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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나 사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원자력시대’에서 선사(先史)의 철학으로"[1]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2-20 12:08
조회
263

 


 


‘원자력시대’에서 선사(先史)의 철학으로*


*2012년 1월 10일 메이지 대학-야생의 과학연구소에서 이루어진 나카자와 신이치 · 고쿠분 고이치로(中沢新一 · 國分 功一郞)의 대담. 『철학의 자연(哲学の自然)』 수록. - 역자

그린 액티브와 또 하나의 인터내셔널리즘

나카자와 : 고쿠분 씨와 이런 시기에 ‘3·11 이후 철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지금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운동단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일본의 대전환(日本の大転換)』(集英社新書)에서 일본에는 ‘녹색당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썼습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GREEN ACTIVE/그린 액티브’* 설립을 준비중이죠. 이것은 ‘당(黨)’이라기보다는 연합 네트워크입니다. 현재 중심멤버는 저와 미야다이 신지(宮台眞司) 씨, 이토 세이코 씨, 마에키타 미야코 씨 네 사람이지만,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관련되어 습니다. 이 네트워크를 ‘녹색’ 의식으로 묶인 일본인 조직으로 만들고자 합니다만, 여기에는 저처럼 제1차 생산을 재생시켜서 새로운 경제와 지역사회 형태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 미야다이 씨처럼 ‘합의(consensus) 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가상적인(virtual) 여론을 현실적인 공간에 접속시키는 인터페이스를 마련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토 씨처럼 대중적인 의견을 신체운동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데모 형태를 만들려는 사람도 있고요. 또 직접적으로 활동을 함께하는 동료는 아니지만 새로운 환경정당을 실제로 설립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가지각색으로 운동 모듈이 조직되고 있는 네트워크이기에, 아무래도 ‘녹색당 같은 것’이 되어버린 것이죠(웃음). 그래도 이것은 조만간 일본의 ‘녹색당’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미야다이 신지, 이토 세이코, 마에키타 미야코가 발기인으로 설립한, ‘녹색 의식’을 공통으로 해 묶은 네트워크. 나카자와 신이치가 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이 대담 후 2012년 2월 13일 쇼부(正武)에 설립되었다.

고쿠분 : 과연. 그렇다면 ‘녹색당 같은 것’은 정확한 표현이네요(웃음). 나카자와 씨는 유럽의 ‘녹색당’ 역사를 연구하면서 다소 위화감을 느꼈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서였습니까?

나카자와 : 유럽의 ‘녹색당’은 1968년 좌익운동이 큰 분기점을 맞은 것에서부터 출발했기에, 이전에 있던 사회당에 환경의식을 더한 정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일 ‘녹색당’의 사상이나 강령을 보면, ‘이것은 일본에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관이 그렇습니다. 유럽의 에콜로지 운동은 인간과 자연을 일단 분리한 다음 재결합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일본인의 자연관에서는 애초에 인간과 자연을 나누지 않습니다. 나누지 않으면서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인터페이스를 형성해온 전통이 있지요. 저는 『일본의 대전환』에서 이 인터페이스를 ‘키아즘(chiasme, 교착)’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일본인의 자연관을 살려서 하는 활동은 아무래도 독일 ‘녹색당’의 좌파적 사고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할 수는 없겠죠.
‘녹색당’의 역사를 보면, 그 기원은 유럽이 아니라 타즈메이니아(Tasmania)*주 선거를 위해 결성된 ‘United Tasmania Group’입니다. 이것이 발전해 ‘녹색당’이 된 것이죠. 타즈메이니아와 뉴질랜드의 ‘녹색당’의 전제는 아무래도 ‘퍼머 컬쳐’**적 사고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의 ‘녹색당’은 마오리족의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운동 이념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만들고 있는 그린 액티브 운동은, 독일과 프랑스 같은 유럽의 ‘녹색당’과 타즈메이니아와 뉴질랜드의 ‘녹색당’ 중 후자에 가깝겠죠. 이렇듯 선주민적인 자연관과 세계관에 기반을 둔 환경정당이라는 의미에서 출발했기에, ‘녹색당’이라는 정당 명칭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국제운동의 의미도 변화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럽의 '녹색당'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유래된 프롤레티아리아 운동의 국제적 연대 사상을 배경으로 합니다. 시몬 베이유(Simone Adolphine Weil, 1909~1943)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지역사회와 자연환경에서 ‘뿌리뽑힘(deracinement)’ 당한 자들, 즉 노동력 이외 어떤 것도 갖지 못한 사람들을 재결합하는 운동입니다. ‘뿌리뽑힘’ 의식에서 출발한 인터내셔널 연대는 지구상의 어딘가에 ‘뿌리내림’을 한 인간들의 연대가 됩니다. 지역에서 출발해 글로벌로 확대되는 자본주의의 촉수를 여기저기에서 절단하는 모듈을 형성해가기. 이런 모듈을 통해 화폐경제적인 커넥셔니즘(connectionism)***을 전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워낙 전례가 없고, 가야 할 길은 멀기에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에 위치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작은 주. 태즈메이니아 섬·퍼노(Furneaux) 제도·킹(King) 섬으로 구성됨. -역자
**‘항구적인permanent’과 ‘농업agriculture’을 합친 조어로, 환경 순환형의 지속가능한 사회를 목적으로 하는 사상.
***뇌의 신경 회로망을 모델로 하여 패턴 인식·추론(推論)·기억 등의 인지(認知) 기능을 컴퓨터로 실현해 보고자 하는 사고방식. -역자

