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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나 사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원자력시대’에서 선사(先史)의 철학으로" [2]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2-28 22:06
조회
160


"‘원자력시대’에서 선사(先史)의 철학으로" [2]


하이데거의 기술론과 양자역학 


고쿠분 : 앞에서 저는 원전을 생각할 때마다 『일본의 대전환』과 하이데거의 기술론을 참조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핵에너지를 기술의 본질적 문제로 생각한 철학자는 하이데거뿐입니다. 일단 한나 아렌트도 원자력 발전에 대해 『인간의 조건』에 조금이나마 썼고, 나카자와 씨와 유사하게 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만, 대략적인 데 그친 느낌이 있습니다. 아렌트는 원자력 발전에 대해 ‘세계소외’라는 큰 틀을 적용해 말했을 뿐 기술의 본질적 문제로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 아렌트의 최초의 파트너였던 귄터 안더스(Günther Anders)같은 사람도 원전을 어느 정도 다루었지요. 이들은 모두 하이데거와 친분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조금 보조선을 그리자면, 저는 원자력에 대한 역사를 생각하는 이상 ‘1950년대의 사상’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50년대 철학자가 무엇을 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8년 후인 1953년에 아이젠하워가 국제연합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아이젠하워는 ‘핵전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이 기술을 군사적으로 사용하지 말고 평화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말뿐이긴 하지만, 이것은 핵 군비경쟁만으로는 소련의 우위를 점할 수 없다는 정책적 판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배경에는 핵기술을 제공하면서 서구의 결속을 견고히 하고 또 제3세계를 서구의 편으로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핵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대신 ‘평화이용’으로 방향을 바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고, 수소폭탄 실험은 계속되었으며, 제5후쿠류마루(第五福竜丸) 사건이 일어난 것은 1954년 3월입니다.*

하지만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슬로건은 나름대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국은 이런 것을 정말 잘합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유일한 피폭국인 일본이야말로 선두에 서서 핵의 평화이용을 실현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평화이용’이라는 말로 인해 핵에너지 기술 자체의 문제는 묻힌 것입니다.

군사적 이용이든 ‘평화적 이용’이든 애초에 원자력 기술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철학자의 역할이겠죠. 그런데 핵에너지의 ‘평화이용’이 확실히 실용화된 1950년대에 철학자들은 그에 대해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보다 자세한 검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역사에 ‘혹시’는 있을 수 없습니다만, 그 시기 그러한 논의가 철저히 이루어졌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1960년대의 사상’은 마구잡이로 논해지는 반면 ‘1950년대의 사상’에 대한 논의는 들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이 사실 자체가 뭔가를 의미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핵병기의 충격이 꽤 강했기에 원자력 발전의 문제까지 눈길을 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무기로서의 핵을 반대하는 운동은 계속 있어왔으니까요. 앞에서 말한 안더스나 버트런트 러셀(Bertrand Russell)을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도 핵병기에 대해 활발하게 발언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평화이용’이든 무엇이든 핵에너지를 사용하는 자체가 문제라고 확언한 하이데거의 통찰은 눈에 띕니다. 하이데거는 전후에 여러 차례 핵에너지를 논했습니다. 애초에 그는 현대를 ‘원자력시대’라고 불렀습니다.

1963년 9월 22일 『요미우리신문』에 게재된, 하이데거의 ‘원자력 시대와 ‘인간성 상실’’이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원자력 에너지 관리에 성공한다면 인간은 즉각 기술의 주인이 될까요?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관리의 불가결성은 곧 ‘내세우는 힘(Macht des Stellens, 세계를 기술화하여 자연을 계량 가능한 것으로 ‘내세우는’ 힘)’을 증명하는 것이자 이 힘의 승인을 표명하는 것인 동시에, 이 힘을 제어할 수 없는 인간 행위의 무능을 슬쩍 폭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태, 그리고 원자력 발전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핵연료는 계속 식혀야만 합니다. 계속 ‘관리’해야만 합니다. 이 사실 자체가 “이 힘을 제어할 수 없는 인간 행위의 무능을 슬쩍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마치 원자력을 길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번 후쿠시마 제1 원전 사고도 물로 핵연료를 식히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 또 같은 사태가 일어날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멜트다운된 연료가 어떤 상태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데다, 그런 연료를 추려내는 기술도 없습니다. 기술발전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도대체 뭐가 ‘기술의 주인’인가요? 하이데거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어쨌든 다른 철학자들은 정말이지 그 무엇도 말하지 않았던 시기에 하이데거만이 핵에너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5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 다이고 후쿠류마루)는 일본의 참치잡이 어선으로, 1954년 3월 1일 비키니 환초에서 행해진 미국의 수소 폭탄 실험으로 방사능에 노출되었다. 이 사건으로 선원 23명 중 1명이 사망했다. -역자
**마르틴 하이데거 「원자력 시대와 ‘인간성 상실’」, 『KAWAD道の手帖ハイデッガー』 河出書房新社, 2009, 165p. (방점은 인용자). (고쿠분)

