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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에세 서문....

작성자
수엉
작성일
2015-11-07 23:59
조회
484

2015.11.7 동사서독 에세이 준비 메모 - 수영


주제 : 아Q의 죽음 그리고 인간의 길


지금까지 읽은 것들에 따르면, 분명 루쉰은 그의 초년에 생명의 차원에서 인간의 길을 모색했다. 그것은 입인(立人)의 길이고, 중간물로서의 희생의 길. 또, ‘사람은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로 표명되는 무엇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그가 싸워야 했던 문제 중 하나가 ‘식인’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된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이는 그가 마주해야 했던 적들의 태도이기도 했고, 동시에 그 자신이 그동안 알게 모르게 의존해 왔고 공모하고 있었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식인’의 굴레는 어떤 방식으로 극복되는 것인가. 루쉰에게 싸움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인간의 길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 수 있게 되는가. 루쉰에게 인간의 길은 ‘식인’인 채로 인간이 되는 것인가, 혹은 ‘식인’을 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인가, 등등. 결국은 이 문제들을 풀어보고 싶다.


이 문제는 어떤 점에서 나를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루쉰에게 ‘식인’의 세계는 <광인일기>에서 ‘광인’의 눈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명된다. 그런데 왜 하필 ‘광인’인가. 어째서 지식인의 명민한 눈을 통해 ‘인육의 연회’를 고발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내 생각에 ‘식인의 잔치’가 그만큼 정시(正視)되기 어려운 무엇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은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드러나 있으나 보고 싶지 않은 것, 보아도 보고 싶지 않은 것, 알고도 알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식인의 연회로 말해지는 삶의 모습들인 것 아닐까. 식인의 잔치는 흔하게 벌어지며, 우리 또한 공모하고 있다는 것이 내게 중요하게 다가온다. 그러니까, 적이 없는 것이 아니건만 우리는 적에 대해 무지하다. 어떤 방식으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지” 모르고 또 알고 싶어 하지 않게 된다. 이 점이 내게 중요하게 다가온다.


어디선가 “분노하라”는 말 따위를 들은 적이 있는데, 무책임하고 서글프게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분노하라니. 누구에게, 무엇에 분노해야할지도 모르겠는데.’. ‘“분노할 줄도 모르는 무기력한 청년들아”하면서 혀를 끌끌 차는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했었던 것도 같다. 허나, 또한 스스로도 그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것 같으니 서글플 수밖에. 하여, “우리는 정말 분노 같은 것도 할 줄 몰라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요.”하면서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마냥 눈이나 꿈벅이게 된다. 아니면 그냥 무시하거나.


<아Q 정전>을 택한 것은 어떤 식이든 저런 상황에 돌파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인 것 같다. <아Q 정전>이 보여주는 것은 적과 동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식인의 사회다. 아Q는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꺼리가 된다. 한편, 아Q는 어떤가. 아Q가 건드리는 지점은 우리가 우리의 어리석음과 잔인함 따위를 완전히 외면하는 채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일 거다. 자기 자신, 식인의 연회 속에서 때때로 식인이 되었다가, 좋은 먹잇감이 되기도 하였다가 하면서 한 생애를 통과한다는 것. 그냥 그렇게 살고 또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이 사실이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감추어(?)질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고 싶다. 굳이 말하자면 ‘정신승리’는 어떻게 정시(正視)보다 우위에 설 수 있게 되는가. 대체 어떻게 우리는 눈 뜨고 장님인 채로 살고 죽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 나의 놀라운 정신승리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번 에세이에서는 ‘식인’을 키워드 삼아 아Q의 죽음을 정리하고 그것이 어떻게 돌파되는지를 <아Q 정전>을 통해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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