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 숙제방

  동사서독  &  동사서독 숙제방

루쉰전집 2권 외침, 방황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15-10-17 03:05
조회
558


2015년 10월 17일 토 동사서독 성민호

 

루쉰의 소설은 잡문과는 다르게 더 부드러운 느낌이 있었다. 다른 외국 소설처럼 수식어구가 화려하거나 비범한 주인공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솔직하고, 그려지는 그림이 사실적이다. 그 끝이 늘 애잔하고 쓸쓸하긴 하지만. 많은 작품 중에 ‘행복한 가정’을 가지고 쓴다.

그는 ‘행복한 가정’이라는 주제로 글감을 고민한다. 이 주제를 정한 이유는 원고료가 비교적 나은 편이지만 작품의 정해진 범위가 있는 행복월보사에 투고하려 했기 때문이다. 자기 뜻대로 쓰고 싶어 쓰는 작품이 진정한 예술이라는 생각을 하다 말고 몇 푼 원고료로라도 생활을 유지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잡은 붓. 망설임 없이 ‘행복한 가정’이라고 제목을 쓰지만 곧바로 멈추고 만다. 그가 생각하는 행복은 그가 사는 세상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이질적이 것이었다. 정해야할 배경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이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는 가정이 있을 지역조차 고르지 못하고 결국 A지역이라고 해두기로 한다. 연애결혼, 서양 유학생, 깔끔한 옷차림과 독서 취향 모든 것을 그가 생각하는 고상하고 이상적인 것으로 설정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스물다섯 근” 장작 흥정하는 소리가 들리고, A자로 쌓이는 배추가 보이고,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한 가정은 집이 넓어야 해. 창고가 있어서 배추 같은 것은 거기에 넣어둔다. 남편의 서재는 따로 있고 벽에는 가득히 책장이 놓여 있다. 그 옆에는 배추더미 따위는 당연히 없다.”p254

그가 행복한 가정에 설정하는 것들은 그의 가정과는 상반되는 것들이다. 그 자신의 생활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심지어 점심으로 먹는 중국요리조차 그가 모르는 ‘용호투’라는 것이다. 그는 행복한 가정을 그가 모르는, 익숙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것들로 채워 넣는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가족에 대해 그리라고 하면 엄마와 아빠, 그리고 형이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렸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 당시 내 가족은 교회 어린이집의 여러 또래 아이들과 돌봐주시는 선생님이었고 엄마와 아빠는 주말에만 잠깐 볼 수 있는 집사님이셨다. 아마 그때는 가족이라 하면 엄마 아빠가 꼭 있어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이상하고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했었나 보다. 회사원이신 아빠와 집에 늘 계시는 엄마를 그리는 아이들을 따라 그리려고 한지도 모른다. 내가 다닌 대안학교 레드스쿨에서 고1 때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내 이야기로 써서 연설한 적이 있다. 그때 나의 꿈중 하나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쓰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가정이란 무엇일까. 넓은 집, 엄마가 해주신 맛있는 음식, 태권도도 다니고 그런. 함께 가족여행도 가고, 공원도 가고,... 나는 내가 겪었던 것 말고 겪지 못했던 것들을 거기에 채워 넣으려고 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정말로 내가 겪어서 아는 것들이야 말로 행복한 가정 안에 꼭 넣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겪었던 것들 중 행복한 가정에 넣을 만한 것들이 있었나.

그는 행복한 가정을 구상하면서 그의 삶을 잠시 떠나보려 한다. 하지만 그는 장작 가격을 그냥 원고지 위에 계산을 하고, 침대를 구상하면서도 자신의 침대 밑을 본다. 문을 닫으려다가도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 커튼만 치고 만다. 마지막에 우는 아이를 달래주며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속에 있으며 그 삶을 살아낼 것을 알게 된다.

“.....아마 앞으로도 오오 이십도, 구구 팔십일이겠지!.... 그리고 음침한 눈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바로 한 줄의 제목만을 썼을 뿐 온통 계산을 하느라 써 버린 원고지를 집어들어 구겼다가 다시 펴기를 몇 번 하더니 그것으로 아이의 눈물과 콧물을 닦아 주었다. “착한 아이지, 혼자서 놀아라.” 그는 아기를 밀어내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종이뭉치를 힘껏 휴지통에 던져 놓았다.

그러나 이내 아이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가 쓸쓸히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p256

어떻게 직접 경험한 것 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할까. 그에게는 행복한 가정보다 그의 집 장작 개수가 더 현실이고, 우아한 서재보다는 배추더미가, 아이가 오늘 저녁의 석유등을 깨는 것이 그의 진짜 삶이다. 그는 그의 삶을 썼어야 한다. 그 삶이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니까. 그는 행복한 가정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의 삶. 그는 ‘행복한 가정’으로 그의 삶을 쓰면 되겠다.

루쉰은 아마도 이런 의도로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또 루쉰 자신의 글이 대부분 그런 것 같다. 그의 삶에서 우러나온 글들. 완전히 새로운 것들로 꾸며낸 글은 결코 써지지 않는 것이다. 글만 그럴까. 그림도, 어떤 창작도 그렇지 않을까. 나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모두.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