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오! 번역기계] 팀 잉골드, <선線> 번역 1-1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5-03 16:15
조회
239
오! 번역기계 // 팀 잉골드Tim Ingold의 <선들Lines: A Brief History>(Routledge, Oxon, UK.) 

번역 오정아


1. 언어, 음악, 표기법

  노래는 사람들이 거대한 힘에 감동받도록 자신을 내맡겼을 때 힘차게 불리는 생각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말들이 스스로를 쏘아 올렸을 때 우리는 새로운 노래를 갖게 된다.


오르핑크갈릭, 넷실리크 에스키모 원로 (존 루터 애덤스 인용, 1997: 15)


말과 노래의 구분에 관하여

이 장에서 다루는 문제는 말과 노래의 구분과 그 둘의 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되었다. 나처럼 서양의 ‘고전적’ 전통 아래 자란 사람들은 목소리를 사용하는 이 두 방식을 언어와 음악으로 구분하여 대비시키는 경향이 있다. 음악을 들을 때, 성악곡이건 기악곡이건 우리는 소리 자체에 귀를 기울인다. 그 소리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것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 감정에 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음악은 청자의 의식으로 퍼져나가면서 그가 가진 세계에 대한 인식에 형태를 부여한다. 하지만 말을 들을 때는 상당히 다르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말의 의미는 소리에 있지 않고, 그 소리가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효과에 있지도 않다. 말의 의미는 소리의 ‘배후’에 있다. 그러므로 청자의 관심은 말의 소리보다는 그것이 전하는 의미에 집중된다. 어떤 면에서는 의미를 전하는 것이 소리의 역할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우리 의식은 소리를 뚫고 그 너머에 있는 언어적 의미의 세계에 도달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세계는 완전히, 그야말로 책의 페이지만큼이나 고요하다. 요약하자면, 음악의 본질은 소리인 반면 언어는 소리 없이 고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이처럼 고요한 언어, 혹은 비언어적 본질을 지닌 음악이라는 기이한 관점에 이르게 되었을까? 중세나 고대의 선조들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을 관점이다. 자주 인용되는 《국가론》의 한 장면에서 플라톤은 음악이 “세 가지 요소, 즉 가사, 화음, 리듬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소크라테스를 등장시킨다. 가사는 단순히 음악의 구성 요소인 것만이 아니라 주도적인 부분이다.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간다. “화음과 리듬은 가사를 따라야만 한다.” 플라톤과 동시대인들에게 훌륭한 음악이란 본질적으로 언어 예술이었던 듯하다. 음악에서 노랫말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 곡을 단지 장식음이나 반주로 만드는 행위였다. 이런 인식을 통해 당시에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에 부여되던 낮은 지위를 이해할 수 있다. 단어들의 소리는 그것이 낭송되건 노래로 불리건 의미의 중심이었다.

시간을 뛰어넘어 중세의 성직자에게서도 우리는 같은 생각을 발견한다. 리디아 고어(Lydia Goehr)에 따르면, 초기 교회 음악은 ‘가사에 중점을 두기 위해 고안된 낭송의 형식’이었다(Goehr 1992: 131). 인간의 목소리는 유일무이하게 신의 말씀을 표현할 수 있었으므로 단 하나의 완전한 음악적 기관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말을 전달하는 도구이지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4세기 인물인 성 제롬은 신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목소리보다 마음으로’ 노래하라고 조언했다. 그는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이 표명하는 말을 통해’ 노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Strunk 1950: 72).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서두에서 인용한 오르핑갈릭의 아포리즘과 놀랄 정도로 닮아있다. 말은 본질적으로 반향하며, 목소리의 역할은 말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노래에서 말들을 풀어놓는 데 있다는 것, 즉 오르핑갈릭이 표현했듯이 ‘말들을 쏘아 올리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중세를 거쳐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예를 들어, 베니스의 성가대 지휘자 지오세포 차를리노(Gioseffe Zarlino)는 1558년 자신의 저서 《하모니의 세계(Istituziono armoniche)》에서 플라톤의 규칙을 승인하며 인용했고, 최초로 인쇄된 오페라 곡의 작곡가인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도 1602년 자신의 글에서 이 규칙을 인용했다(Strunk 1950: 255-6, 378). 하지만 이런 관점은 현대의 감각으로 보면 이상하게 느껴진다. 현대인들이 언어와 말을 이해하는 방식을 알아보기 위해 나는 현대 언어학의 창시자 중 하나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연구를 살펴보았다. 1906년에서 1911년까지 제네바 대학에서 진행된 그 유명한 강의에서 그가 제시한 내용들이다(Saussure 1959).


얼핏 보면 소쉬르는 근대 이전의 우리 선조들만큼이나 말의 반향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유일하게 진정한 결합은 소리의 결합’이라고 소쉬르는 주장한다(1959: 29). 그림 1.1을 통해 언어를 설명하면서, 그는 물 위의 공기처럼 생각이나 의식이 소리 위를 맴돌고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쉬르에게 말은 소리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우리가 소리를 전혀 내지 않고도, 심지어 혀나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속으로 혼잣말을 하거나 시를 낭송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본다면 소리는 언어에 속한 것일 수 없다. 소쉬르에 따르면 소리는 ‘오로지 부차적인 것, 사용되기 위한 것’일 뿐이다(1959: 118). 언어에는 소리라는 것은 없고, 소쉬르가 ‘청각영상(sound-image)’이라고 부르는 것만 있을 뿐이다. 소리는 물리적인 것이지만 청각영상은 심리 현상이다. 청각영상은 마음의 표면에 찍힌 소리의 ‘자국’ 형태로 존재한다(같은 책: 66). 그에 따르면, 언어는 차이들의 한 배열을 또 다른 차이들의 배열과 연결하는 것, 즉 청각영상을 생각과 연결하는 것이다. 모든 생각(또는 개념)의 단편에는 그에 상응하는 특정 영상이 있다. 개념과 청각연상을 짝지은 것이 바로 단어다. 그러므로 언어는 단어들의 관계의 체계이고, 마음의 내부에 존재하며, 언어 행위로 발생하는 물리적인 결과물과는 관계없이 주어진다.