나카자와 : 하이데거가 원자력을 비판한 역점은 현대 과학을 움직이는 ‘계산성(計算性)’입니다. 『기술에 대한 물음』이나 『들길』에서 하이데거는 현대의 과학기술이 ‘존재’를 마치 에너지처럼 ‘계산성’ 안에서 추려낸다는 점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존재’가 과학기술로 인해 ‘계산성’안에서 조합되는 것은 마치 앞에서 말했던, 시장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사물의 교환 가치라는 척도로 인해 수치화되는 것―과 같은 방식의 효과를 갖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자연과학이 에너지 개념을 형성하면서 시장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의 모든 사상은 존재의 ‘증여성’을 내버리는 인간 사회의 부정적인 효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는 독일어 ‘~가 있다(Es gibt)’라는 말에서 존재의 ‘증여(gift)’성을 도출해 냈는데, 그에게 있어서 ‘존재’란 곧 ‘증여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과학기술로 인해 ‘존재’가 ‘계산성’으로 깎아내려진다고 한 것은 ‘존재’에서 그 ‘증여성’이 은폐되었다고 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크로이처 기념강연 중 하이데거는 ‘자연과학적 방법이라는 이 문제는 넘어설 수 없다’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만, 그에게서 ‘계산성’이 큰 문제가 된 것은 사실 핵에너지의 발견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양자역학과 관계가 있습니다. 원자핵 에너지를 개발하려면 양자역학이 아니더라도 유체역학, 열역학, 아인슈타인의 E=mc² 문제로 충분하다고 합니다만, 확실히 그 개발은 양자역학의 영역에서 준비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거의 강조되고 있지 않습니다만, 양자역학이 물의를 빚었던 것은 애초에 ‘비계산성’이 이론 안에 들어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불확정성원리’나 ‘비가환성(非可換性)’ 같은 개념이 그것입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양자역학을 만들었을 때 결정적인 아이디어는 교환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비가환성’의 발견이었습니다.

양자역학은 물질세계 안에 근원적으로 ‘비계산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과정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무척 짧습니다만, 양자역학은 그 짧은 순간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으로서의 물질세계를 그려내려고 했습니다. 하이데거는 하이젠베르크의 책을 독파했지요. 불확정성 원리와 파동역학의 원론이 그의 존재론 이미지에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과 양자역학 사이의 관계성, 양자역학에 있는 ‘비계산성’을 편입시키는 문제를 클로즈업하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하이데거가 이 문제를 골라내서 ‘이제부터 자연과학은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면, 에네르고로지(에너지 존재론)를 한 걸음 더 크게 이끌고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지 않았죠. 이것은 하이데거의 한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고쿠분 : 저도 하이데거의 기술론을 읽고 무척 감탄했습니다만 동시에 걸리는 지점이 많이 있습니다. 새로운 방향성이 보이는 듯 보이지 않고, 결국 마지막에는 ‘농부의 사고’라고 말하는 것인가, 이런 기분이 들더군요. 하이데거는 ‘기술’과 ‘현대기술’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현대기술’은 자연을 ‘도발’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비판합니다. 그러나 직후에 그는 “농부는 자연을 도발하는가? 풍차는 자연을 도발하는가? 아니, 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풍차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인가요(웃음). 실제 그의 기술론에는 석탄과 우라늄이 나란히 나와 있습니다.

