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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나 사이] 나카자와 신이치의 "‘원자력시대’에서 선사(先史)의 철학으로" [3] (完)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3-08 20:17
조회
278

"‘원자력시대’에서 선사(先史)의 철학으로" [3]


인간과 자연의 최적해(最適解)*

*제약 조건을 충족시키는 가능한 해(解) 중 목적 함숫값을 최대 또는 최소로 만드는 값. - 역자


고쿠분 : 지금 이야기를 ‘증여’ 문제와 관련해서 말해보죠. 바타유는 뉴딜 정책을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뉴딜 정책은 케인즈적 의미에서 보면 ‘국가’에서 ‘시장’으로의 증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만, 바타유가 문제시했던 선사시대의 예술과 이 ‘증여’ 문제 사이에는 역시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나카자와 : 인류가 가장 곤란하게 여긴 것은, 바타유 표현을 따르면 ‘최대 증여자’라고 할 수 있는 태양의 존재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종교가 만들어졌고 예술의 기원도 그것입니다. 인간이 ‘증여’ 차원을 잘라내고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할 때, ‘태양의 은폐’는 세계를 둘러싼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고쿠분 : 그러고보니 1950년대, 쇼리키 마쓰타로(正力松太郞)가 『요미우리신문』에 원자력 발전을 추진하는 캠페인을 벌였을 때의 연재기사 타이틀은 ‘드디어 태양을 손에 넣다’*였습니다. 추진파에게 원전은 이런 이미지였겠죠. 우리는 가까스로 태양을 손에 넣었다! 어떤 의미로는 수만 년의 번뇌를 간신히 해결했다는 느낌도 듭니다.

‘증여’에 대해 조금 색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앞에서 ‘증여’는 반드시 부채감을 안겨준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증여’에 ‘감사’하는 것은 가능할까요? 뭐랄까, 태양의 ‘증여’에 대해 어떤 부채감도 없이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감사하는 사상은 없는 걸까요?(웃음).

하이데거는 ‘증여’라고 말했지만, ‘감사’에 대해서도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생각하다(denken)’란 ‘감사하다(danken)’와 관련이 있기에, ‘사유’에는 ‘감사’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존재’란 ‘그것이 주다=증여하다(Es gibt)’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감사’라는 주제를 도출합니다. 이 관계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편으로 그에 대한 들뢰즈의 강한 비판 역시 신경 쓰입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사고와 사고될 수밖에 없는 것 사이의 일치 다시 말해 상동성(相同性)을 전제하는데, 사실 사고의 시작에는 불일치가 있다는 겁니다.*** 간단히 말해 인간이 사물을 사유한다는 것은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 ‘적(敵)’이 ‘불법침입’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게 들뢰즈는 ‘감사’라는 문제계(問題系)를 논파합니다.

제 철학적 입장은 들뢰즈에 가깝습니다만, 한편으로 ‘감사’ 문제를 그렇게 간단하게 물리칠 수 없다는 느낌도 듭니다.

*1954년에 시작했던 요미우리 신문의 연재기사로, 해외 최신 원자력발전 사정이나 원자력 연구 상황, 원자력 평화이용의 전망 등을 말했다.
**마르틴 하이데거, 『사고란 무엇인가?』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나카자와 : 지금 고쿠분 씨가 말씀하신 사고에서의 일치와 불일치 문제는 무척 중요합니다. 저는 『눈송이 곡선론(雪片曲線論)』을 썼을 때, 두 가지가 완전히 일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동물의 형태는 긴 진화과정을 경유해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다아시 톰슨(D'Arcy Thompson)*과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도 생명의 형태는 ‘최적화’를 향해 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촘스키도 지금 인류가 이야기하는 언어의 문법구조는 ‘최적화’의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말하는데, 저도 이에 동의합니다.

인간의 번뇌 구조를 통해 만들어진 마음의 형태와 자연계의 형태는 ‘최적화’ 과정을 통해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사고나 다름없습니다.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optimism)란 사실 이 ‘최적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들뢰즈는 계속 거부했습니다만, 이 ‘최적화’에 대한 긍정과 거부의 대립은 유럽 철학사의 근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스토아학파는 사고와 사고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일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이데거 또한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과 자연이 만들어낸 것 사이에는 최적해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 ‘최적’을 만들어낼 방법을 고민했는데, 저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공지능은 최적의 형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있는 노이만형 컴퓨터는 ‘이산무한(離散無限)’**을 기초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산무한’이란 ‘n’이 있다면 반드시 ‘n+1’이 있고, 그것이 무한히 펼쳐진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촘스키는 인간의 언어도 마찬가지로 ‘이산무한’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말했는데, ‘이산무한’을 따르면 지금 자본주의와 같은 세계는 계속해서 팽창합니다. 그런데 자본은 점점 늘어나는 반면 인간사회에는 최적해가 도입되지 않습니다. 그 최적해는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알려면 인간의 언어와 계산능력의 작동원리인 ‘이산무한’의 메커니즘과는 다른 것이 마음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까부터 말했던 ‘증여’와 ‘존재’라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이산무한’과는 다른 무한의 구조가 작동하는 것입니다. 이 무한의 구조는 무한이면서도 ‘무한히 늘어나는 공간’을 상정하지 않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대칭성 논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동양사상에는 흔히 ‘이 한 점에 전우주가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척 진부해졌습니다만, 사실 절묘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공간적으로 팽창하는 것과는 다른 ‘무한’의 형태를 표현하는 말이며,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도 그와 같은 위상(topology)을 갖습니다.