그림 1.1 생각의 면(A)과 청각영상의 면(B) 사이의 경계가 언어임을 보여주는 소쉬르의 묘사. 언어의 역할은 수직의 점선이 지시하는 것처럼 이 경계를 분할해서 특정한 생각과 특정한 청각영상 사이의 일련의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1959: 112)

이러한 소쉬르의 주장은 다음의 의미를 내포한다. 노래의 예처럼 단어가 음악에 통합되는 경우 단어는 단어이기를 멈춘다. 더는 언어에 속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수전 랭거(Susanne Langer)는 “단어와 음악이 노래에서 만나면 음악이 단어를 삼켜버린다”(langer 1953: 152)고 했다. 마찬가지로 소리는 언어적 표현에 종속되는 한에서 음악에 이질적인 것으로 남는다. 일본의 현대 작곡가 토루 타케미수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소리가 독자성을 지니지 못하고 아이디어에 지배당할 때 음악은 악화된다.”(Takemitsu 1997: 7) 고전적이고 중세적인 개념과는 정반대로 오늘날에 순수한 음악으로 여겨지는 것은 가사 없는 노래, 목소리가 아닌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이다. 따라서 조금 전에 내가 제기한 문제는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 있다. 노래의 필수 요소가 언어적인 것에서 비언어적인 선율과 화음, 리듬으로 바뀌게 된 경위는 무엇일까? 달리 말하면, 언어에서 소리가 제거된 경위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가능한 답을 제시한 사람 중 하나가 미국의 예수회 사제인 월터 옹(Walter Ong)(1982: 91)이다. 그는 우리가 글에 익숙해지게 된 점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단어들을 종이 위에 보이는 모습대로 파악하게 되면서, 즉 움직임이 없고 오랜 시간 들여다볼 수 있는 어떤 것으로 파악하게 되면서, 그것들을 실재하는 물체처럼, 발음되는 소리와 관계없는 의미를 지닌 물체처럼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 행위는 귀, 혹은 ‘청시력(earsight)’으로 보는 행위와도 같아졌다. 발화된 단어들을 듣는 행위가 그것들을 보는 행위에 가까워진 것이다. 소쉬르의 예를 한번 떠올려보자. 책의 세계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로서 그가 글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탕으로 말을 이해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인쇄된 페이지를 본 적이 없다고 해도 그는 ‘심리적 자국’으로서의 청각영상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옹은 그럴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지점이 바로 그가 소쉬르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부분이다. 이후의 많은 언어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소쉬르는 글쓰기를 오로지 말의 대체 수단으로, 즉 청각영상을 표현하기 위한 대체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소쉬르는 글의 모습이 애초에 청각영상을 형성하는 데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옹은 지적한다(Ong 1982: 17; Saussure 1959: 119-20). 글에 너무나 익숙해진 우리는 글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들은 옹이 말하는 ‘일차적 구술성(primary orality)’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로, 발음되는 소리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단어란 개념은 이들의 머릿속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말은 소리이지, 소리가 ‘전하는’ 무엇이 아니다. 문자를 쓰는 사람들은 보기 위해 귀를 사용하지만, 이들은 듣기 위해 귀를 사용한다. 이들은 우리가 음악이나 노래를 듣는 것처럼 말을 듣고, 소리의 배후에 있는 의미보다는 소리 자체에 집중한다. 그리고 정확히 이런 이유로, 문자를 쓰는 ‘우리’가 말과 노래를 가르는 구분, 우리에게는 명확해 보이는 그 구분이 이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일차적 구술성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과 노래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다.

전체 3

  • 2021-05-04 09:38
    정말... 기록된 문자의 이미지로 환원해버리지 않는다면 말은 대단히 다양하고 독특한 질감들을 지니고 있는 소리겠군요. 생각지 못한 부분이네요!

  • 2021-05-06 23:20
    이 글을 읽으니 제가 소리가 제거된 언어 속에 살고 있다는 게 조금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아, 고요한 글의 세계에 맘껏 몰두할 수 있는 걸 감사해야 하는 걸까요?)
    도대체 생각들이 힘차게 노래 불려진다는 건 어떤 건지, 말들을 노래로 쏘아 올린다는 건 어떤 건지 호기심이 생깁니다.
    저는 생각을 문자로 붙잡아 두지 않으면 그냥 휘발되고 마는데, 생각을 그대로 소리에 담아낸다는 건 정신과 신체가 함께 공명하는 어떤 것이지 않았을까요...?!
    암튼 매우 흥미롭습니다.

    다음 글도 기다릴께요. 좋은 번역 감사합니다, 정아샘! ^^

  • 2021-05-12 09:26
    일차적 구술성에 사는 사람들은 어땠을까...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상상해보고 싶네요.
    '발음되는 소리와 관계없는 의미를 지닌 물체처럼' 여기는 것이 지금 우리라면, 그런 습관과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해지네요.
    다음 화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