나카자와 : 저는 그것을 어떻게든 해부하고 싶습니다. 저도 고쿠분 씨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의 기술론을 무척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여기서 그쪽으로 꺾는 거야?’라고 말하게 되는 한계성도 느낍니다. 그의 한계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미 20년 정도 계속 생각해왔습니다. 그리고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 길이 보인 것 같았습니다. 하이데거의 기술론, 원자력 에너지론에는 어떤 전제가 있다는 확신이 샘솟았거든요. 다시 한 번 하이젠베르크 시대 초기의 양자역학을 공부해 나가다 보면 하이데거가 목표로 삼고 있던 ‘비계산성’을 편입하는 사고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전제에서 출발해야 ‘농부성’으로 U턴하지 않고 오히려 I턴하는 새로운 사고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철학과 고고학의 만남


고쿠분 : 하이데거의 ‘기술(Techne)’에 대한 평가 그 자체에는 약간 알 수 없는 면도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소위 ‘휴머니즘’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휴머니즘을 반대합니다. 그렇다고 소위 ‘자연회귀’라 할 만한 느낌도 없습니다. 그를 테크노포비아(technophobia, 기술혐오)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테크노포비아 같은 면도 있지만, 일단 ‘기술’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이데거는 ‘기술’과 ‘자연(physis)’에 대해 상반되는 태도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카자와 : 고대 그리스는 그러한 상반성을 견지하고 살았습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의 경우 나무를 거의 벌채해버렸고, 그 결과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장소에서 고대인은 ‘자연’의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사실 플라톤 이전의 철학은 녹색이 풍요로운 크레타 섬과 마르타 섬에서 나왔습니다. 플라톤보다 수백 년도 전의 이야기이므로, 폴리스가 아직 발달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하이데거에게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형성 이전, 그리스 철학 이전의 것에 대한 예감이 있었습니다.

하이데거가 예감하던 것을 최근 고고학이 밝혀내고 있습니다. 고전 그리스 이전의 그리스는 크레타 섬 등지를 중심으로 미노아 문명을 전개하던 풍요로운 녹색의 세계였습니다. 그 문명은 재밌게도 인도 문명과 순다 지방(Sundaland) 같은 아시아 문명의 뿌리였던 여러 문명과 하나로 연결된 것 같습니다. 플라톤의 저작 중 『티마이오스』라는, 이집트의 신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책이 있습니다. 이집트 신관이 알던 지식은 그리스 문명 이전의 인류 세계―원(原)유럽, 원(原)그리스, 원(原)아시아가 하나의 시대였던 때―에서 축적된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티마이오스』에 ‘코라(chora)’* 같은 이상한 개념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죠. 플라톤은 그때 선사시대에 가닿은 것입니다.

최근 고고학의 세계에 그러한 연구서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무척 재밌습니다. 가령 메리 세트가스트(Mary Settegast)의 『선사학자 플라톤』(Plato Prehistoriah)**과 같은 책이 있습니다. 저는 고고학의 이러한 발견이 철학사를 새로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의 시대는 그러한 고고학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기에, 유감스럽지만 그리스 이전의 선사시대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그가 보지 못하던 것이 지금은 차차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좀 더 진전시켜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신비로운 게 있는데요,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인도 아닌 근대인인 휠덜린 시의 독일어에 터무니없이 먼 옛날의 의식층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하이데거는 정말 천재적인 ‘의식의 지질학자’라고 생각합니다. 근대 유럽이라는 표층에 드러난 부분을 실마리 삼아 고대 그리스와 이어져 있는 지층을 발견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어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 정도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씨나 타나베 하지메(田邊元) 씨와 같이 ‘일본철학’을 한 사람들은 그러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말해지는 개념으로, 「장場」을 표현함.
**Mary Settegast, Plato Prehistorian: 10,000 To 5,000 B.C. Mythm Religion, Archaeology, Lindisfarne Pr, 2000


고쿠분 : 저는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暇と退屈の倫理學)』*에서 ‘정주 혁명’에 대해 말했습니다. 옛날에는 고고학이 전혀 관심 밖이었습니다만, 생각해보면 철학과 고고학은 무척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이 ‘정주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이데거의 한 가지 한계가 보입니다. ‘머무르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라고 단언하는 하이데거는 결국 일만 년 전에 시작되었던 ‘신석기 시대’ 이후의 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고쿠분 고이치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暇と退屈の倫理學)』, 아사히朝日출판사, 2011년 (국내에는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한권의책)로 번역됨 - 역자)

나카자와 : 그렇다면 새로 만들어야 하는 이미지는 ‘신석기 시대’와 ‘농부’가 되겠군요. 하이데거의 이상은 유럽 중세의 지방 소도시였죠. 그 소도시는 신석기 문화가 반영된, 말하자면 가장 오래된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신석기 시대의 원점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신석기시대 이전에 무척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과 『아낙시만드로스의 금언』 같은 저작을 거듭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와 원자력 에너지 문제는 깊은 차원에서 하나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향으로 더 멀리 가보면 하이데거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예감이 듭니다.

