 알아보면서,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직선의 예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전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던 너무나 명백한 곳들에서 그것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연습장에서, 마룻널에서, 벽돌담과 도로에서. 이 선들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표면에 그려지긴 했지만, 아무것도 연결하고 있지 않은 듯했다. 나는 이 선들의 근원이 유클리드 기하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틀의 날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실은 표면을 구성하며 흔적으로 바뀌었다. 선의 표면들, 그 위에서 모든 것이 연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근대의 확실성이 의심과 혼란에 자리를 내어주면서 한때 곧게 뻗어나갔던 선들이 파편화되었고, 삶의 과제는 다시 한 번 갈라진 틈 사이로 길을 찾는 것이 되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쓰면서 따라갔던 길이다. 글을 시작하며 언급했듯이, 선에 관한 책이라는 아이디어는 처음엔 이상하게, 심지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해가 되고 나자, 제한된 사고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아이디어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동료들뿐 아니라 친구와 친척 등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저런 제안을 내놓았다. 생각해볼 만한 선들의 예를 알려주는가 하면, 주제와 관련이 있으니 꼭 읽어보라며 책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모든 제안이 훌륭했지만 백 개 중 하나를 겨우 실행에 옮길 수 있을 정도였다. 제안들을 모두 검토하려면 아마 나는 여러 삶이 필요했을 것이다. 인류학자로서의 삶과 함께 고고학자로서의 삶이 필요했을 것이고, 동시에 고전주의자, 중세 역사가, 예술과 건축 역사가, 고생물학자, 지리학자, 언어학자, 음악학자, 심리학자, 지도제작자가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몇 개만 말해도 이 정도다. 힘겹게 길을 찾아간 나와는 달리 자신의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들에게는 내 무지와 서투름에 대해 사과의 말을 전할 뿐이다.

하지만 이처럼 탐구된 적이 없는 광대한 지적 영역을 다루게 된 것은 전혀 내 의도가 아니었다. 그런 시도를 하려는 의도조차 없었다. 선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며 내가 의도한 것은 훨씬 소박하다. 그저 이 영역의 표면에 작은 자국을 남기는 것, 이 영역에 관해 조금이나마 써보는 것이 다였다. 따라서 이 책은 사람들이 따라가보고 싶어질 물음들을 던지는 서문과도 같이 읽혀야 할 것이다. 각자의 지식과 경험이 이끄는 대로 어디로든 나아가도 좋다. 나는 아직은 이름이 없는 한 기획에 초대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물질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물질문화 연구가라고 부른다. 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동시에 나는 제도사, 서예가, 이야기꾼, 걷는 사람, 사상가, 관찰자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애초에 물질이 아니라 선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결국 사람이든 무엇이든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것, 그들이 성장하고 움직이며 만드는 그 길들이 한데 묶인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원래 어떤 ‘것(thing)’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했고,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나는 장소를 의미했다. 단어의 어원이 말해주듯, ‘모든 것은 선들의 모임이다.’ 이 책에서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인간과 물질을 연구하는 것이 곧 그들을 만드는 선을 연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전체 11

  • 2021-04-19 10:48
    우와!! 정아샘 이래서 바쁘셨구나. 모비딕 역자 후기에 "번역은 가시 많은 장미밭에서 춤추는 것과 같다"는 표현을 보고 정아샘이 떠올랐고 번역된 문장을 더 섬세하게 읽어내고 싶어지더라구요. 정아샘은 번역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고통의 과정에서 어떤 쾌락을 느끼게 되는지도 궁금하구요. 니체와 들뢰즈를 공부하면서 하는 번역은 또 어떻게 다른지도 알려주세요. 근데 제목이 왜 번역'기계'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올라오는 글 잘 읽을게요.^^

  • 2021-04-19 13:36
    '선' 그러면 직선이 젤 먼저 떠오르는데, 선에 대한 탐구!!가 뭘지 기대 되네요! 첫문장 "걷기, 직물짜기, 관찰하기, 노래하기, 이야기하기, 그리기, 쓰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이런저런 종류의 선을 따라 진행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선이 쓰기, 노래,,,, 이런것과 연결될지 궁금하네요, 앞으로 연재가 기대됩니다. 정아샘 홧팅!!!

  • 2021-04-20 07:38
    ‘선들'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들이네요^^! "인간과 물질을 연구하는 것이 곧 그들을 만드는 선을 연구하는 것이라는 점"이 어떤 새롭고 또 다른 세계를 보여줄 지 기대됩니다. ~

  • 2021-04-21 09:33
    갑자기 道가 떠오르네요! 논어에서 공자가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라고 한 것, 장자가 "길은 사람들이 걸어다녀서 생기고, 사물은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된 것이다(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라고 말한 것에서 '도'의 이미지와 잉골드가 말하는 線의 이미지가 겹치네요. 선을 도로 바꿔 읽어도 될 것 같긴 한데, 앞으로 어떻게 논의가 진행될지 궁금하네요! 추상적이기만 했던 '도'를 구체적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기대됩니다!

  • 2021-04-21 14:16
    역사와 세대 시간적 개념을 직선적으로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을 '습성'이라고 지적하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습성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선'은 무엇인지 그의 해석들이 궁급해집니다~~. 근데 쬐금 어렵네요.ㅎㅎ

  • 2021-04-21 20:11
    " 모든 존재, 모든 인간과 비인간존재가 복잡한 관계사이로 길을 찾아가면서 만드는 무수한 가닥들로 짜인 다양체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선이라...선하면 점과 뗄수 없다거나 곡선도 떠오르고 선이 무늬를 만들어 아름답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개체성을 유지하면서 다양성을 품는 자연이 떠오르기도 하고, 암튼 내용은 어렵지만 궁금하네요.

  • 2021-04-23 00:14
    와, '선'이라는 관점에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볼 수도 있는 거군요! 실(thread)과 흔적(trace)이 어디에서 어떤식으로 발견될지 궁금합니다.
    이 글을 원문으로 읽어야 했다면 매우 난감했을텐데 이렇게 매끄러운 글로 번역해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도 계속 기대하겠슴다~~ ^_^

  • 2021-04-27 08:47
    오와... 낯설고 어렵고 흥미롭네요! 동료들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친척들로부터도 대화를 통해 영감을 받았다는 말이 왠지 감동적인데요. 연구 주제처럼 이 책도 다양한 욕망의 선들이 가로지르고 있는 책일까요? 궁금하네요 ㅎㅎ

  • 2021-04-29 09:30
    "나는 아직은 이름이 없는 한 기획에 초대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물질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물질문화 연구가라고 부른다. 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은 사실은 분명하다. 동시에 나는 제도사, 서예가, 이야기꾼, 걷는 사람, 사상가, 관찰자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선에 대한 연구하면서 대번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의 대열에 들어선다는 것이 정말정말 멋지네요!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 2021-04-30 18:02
    선이라면 도형의 직선이나 가지런한 선만 생각했지 우리가 늘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선을 만들어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아요. 선과 선들이 마구마구 엉키면서 만들지는 이야기 몹시 기대됩니다!

  • 2021-05-01 20:43
    아이쿠 출력해서 줄치며 읽어야겠어요! 어렵네요^^,... 하지만 제 머리속에 생각 하나를 촉발시키셨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