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 숙제방

  동사서독  &  동사서독 숙제방

들풀과제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5-10-24 13:10
조회
604

2015.10.24 동사서독 - 루쉰 전집(3) 중 ‘들풀, 아침 꽃 저녁에 줍다’ - 공통과제 - 수영


의존


나는 보시하지 않았다. 내게는 보시할 마음이 없다. 나는 그저 보시하는 이의 머리꼭대기에 앉아, 성가셔하고, 의심하고, 미워할 뿐이다. (33) - 적어도 여기에서 보시는 무조건 내어주는 무언가는 아니다. 흔히 생각하는 ‘자애로운 마음’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같은 것이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는다. 한 아이가 동냥을 하는데 그는 어째 진짜 불쌍해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질질 짜는 것도 성가신단다. 그는 고작해야 시늉을 하고, 동냥하는 수를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아마 차라리 충분히 ‘불쌍해 보인다’면 일은 쉬울 것이다. 적선을 베풀면 불쌍한 이를 도왔다는 만족감이라도 얻을 것이 아닌가. 그래도 불쌍해 보이지도 않는다면? 그래도 무언가를 적선하여 감사의 시선이라도 얻을까. 그런데 보이는 것은 동냥치들, 불쌍해 보이지도 않는데 뒤따르고 애걸하며 손을 내미는 이들이다. 그들이 무언가를 얻어 보내는 시선이란 실은 ‘그대도 속았다’는 것 정도는 아닐까. 우리는 여기서 여러 가지 태도를 생각하게 된다. 먼저,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 만족감을 얻고 싶지는 않다는 것. 그대의 숭배 같은 것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한편, 거짓 동냥질일지도 모를 무언가에 속아 그대에게 만족감을 주고 싶지도 않다. 나 자신을 그대의 만족을 위해 이용해 먹는 그대들에게 응하고 싶지도 않다. 그대의 동냥질에 기대어 높아지는 것도, 전락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런데 동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누가 동냥을 하는가. 또, 무엇을 어째서 동냥을 하는가. 절차탁마 수업에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존재는 가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니체의 글들에서는 결핍에서 출발하는 이와 충만에서 출발하는 이들이 대비가 되어 등장하곤 했었던 것 같다. 이해한 바에 따르면 가령 이런 것이다. 우리는 두 종류의 학자를 생각해볼 수 있다. 결핍에서 출발하는 이들의 경우 진리는 저 너머 어딘에든, 진리를 담지한 누군가에게든 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얻어야 구원되는 것,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이자 자기 삶이다. 하여, 그에게는 그 무언가를 얻어 자기의 부족을 메우는 일이 공부고 또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충만에서 출발하는 배움은 무엇인가. 이것은 아직 잘 모르겠다.


나에게 동냥은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의존적인 것. 갖가지 불안과 두려움, 혹은 알 수 없는 목마름이 우리의 동냥질을 부추긴다. 누군가는 “날 좀 보아 달라”고 몸을 흔들고 목소리를 높이고 온갖 시험들에 자기를 맡긴다. 실은 그는 “조아리고 뒤따르며 애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높다는 이는 존재를 걸어 구걸을 했던 이인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다. 누군가는 “신뢰”를 구걸하며 전 생애를 바친다. 그는 타인의 신뢰 어린 시선에 기대어 산다. 가련하다는 여인네는 자기를 “돌봐줘야 할 어린애”인냥 보아주기를 구걸하기도 하고, “친절한 눈길”을 구걸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적을 구걸하기도 한다. 그와 대치하고 싸우는 것으로 우리는 “용사” 비스무리한 것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어쩌면 지식인은 어리석은 민중을 구걸하는 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 어린양들이 필요하다는 무언가를 주며 그들은 존재감같은 것이라도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존재감’이니 하는 것은 다 뭘까. ‘존재감을 구걸한다’든가 하는 것이 말이 되는 말이긴 하나. 그런데 <복수>를 읽다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 - 그러니까 우리는 ‘존재감을 구걸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냥의 극치 아니 기본은 피를 구걸하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빨갛고 뜨거운 피”, “다스한 열기” - 우리는 어딘가 부데끼며, 웃고 울고, 또 전락하고 발분하고 일어서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대단한 동냥이 되기도 하는 것은 아닐까.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사람의 살갗 두께가 반 푼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빨갛고 뜨거운 피가 그 밑, 담벼락 가득 겹겹으로 기어오르는 회화나무 자벌레 떼보다 더 빼곡한 핏줄들을 따라 달리면서, 다스한 열기를 흩는다. 그래, 저마다 이 다스한 열기에 현혹되고 선동되고 이끌리고, 죽자 사자 기댈 곳을 희구하면서, 입을 맞추고, 보듬는다. 그럼으로써, 생명의 무겁고 달콤한 큰 환희를 얻는다. (<복수>)


“죽자 사자 기댈 곳을 희구하면서, 입을 맞추고, 보듬”는 것이 우리들이라면, 그 때 우리가 얻는 것은 “존재감”이라거나 “살아있다”는 느낌 같은 것은 아닌가. 이리하여 우리에게는 적도, 동지도, 고난도, 희망도 필요해진다. 헐뜯고 싸울 이, 피를 섞으며 역경을 함께 헤쳐 나갈 이, 다독여 줄 이, 돌봐줄 이, 보아줄 이, 도와줘야 할 이, 어리석은 이, 비판해야 할 이……. 이들 없이 어떻게 우리가 살아있음을 알게 될까. 그 때, 살아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허나 이 때 우리는 삶의 의미같은 것을 구걸하는 이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자기의 길을 간다”거나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한다. 불교에서 배운 것에 따르면 의존함이 실존이기도 한데, 의존하지 않음이 인간의 삶에서 자유의 길이고 해방의 길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의존하지 않고 길을 간다는 것, 모르겠다. 전에는 미래에 대한 목적이나 희망에 자기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어찌됐던 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 또한 나의 불안이나 두려움에 다름 아니라면, 그 다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싶어진다. 요즘에는 정말 더 모르겠다. 미래니 목적이니 자기니 하는 것들은 둘째 치고, 나는 저 ‘살아있다’는 느낌 같은 것에 대한 탐식자로 살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아직 채 풀리지도 않은 생각이 들었다.


<복수>는 기이한 싸움으로 끝을 맺는다. 두 사람이 있다. 둘은 온몸을 발가벗은 채 비수를 들고 광막한 광야에 마주 섰다. ‘둘은 보듬을 것이고, 죽일 것이다…….’ 보듬을 것이든, 죽일 것이든 사람들에게는 좋은 구경꺼리가 되어 사방에서 행인들이 몰려온다. 사람들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화해의 드라마라도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대단한 싸움을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무료한 이들에게는 낙이 되고, 버틸 것이 된다. 사람들은 “제 혓바닥의 땀 또는 피의 생생한 맛을 예감한다.”(38) 허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비수를 든 채 있지만, “보듬지도 죽이지도 않는다.” 그들이 서로를 적대하는 것인지 서로를 고파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게, 두 사람은 “보듬을 생각도 죽일 생각도 있어 보이지 않다”. 둘은 그렇게 한없이 서 있다. 몸집이 메마르고, 사람들은 무료함이 털구멍을 파고드는 듯하다. 사람들은 서서히 흩어진다. 만족을 주지 않는다. 동정도 사지 않고, 칭송도 사지 않는다. 피에 들러붙지도 않는다.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이 기이한 대치는 실은 엄청난 일인지도 모르겠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