고쿠분 : 유럽이라. 현재 프랑스 '녹색당'은 일본의 옛 사회당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정당이 국정에 개입하는 것은 무척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나카자와 씨가 말씀하신대로 일본으로 그대로 가져오는 것은 어렵겠죠.

나카자와 : 그렇습니다. 하지만 펠릭스 가타리가 만년에 프랑스 ‘녹색당’에 가입한 것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펠릭스 가타리는 『세 가지 생태학』이라는 뛰어난 작품도 썼습니다. 죽기 전에 행한 그의 그러한 실천에 저는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유럽의 지식인 중에서도 펠릭스에게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펠릭스는 일본의 신도(神道)라든가 애니미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죠. 그런 그가 인생 최후의 단계에 여러 불이익을 무릅쓰고 그런 실천적 운동에 개입했다는 것이, 3·11 이후의 제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원전 신앙과 ‘증여성’의 말소

고쿠분 : 저는 3·11 이후 원전에 대해 생각하던 중, 나카자와 씨의 『일본의 대전환』에 무척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책에는 원전 문제에 대해 철학자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 훌륭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옛날부터 에콜로지에 무척 관심이 많았고 원전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서서히 관심을 잃어갔습니다. 지금은 그것을 무척 후회하고 있습니다. 저 나름대로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지금 원전 문제와 핵에너지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전을 생각하자면, 우선 경제적 합리성에 대한 논의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시마 켄이치(大島堅一) 씨가 2011년에 『원전 비용』이라고 하는 굉장한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것을 읽으면 원전이 얼마만큼 경제적 합리성에 반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원자력발전이 저렴하다고 하는 이유는 비현실적인 전제에서 모델 계산을 했기 때문이며, 기술개발과 입지대책 비용을 포함한 실제 비용을 따지면 원자력발전은 화력발전이나 수력발전보다 비쌉니다. 게다가 백엔드 비용*(방사능 폐기물 처리비용)과 사고로 인해 발생할 손해배상 비용까지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수지가 맞지 않습니다. 원전을 유치하는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손해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합리성의 관점만으로도 원전을 이용하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말해봤자, 경제적 합리성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원전에 들어가는 비용이 저렴해지면 이용해도 좋지 않을까?’ 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제적 합리성에 대한 논의가 지극히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핵에너지에 자체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핵에너지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명확히 질문하는 ‘핵에너지의 존재론’이라고 할까요? 그러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11 이후 저는 원전에 대해 몇 번인가 강연을 하고 글을 쓸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항상 두 가지를 참조했습니다. 첫 번째는 하이데거의 기술론, 두 번째는 나카자와 씨의 『일본의 대전환』이었습니다.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뒤에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나카자와 씨의 책이 왜 참고가 되었냐면, 이 책은 분명 ‘핵에너지의 존재론’에 대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나카자와 씨는, 핵에너지를 이용한다는 것은 인간이 사는 생태권(生態圈)에는 존재할 수 없는 태양권(太陽圈)의 에너지를 억지로 가지고 오는 것이라고 쓰셨습니다. 인간은 우주공간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생태권은 단지 지구. 거기서도 정말 작은 부분뿐입니다. 즉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생태권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핵에너지는 그 조건의 바깥에 있습니다. 