자본주의와 원전의 배후에는 공간을 어디까지라도 넓혀나가는, 혹은 상품의 형태를 취한 부(富)를 무한히 증식시키고 무한히 소비할 수 있다는 ‘이산무한’적 사고방식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증식 자동기계’적 사고방식입니다. 이 사고방식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인간의 생명도 그러한 것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나 그런 사고방식은 결코 최적해를 갖지 않습니다. 3·11 이래로 일본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합니다. 우리는 이 열도에서 인간과 자연의 최적해를 추구하는 최초의 현대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일본의 대전환』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마음의 최적해는 어디에서 도출될까?’ 이 곤란한 문제에 도전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명이 자크 라캉입니다. 만년의 라캉은 ‘자기(自己)’와 ‘타자(他者)’ 사이에서 최적의 거리를 찾기 위해 피보나치 수열을 이용한 색다른 계산을 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도 두 개의 다른 부족이 상호간에 만드는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황금비를 이용해 보여주려고 했었죠. 인간 세계에도 최적해가 있고, 그것을 실현하려면 이제부터 경제학, 기술론, 사회학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모더니즘 사고와 결별해야 합니다.

*물리학과 수학개념을 취한 새로운 생물학을 구축했다. 저서로 『생물의 모습』 등.
**이산적으로 있으면 연속적인 집합의 부분집합이 조각조각 떨어진 형태가 되는 것. 예를 들어 실수 중 정수 전체가 그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물리학이 이산적 값을 갖는 것이 특징. 또 촘스키는 ‘이산무한 개념(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 모든 인간에게 생물학적으로 편입됨에 따라 수數를 익히는 어린아이가 어떤 수 n까지 1, 2, 3, …, n까지 익히더라도 거기서 ‘자연수’가 끝나지 않고, 아무리 n을 대하더라도 반드시 n+1이 존재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상정하고 ‘자연수의 무한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이산무한성을 보고 ‘(자연)수’ 개념은 인간 고유의 특성처럼 된다’(노엄 촘스키, 『생성문법 기획』)라고 한다.


고쿠분 : 사고와 사고대상의 ‘일치’에서 시작해 ‘최적해’ 추구까지 이야기하시던 중 라이프니츠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들뢰즈는 확실히 일생동안 라이프니츠의 구애를 받던 사람으로, 최후 저작인 『주름』*도 라이프니츠론(論)이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사고와 사고대상의 일치에 손을 들어준 철학자입니다. 모나드와 우주는 완전히 접속되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들뢰즈가 신경쓰던 또 한 명이 바로 스피노자였죠. 스피노자 역시 ‘일치’의 사고를 하던 사람으로, 그는 자신과 일치하는 사물이야말로 기쁨의 감정을 고양시킨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해 들뢰즈에게도 분열지점이 있어서,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불일치’를 강조했습니다만 그 자신의 주된 연구에서는 ‘일치’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들뢰즈의 라이프니츠론에 나오는 ‘주름(pli)’이란 공간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점 안에 여러 개 주름이 있어 그 안에 무한이 있다는 발상입니다. 스피노자의 ‘양태(modus)’라는 사고방식도 그에 가깝습니다.

*질 들뢰즈,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1988)


나카자와 : ‘주름’은 ‘접어 넣기’라서 작은 지점에도 ‘무한’을 채워넣을 수 있습니다. 기하학에서 말하는 프랙탈에 가까운 것이고요.

고쿠분 : 그것과 정반대의 발상이 데카르트의 ‘연장(extensio)’입니다. 들뢰즈가 데카르트에 대해 항상 부정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그 연장에 대한 직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최적해에 대해 말하자면,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서 저는 ‘소비’와 ‘낭비’는 다른 것이라고 썼습니다. ‘소비’는 ‘n’이 ‘n+1’이 되어가는 것처럼 최적해를 갖지 않으며 끝없이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소비 대상은 기호이며 관념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사물의 향유인 ‘낭비’에는 한계가 있고 어떤 지점에서 만족하며 멈춥니다. 바로 최적해를 갖는다 할 수 있죠. ‘소비’와 ‘낭비’의 구별은 한층 더 세련될 필요가 있는데, 우선 이러한 개념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목할 사람은 의외로 보드리야르입니다.