고쿠분 : 저는 ‘정주혁명’에 대해 쓰면서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이전에 나카자와 씨가 예술인류학 연구소를 세웠을 때 말씀하셨던 ‘예술에 대해서는 10만 년 단위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당시에는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만 어째선지 그 말에 계속 끌렸습니다.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쓰면서 ‘10만 년까지는 무리였지만 1만 년까지는 어떻게든 소급해 봤습니다’라고 말할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카자와 : 그 책을 읽고 고쿠분 씨도 선사시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감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 고쿠분 씨가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서 주제로 삼으신 ‘한가함’과 ‘지루함’ 문제는 이미 터키에 있는 인류 최고(最古)의 도시 중 하나인 차탈휘위크(Catalhuyuk)에서도 발생했습니다. 차탈휘위크의 최하층은 기원전 7500년까지 측정할 수 있다 하는데, 거기 남겨진 유물과 신상을 보면 확실히 고쿠분 씨가 문제시한 ‘공소화(空疎化)’가 이미 그 시대에 생겨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차탈휘위크는 도시의 가장 오래된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가함’과 ‘지루함’ 문제는 결코 19세기의 근대도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쿠분 : 제 책에는 다시 한번 최초에서부터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예술의 기원입니다. 저는 예술의 기원을 ‘정주혁명’에서 찾으며, ‘‘정주혁명’이 있었기에 인간은 한가하게 되어 예술을 시작했다‘는 조잡한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물론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야말로 신석기 시대 예술의 기원은 거기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렇다고 한다면 구석기 시대의 예술은 논해지지 않게 됩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라스코 동굴벽화입니다. 그것은 후기 구석기 시대 말기, 약 1만 7000년 전에 그려진 것입니다. 제 책에서는 이 이야기를 버젓이 논할 수 없었습니다.

나카자와 : 정말 그 지점이 문제입니다. 한가하게 되어 지루해진 인간이 시작한 예술, 그 이전으로 가야 합니다. 농경혁명 이전의 라스코 동굴벽화는 이미 완성된 예술입니다. 그리고 농경혁명 이후에 도시생활의 원형이 나오자 예술은 분명 변질되었습니다. 거기서는 계속 우리가 품고 있는 예술의 문제가 무척 잘 보입니다. 아마도 피카소 같은 사람이 미노타우르스를 열심히 그린 것은 농경혁명 이전의 문명에 대한 직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노아 문명이라는 유럽의 최고층(最古層) 문명은 소(牛)의 문명입니다. 인도의 고대문명도 소였고 일본에서도 스사노오* 본존의 혼지(本地)**는 고즈텐노우(牛頭天王)***입니다. 피카소가 태어난 스페인에서 성행했던 투우는 이 소 문화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본다면 피카소가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과 하이데거가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 실태가 좀 보이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일본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 바다와 폭풍을 관장한다고 한다. - 역자
**불교가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신의 모습을 취해 나타난 수척신垂迹身에 대해, 그 신의 바탕이 되는 부처를 혼지本地라고 한다.
***우두 천왕(기원 정사(祇園精舍)의 수호신으로 京都祇園社의 제신(祭神)). - 역자

고쿠분 : 하이데거도 ‘예술’을 강조했습니다만 그것은 말하자면 ‘신석기시대 예술의 원점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또 하나의 다른 ‘예술작품의 기원’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카자와 : 그것을 하이데거가 문제시했죠. 구석기 시대만 해도 이미 라스코 동굴벽화 같은 완성된 예술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대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보면 지금 말해지는 ‘예술’이 상대화되는 과정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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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3-03 14:25
    철학과 고고학의 만남이라니요.. 저에겐 매우 어려운 문장들이었지만 신선했습니다. 원자력 기술에 주인이 될 수없는, 인간의 무능에 대한 하이데거의 통찰도 대단했군요. 앎이 부족해 이해를 많이 못해서 아쉽지만 새로운 관점을 접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