때문에 핵에너지는 생태권의 내부에서는 결코 처리할 수 없는 리스크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핵에너지의 존재론’으로서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책에서 배운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저는 원전 사고 이후 원전 추진파 사람들이 핵에너지에 이끌리는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일본 원자력 정책은 벌써 파탄이 났고, 핵연료 사이클 사업 같은 것은 잘 될 리가 없습니다. 몇 만 년이나 관리해야 하는 핵폐기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까지 핵에너지에 얽매이는가. 저는 나름대로 죽을힘을 다해 그들의 기분을 이해하려 했습니다(웃음). 그래도 합리적 이유를 전혀 모르겠더군요. 요컨대 그것은 핵에너지 신앙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원자력 정책에는 핵병기 보유라는 숨겨진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가라타니 고진 씨 같은 사람도 그중 한 명입니다. 이것은 정부가 원전에 구애되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일본 정부가 핵병기 제조능력을 보유하고자 한다는 것은 최근 공개된 외무성 내부문서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확실히 예전에는 그러한 의식도 있었겠죠. 하지만 저는 지금 일본이 핵병기 보유의 의지를 가지고 원전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장 알기 쉬운 합리적 해석은 에너지의 안정적 보장입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자원이 없으니까 핵에너지로’라는 것이죠. 하지만 우라늄도 수입품입니다. 게다가 우라늄은 석유보다도 희소한 자원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을 수입해 ‘우리나라’의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보장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핵에너지를 이용한 발전에 반대하고 있지만, 반대한다든가 그런 말을 하기 이전에 어째서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핵에너지에 이끌리는가를 잘 몰랐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죠. 그 의문을 품고 『일본의 대전환』을 몇 번이나 읽자 수수께끼가 풀리더군요. 힌트가 된 것은 나카자와 씨가 논하신 ‘증여’라는 문제입니다.
나카자와 씨는 이 책에서 원자력 기술의 구조와 자본주의의 구조를 병렬적으로 논합니다. 원자력 기술과 자본주의는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의 내부에 ‘외부성’을 삽입해, 자기완결적 시스템을 만들어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이죠. 그러한 자기완결적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할 때, 고의적으로 무시되고 고찰의 대상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증여라는 차원입니다.
가령 에너지에 대해 말하자면, 우선 태양에서의 에너지 증여가 있고, 그것을 매개로 석유와 석탄이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그러한 매개된 에너지를 이용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자력 기술은 태양 에너지 자체를 인간의 생태권으로 가져와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양에서부터의 증여 없이 살아가는 것, ‘증여성’의 차원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핵에너지가 실현되면, 기대되는 것은 증여를 받지 않는 생명입니다. 증여 없이 자립하여 살고 싶다는 꿈, 인간이 완전히 스탠드 얼론(stand-alone)**으로 살아가겠다는 바람, 그것이야말로 핵에너지를 욕망하는 신앙의 근간입니다.
실제로 핵에너지가 주목받기 시작한 1950년대에는 ‘건물 지하마다 원자로’라든가, ‘각 가정에 원자로’라는 망상이 전개되었습니다. 작은 관(원자로)이 하나 있으면 그것만으로 모든 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다고요. 인간이 증여를 받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이죠. 이 꿈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재계가 지금까지 이렇게 원자력에 얽매이는 것은 그런 사고방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나카자와 씨가 핵에너지를 설명하는 것에서 ‘일신교’ 이야기를 끌어낸 것에 조금 위화감을 느꼈습니다만, 그 이유도 나름대로 알 것 같았습니다. 생각해보면 확실히 핵에너지 ‘신앙’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고, 그것은 ‘증여’의 수준을 말소하려는 욕망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구조를 나카자와 씨는 ‘일신교’라고 표현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back-end cost, 핵연료 사이클의 종말 과정을 포함한 비용 - 역자
**컴퓨터나 기계가 다른 네트워크에 접속하지 않고 단독으로 작동하는 환경-역자



