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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신편 숙제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5-10-31 08:43
조회
525

2015.10.31 동사서독 - 《루쉰전집》(3권) 중 <고사신편>, ‘검을 벼린 이야기’ - 수영



복수


‘검을 벼린 이야기’에서의 미간척의 복수 그리고 《임꺽정》에 등장하는 유복이의 복수 이야기를 좋아한다. 억울하고 서러울 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둘 수 없을 때(?), 아니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꼭 저와 같이 - 미간척의 복수나 유복이의 복수와 같이 - 복수를 해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저 복수가 쉽사리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검을 벼린 이야기’ 초반에 보이는 미간척의 모습처럼 “죽여 버릴 테다”하며 수를 버렸다가도, 이내 측은한 마음에 또 얕은 동정을 베풀기를 왔다갔다한다. 복수를 딱히 생각하지도 못하지만, 생각한다 하여도 우리의 복수는 가령 맹수들과 같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자나 호랑이가 용맹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의 ‘용맹’이란 실상 이유도 뭣도 없다는 것. 가차없는 살육, 주저함 없는 싸움 등이 우리가 말하는 맹수의 용맹이다. 우리가 복수를 말 할 때, 어떤 대단한 복수를 말하여도 저 맹수와 같이 용맹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억울함에 차, 일종의 손해 배상을 청구하며, 자기의 정당함을 주장하며 복수를 운운 한다. 대의, 도덕, 선 등에 기대어 복수를 말한다. 아니 실은 ‘복수’같은 건 하지도 못한다.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이들에게 설교를 늘어 놓거나, 용서 운운하며 정신상으로 승리할 뿐인 정도다. 아니면 자기 연민에 취해 절망에 빠진양 하고 있거나.


우리가 ‘용서’와 ‘복수’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쟤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말했듯이 맹수와 같이 용맹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자기 목숨도 중하고, 잃고 싶지 않은 것도 많다. 두려워하는 것도 많고. 하여 뭐가 내게 더 이익인지, 어느 편이 더 할 만한 일인지, 어떻게 해야 내게 돌아오는 호의는 크게 하고, 상대에게 돌아갈 적의 및 해악은 크게 할 것인지 등등을 쟤느라 머리만 복잡하다. 그리하여 “죽여버리겠어!”와 “그래도...”를 왔다갔다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모든 것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으며 살거나. 우리에게는 아마도 제대로 된 복수도, 용서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 가차없는 복수같은 건 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에 훨씬 정이 가기도 한다. 아니, 엄밀하게는 복잡한 인간의 상황일까. 쉽사리 누가 적인지, 무엇이 복수의 대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갈 길을 잃기도 하고 또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편을 택하는 것은 아닌가.


‘검을 벼리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복수에는 적어도 일단 우리식의 얕은 계산법 그리고 그에 따른 전전긍긍은 없다. 미간척은 바로 조금 전에 만난 사내를 이내 알아보고 자기의 머리와 자기의 검, 결국 자기의 복수를 맡긴다. 연지오자는 미간척의 머리를 들고, 기괴한 싸움터를 만들어 자기도 왕도, 미간척도 뒤섞여 사라지게 해버린다. 누가 승리자인지, 패배자인지도 모르게 된다. 미간척이 복수에 성공했는지 성공한 것이 아닌 것인지도 의아하게 된다. 우리가 기대하는 ‘승리’ - 하다 못해 적을 굴복시켰다는 승리감같은 것도 없고, 그로 인한 환호나 보상도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의아한 복수다.


이제 막 16살이 된 미간척이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길을 나섰을 때, 한편으로는 이상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분명 그에게 어떤 통렬함을 일으키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가 가령,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그로 인한 한탄에 사로잡혀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또 아버지를 죽인 원수로 인하여 자기가 여태 인생에서 큰 불행을 겪었다는 식의 원망을 미간척과 연관시키기도 어려웠다. 차라리 어리버리하게 길을 나섰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허나, 연지오자에게 목을 내어줬을 때, 이 복수가 미간척에게도 하찮은 일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미간척이 복수하고 싶었던 것은 차라리 약한 마음 같은 것은 아니었을지.


행위에 의도나 목적, 그리고 행위자를 분리시키는 발상은 기본적으로 노예적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단순하게는 합리화라거나 정당화.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보증이 필요하고 척도가 필요한 자들이 자신의 행위나 의도나 목적, 도덕 등을 분리시킨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규준들에 사로잡혀서 우리는 뭘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를 시도해 보기도 전에 주저하게 된다. 아마도 제대로 용서도 복수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기준들이나 합리화에 비추어서 용서하거나 복수할 것이니. 결국 이런 저런 이유들 속에서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한 채 있을 것이다. 미간척은 저 전전긍긍을 넘어보고자 결국 복수에 나선 것은 아닐까. 그의 복수는 이런 지점에서 이해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보상을 기대하지도 않고, 갖가지 미련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행위하고자 함에 그는 초면의 사내를 알아볼 수도 또 믿을 수도 있었고, 기꺼이 자기 목을 벨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문득 <보왕삼매론>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억울함을 밝히면, 억울함이 제대로 밝혀졌건 밝혀지지 않았건 그것은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는 것. 그러니까 자기의 원한을 정당화할 뿐, 근본적으로 그 마음에서 자유롭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 우리가 어떤 정서 - 분노나 슬픔, 사랑, 즐거움 등 - 를 경험할 때, 보통 그 정서의 원인을 특정한 외부 대상에 투사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일어난 마음이란 복잡한 인연조건 속에서 자기 신체에 일어난 특수한 상태에 대한 무엇이라고 한다. 어리석다는 것은 자기의 어떤 정서에 사로잡히는 것. 그 특정 정서를 특정 타자나 특정 조건에 투사하든, 혹은 특정하게 애착하든. 이런 어리석음을 넘으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억울함이든 원한이든 뭐든의 정서를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루쉰의 글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알량한 용서나 망각으로 읽어버리고 싶어 하는 내 생각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의협심이나 동정심이니 하는 그런 것들, 이전에는 깨끗했었지. 그러나 지금은 모두 너절한 적선의 밑천으로 변해 버렸어. 내 마음에는 네가 말하는 그런 것들이 조금도 없다. 난 그저 네 원수를 갚아 주려는 것 뿐이다!”


“좋아요. 그런데 아저씬 어떻게 내 원수를 갚아 줄 수 있죠?”


“네가 나한테 두 가지만 주면 돼.”


두 점의 도깨비불 아래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말했다.


“그 두 가지 말이지? 얘야 잘 듣거라, 하나는 네 검이고 다른 하나는 네 머리다!”


미간척은 이상스럽고 약간의 의심이 들기도 했으나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잠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374)


“(...) 총명한 아이야, 잘 들으렴. 내가 얼마나 원수를 잘 갚는지 너는 아직 모르겠지. 너의 원수가 바로 내 원수이고, 다른 사람이 곧 나이기도 하단다. 내 영혼에는 다른 사람과 내가 만든 숱한 상처가 있단다. 나는 벌써부터 내 자신을 증오하고 있단다!”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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