나카자와 : 『일본의 대전환』에 무심코 ‘일신교’라고 써서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즉각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가톨릭 측이었는데, ‘그리스도교만큼 에콜로지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종교도 없는데, 일신교가 원전과 결부되어 있다고 말하면 곤란하다’라는 말을 들었죠. 그러나 제가 말하는 ‘일신교’는 그리스도교나 유대교, 이슬람 같은 구체적 종교를 지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마음 즉 뇌의 잠재구조 문제로, 마음의 구조로서의 ‘일신교’라는 것을 말합니다. 현실의 가톨릭교도가 얼마나 선하게 자연에 대해 느끼는지, 이슬람의 수피가 신을 감각하는 것이 얼마나 자연을 깊이 느끼는 것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경제 시스템이나 과학기술, 그리고 종교도 인간의 마음 즉 뇌의 보편적 구조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구조가 경제처럼 전개되면 이렇게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종교처럼 전개된다면 저렇게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죠. 따라서 ‘종교’, ‘예술’, ‘경제’가 각각 독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근저에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 즉 뇌의 보편구조뿐이며 그것은 몇 개의 매개변수(parameter)를 통해 현실화됩니다. 이 변수를 바꾸면 개별종교의 형태는 계속 변합니다. 다만 그 패턴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고는데, 그것이 ‘일신교’와 ‘다신교’입니다. 그러나 근저에 있는 마음 즉 뇌의 보편구조는 같다는 것이 이 책의 전제 중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책 안에서는 여러 장르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시장’의 교환형태는 ‘증여’ 부분을 잘라버리면서 성립되었다고 했습니다. 가령 근대 산업자본주의는 석탄을 에너지로 이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석탄은 수억 년 전에 지상으로 쏟아진 태양 에너지가 화석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 안의 사람들은 이것을 태양의 ‘증여’의 응고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개발해야 하는 자원이고 상품이며 생산에 소비되어야 하는 자본의 일부로 취급합니다.
원전은 화석이라는 ‘매개’를 생략하고 직접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 내부에서 태양에너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증여’의 차원을 완전히 절단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을 사용하면서부터 백몇십만 년에 걸쳐 인간의 활동을 보조하는 에너지 형태를 단계적으로 변형시켜 왔습니다. 문명학자 앙드레 바라냑(André Varagnac, 1894~1983)의 분류에 따르면 ‘제7차 에너지혁명’(원자력과 컴퓨터 개발)은 ‘증여성’을 완전히 소멸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에너지 혁명과는 그야말로 다른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일본의 대전환』에는 자세히 쓰지 않았습니다만, 원자력 기술이 개발된 1920~30년대의 예술을 보면 추상예술이 유별나게 발달되어 있습니다. 동시기에 고안된 추상예술과 핵에너지 기술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변수가 다를 뿐 잠재된 구조는 같죠. 모더니즘 추상예술 또한 예술에서 ‘증여’의 차원을 말소하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추동된 것 같으니까요.
아마도 인간의 마음 즉 뇌의 구성 중에는 어떤 단층선이 있어서, 그것을 넘어서면 ‘증여’의 차원은 잘려버리는 것이겠죠. 이 절단은 자본주의 전개 이래로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에너지 차원에서는 외부의 태양 에너지를 내부로 직접 가져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술도 외부에서의 ‘증여’성을 절단하고 자율에 대한 욕망으로 추동되는 것이 되었습니다. 예술만으로 전세계를 표현하고, 예술만으로 자율적이고자 하는 욕망으로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이런 흐름이 근대로 접어들면 급속도로 진행됩니다.
3·11 이후, 우리는 ‘증여’의 분리가 인류를 위험한 길로 접어들게 할 것임을 분명히 감지했습니다. 이미 세계는 전체적으로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만, 사고 이후 많은 일본인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 ‘다른 길’에 대한 근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는 그러한 직관에 의거해 『일본의 대전환』을 썼고, 이를 통해 경제·사회 시스템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필연성과 그 대략적인 조감도 같은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시장’에서 ‘마켓’으로

고쿠분 : 나카자와 씨는 『일본의 대전환』이전부터 계속 ‘증여’ 문제를 생각해 오셨습니다. 저는 이번 대담을 위해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를 읽었는데, 이 책에서 나카자와 씨는 시가 나오야(志賀直哉)의 『작은 사환과 신』에 대해 다루셨죠.
시가 나오야의 『작은 사환과 신』은 ‘언젠가는 초밥을 먹고싶다’고 간절히 기도하는 고용살이 도제를 귀엽게 여긴 귀족원 의원이 우연을 가장해 그 작은 사환에게 초밥을 한턱 낸 이야기입니다. 결국 작은 사환은 이 우연을 신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귀족원 의원은 무엇도 말하지 않은 채 사환에게 채무를 지웠기에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죠. 이것은 순수 ‘증여’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훌륭하게 그려낸 이야기입니다. 증여는 반드시 채권감이나 채무감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증여’을 잘라내려는 이유도 그 때문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 인간은 ‘증여’로 인해 짊어지는 부채감에서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합니다.

나카자와 : 인간이 ‘증여’를 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시가 나오야는 인간을 지탱하는 감정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는, 단점에 가까운 고집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만(웃음), 『작은 사환과 신』은 그 심리를 무척 정확하게 그려냅니다. ‘증여’는 인간과 인간을 무척 깊은 차원에서 연결시키는 것이기에, 인간으로서는 어떻게든 잘라내고 싶다고 바라게 됩니다.
인간은 ‘증여’의 차원과 그 단절의 차원을 씨실과 날실처럼 조합해가며 살아가는 생물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증여’라는 날실을 잘라내 버리고 교환이라는 씨실만으로 세계를 구성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래서는 직물이 되지 않습니다. 경제와 정치 차원에서는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인터넷을 통해 날실을 만들어 보완하려 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차원은 인간 안에 언제나 포함되어 있기에 상호간의 투쟁이 끊임없이 일어나죠. 자본주의 시스템은 ‘증여성’을 도려낸 ‘교환인간’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의 증여적 부분을 모두 도려내면 확실히 합리적 개인이 되겠지만, 인간이라는 생물은 그런 식으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고쿠분 : 자본주의에서의 증여에 대해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를 생각할 때, 사람에게서 사람으로의 ‘증여’는 물론 ‘국가’에서 ‘시장’으로의 ‘증여’라는 차원도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2008년 금융위기 때도 국가가 시장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했습니다. 국가에게 규제받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던 금융기관이 실질적으로 국유화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이란 나카자와 씨가 말씀하신 ‘교환(katallattein)’ 중 ‘제1종의 교환’(상품교환)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며, 근대경제학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항상 ‘제2종의 교환’(증여적 교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경제를 표현하는 ‘이코노미’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집’을 나타내는 ‘오이코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가정학’적 뉘앙스가 있다. 이에 비해 미세즈(Ludwig von Mises)나 하이에크(Friedrich Hayek)같은 경제학자는 그리스어로 ‘교환하는 것’, ‘커뮤니티에 들어가는 것’, ‘적에서 우군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하는 ‘katallattein’라는 말에 주목했다.

나카자와 :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코노미’와 ‘카탈락시(Catalaxie)’*를 대립시켜 생각합니다. ‘국민경제’는 이코노미라는 말로 표현합니다만 이것은 국가가 ‘오이코스 즉 가정’의 확장이며, 거기서의 ‘노모스’가 ‘국민경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시장 쪽에서는 ‘카탈락시’라는 언어가 결부됩니다. 순수하게 게임적인 교환을 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현실세계에서는 ‘사회’이기도 한 ‘오이코스’ 운영이 문제가 됩니다만, 여기서는 순수한 경쟁원리나 게임성만으로는 기능이 불완전하며, 탈교환적인 ‘증여’가 사회에 의한 보상과 같은 형태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시장 메커니즘은 그것을 부정하고, 순수한 경쟁원리에 따른 게임 세계를 ‘세계 그 자체’로 봅니다. 그러므로 ‘이코노미’의 세계에서는 실제로 증여의 차원이 작동하지만 ‘카탈락시’는 그것을 부정한다는 모순이 현실 세계를 이루고 있죠.
예전에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 씨가 ‘무연(無縁)’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는데, ‘시장’은 ‘무연’의 공간입니다. 그러나 ‘무연’의 원리란 항상 ‘유연(有縁)’의 원리와 길항관계를 이룹니다. ‘유연’이 있어 ‘무연’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가령 ‘시장’에서는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사물을 잠깐 절단해 그것을 자유로운 공간에서 교환하는데, 거기서 작동하는 ‘무연’의 원리는 항상 ‘유연’의 원리가 자기변형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유연’의 세계에서 완전히 잘라내면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자기증식형 ‘무연공간’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유연’과 ‘무연’의 긴장관계에 있는 ‘시장’이 아니라 ‘마켓’입니다. 맑스식으로 말하자면 ‘W-G-W(상품-화폐-상품)’ 교환이 일어나던 ‘시장’이 어느새 ‘G-W-G(화폐-상품-화폐)’ 관계로 바뀝니다. 그리고 ‘화폐’와 ‘화폐’ 사이에 있는 ‘상품’마저 없어져 ‘G-G(화폐-화폐)’라는 금융자본적 관계로 대체됩니다. 맑스는 『경제학 비판』이나 『자본론』에서 이것을 상세하게 분석했습니다.
이것이 아담 스미스가 말한 ‘프리마켓’과 현대의 글로벌 자본주의적 ‘마켓’의 큰 차이입니다. 고전적 ‘시장’과 ‘프리마켓’에서는 상인과 상인이 상호 대면하여 상품을 주고받습니다. 여기서는 ‘유연’과 ‘무연’이라는 이질적 원리가 작동하고 이 원리에 따라 관계가 순환합니다. 그러나 ‘G-W-G(화폐-상품-화폐)’라는 금융자본적 관계로 대체된 ‘시장(market)’에서는 이 ‘프리마켓’의 구조가 무너지고 맙니다.
이렇게 국가와 시장경제의 관계가 부상합니다. 신자유주의에서 일어나는 것은, ‘G-G(화폐-화폐)’로 움직이는 의제적(擬制的) ‘마켓’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실체적인 ‘프리마켓’의 원리를 대체하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원리라고 말합니다만 그것은 본래 의미에서의 ‘시장’(시장/프리마켓)이 아닙니다. 이것은 논리를 바꿔치기하는 지적 사기(詐欺)와 같습니다. 자유주의 경제는 그런 식으로 전개되며, 이로써 사회와의 모순적인 연결을 끊어낸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이 사태에 대해 케인즈는 시장에 국가라는 사회체가 개입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 국가가 일종의 ‘증여’를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소생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케인즈적 ‘증여’의 형태는 전후 미국의 마셜 플랜과도 연관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20세기 경제는 국가의 ‘증여’가 시장에 개입함으로써 ‘마켓’을 건재한 형태의 ‘시장’(고전적 시장/프리마켓)으로 되돌리는 방식으로 작동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0세기 말 신자유주의가 대두되면서 다시금 시장의 자기조직화 메커니즘에 모든 것을 맡기는 구조개혁이 이루어져, 케인즈적인 것을 밀어버리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교환(katallattein)’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역자



고쿠분 : 미셸 푸코는 신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질서(Ordo) 자유주의’*라는 전후 서독일에 나타난 사상을 언급하면서, 그 특징은 국가에 대한 혐오라고 말합니다. 질서 자유주의는 국가에 대한 혐오가 강하고(거기에는 나치 경험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이 신자유주의로 이어졌다고요.
지금 나카자와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20세기 초엽 사람들 사이에 싹튼 ‘증여의 차원을 잘라내고 싶다’ 운동은 다양한 분야에서 발견되었다는 게 생각납니다. 그중 하나는 틀림없이 신자유주의입니다만, 근대경제학도 이제까지 증여의 차원을 완벽하게 가리는 장치로서 기능해 왔습니다.
여기서 좀 주의하고 싶은 것은, 증여는 단지 분석 도구라는 것입니다. 이 대화를 듣다 보면 ‘증여’는 좋은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을 분절하면서도 ’증여‘의 차원은 배제할 수는 없고, 또 그 차원을 배제하는 인간의 활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말하기 위한 분석도구가 바로 나카자와 씨가 말씀하신 ’증여‘라고 생각합니다.

*‘질서 자유주의’란 1948년 서독에서 창간된 잡지 『오르도(질서)』를 중심으로 형성된 경제학파의 사상으로, 케인즈주의, 나치즘, 사회주의 세 가지를 주요 표적으로 했다. 주가 되는 멤버는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 프란츠 뵘Franz Bohm, 알프레드 뮐러 아르마크Alfred Müller-Armack, 빌헬름 뢰프케Wilhelm Ropke, 그리고 그 유명한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가 있다.(고쿠분)

나카자와 : 말씀하신 대로 ‘증여’는 실체라기보다는 개념입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의 국가에 대한 증오는 사회에 대한 증오로도 이어집니다. ‘시장’과 ‘마켓’이 긴장관계를 가지면서 또 하나의 인터페이스로 이어지는 한, 미래에 증오가 발생할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분리되었을 때 시장은 사회체의 구성원리에 증오를 품게 됩니다.
애초에 사회체와 시장은 상이한 제어원리로 작동합니다. 가령 섹슈얼리티 단속을 생각해보면, 사회체에서는 ‘결혼제도’를 통해서 단속이 이루어집니다만 ‘시장’에서 예로부터 시행되던 것은 ‘자유연애’였습니다. 둘 사이에는 밀접한 긴장관계가 있었습니다. 가령 데모를 하면 출생률이 올라간다든가(웃음). 데모는 사회에 대한 항의이며 축제와도 같죠. ‘정전(停電)’, ‘축제’, ‘데모’가 일어나면 출생률은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장소에서는 사회체와 다른 원리가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서로 분리되면 사회체의 제도성에 대한 시장의 증오가 발생합니다. 국가에 대한 증오도 거기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전체 3

  • 2021-02-22 00:09
    원자력 기술 구조와 자본주의 시장의 구조가 '증여의 제거'를 공통으로 한다는 저자의 통찰이 정말 놀랍습니다. 시장의 교환형태는 ‘증여’ 부분을 잘라버리면서 성립되었고 핵에너지가 실현되면 증여의 사이클에서 벗어난 생명 존재가 실현된다는 거군요...! 아, 경제적으로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원자력에 인간이 매달리는 이유를 이런 근원적인 지점에 찾아 볼 수 있는 거네요. 그런데 대체 인간이란 증여 없이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증여 없이 자립하여 살고 싶다는 이런 망상과도 같은 꿈을 가지는 걸까요? @.@

    흥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술술 읽히는 번역 감사합니다~~ ^^

  • 2021-02-24 11:27
    "경제 시스템이나 과학기술, 그리고 종교도 인간의 마음 즉 뇌의 보편적 구조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이 제게는 킬링포인트네요

  • 2021-02-24 19:48
    원자력으로 인간의 마음을 꿰뚫는 이런 사유를 할 수 있군요. 인간이 증여를 끊어버림으로써 채무감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 하는 것이, 역으로 관계망 안에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 같이네요. 어떤 인연도 거부하고 독립적으로 살 수 있다는 뇌의 보편적 구조가 만든 결과물들. 그래도 난 가끔 혼자이고 싶다요..... 이 원자력 같은 인간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