나카자와 : 보드리야르는 여러 가지로 오해받아 저평가받은 점이 없지 않죠. 사실 무척 중요한 사상가라고 생각합니다.

고쿠분 : 오늘날 보드리야르는 어째서인지 ‘소비사회의 대변자’처럼 취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무척 구식인 좌익이라고 할까, 그야말로 ‘농부’ 타입의 사상가입니다. 저도 다시 읽기 전까지는 오해하고 있었는데 소비사회에 대해 쓰기 위해 새롭게 읽어보니 눈이 확 뜨이는 책을 썼더군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낭비’가 ‘소비’와 다른 최적해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카자와 : 『상징적 교환과 죽음』(1976)은 확실히 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래디컬리즘과 ‘보통’의 일


고쿠분 :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에서는 ‘낭비’는 어디서 멈추는가, ‘만족’이란 무엇인가, 그것과 ‘욕망’의 관계는 어떠한가 라는 문제들을 충분히 분석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이제부터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라캉의 정신분석에 힌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나카자와 : 그러나 모든 ‘라캉파’라는 사람들의 말투는 그야말로 시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일본의 대전환』에서 사용했던 ‘마음의 라캉 모듈’*이라는 사고방식은 라캉의 만년 작업으로,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고 말해지는 것입니다만 저는 그것에 가장 끌렸습니다. 그런 래디컬한 생각을 잘도 교양서에 썼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사실 반대의견이 꽤 많았습니다.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까지는 좋은데 좀 난폭해져서(웃음).

최근 맑스와 레닌의 글을 다시 읽는데,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대단히 섬세하게 전개했구나 하고 감탄중입니다. 특히 맑스의 『고타 강령 비판』이나 엥겔스의 『에르푸르트 강령 비판』과 같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쓴 연설문들은 이런 국면에서 잘도 원칙을 내세우는구나 하고 정말 놀라게 됩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제창했던 인간 마음의 위상학. 인간의 무의식의 마음이 ‘사영평면(射影平面)’이라는 토폴로지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일본의 대전환』에도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고쿠분 :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聰, 1977~) 씨가 잘 강조했다시피,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는 ‘진짜 맑스주의 국가론이란 무엇일까?’라는 까다로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혁명이 진행되던 한복판에서 쓴 것입니다. 실천에 대해 조금의 착오도 허용하지 않는 국면에서 굳이 까다로운 것을 논하는 특이한 책인 것입니다.

나카자와 : 레닌은 그 책을 썼을 때 완전히 소수파였고 대세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런 때였으니까 래디컬리즘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고쿠분 : 『일본의 대전환』 결론부에는 만년의 라캉이 그렸던 매우 까다로운 마음의 구조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그 책에서 재밌었던 것은 그 직후 나온 ‘무의식의 혁신을 일으키려면 적당한 휴가도 필요하다’라고 하는 대단히 평범한 말이었습니다(웃음). ‘자본주의가 명령하는 혁신이라는 것은 뇌(마음)와 무의식 영역의 경계면에서만 발생한다. ‘노동’은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적당한 휴가와 자유로운 환경 안에서만 좋은 아이디어, 즉 무의식의 좋은 증여가 일어난다‘라는 것이지요.

이 책의 결론은 저도 정말 찬성입니다. 저도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결론부에서 맑스가 “자유로운 왕국의 근본조건은 노동일의 단축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했습니다. 이것도 대단히 평범한 것이네요(웃음).

나카자와 : 『일본의 대전환』에서도 썼습니다만 ‘무의식의 혁신을 일으키려면 적당한 휴가도 필요하다’라는 것은 구글 사훈 같은 것으로,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야말로 ‘증여’의 원리를 누구보다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는 ‘증여’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기다림’은 적당한 휴가와 자유로운 환경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다른 이득이 되는 일을 하자’고 말해버리니까요.

최근 저는 이러한 평범한 것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지진 이후 예능인이나 뮤지션이 자선 콘서트를 곧잘 열고 있는데, 그중 재해지역에서 가장 큰 열광을 이끌어낸 사람은 나가부치 츠요시(長渕剛)였습니다. 어른도 어린아이도 모두 울면서 그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대단히 단순한 것만 말했습니다(웃음). 저도 이러한 것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웃음).

고쿠분 : 그렇다면 오늘의 결론은 ‘휴가가 중요하다’인가요(웃음).

나카자와 : 네(웃음). 오늘날 젊은이가 사는 방법으로 괜찮지 않을까요.

고쿠분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근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란 책을 썼던 후루이치 노리토시 씨와 대담을 했었는데 그는 ‘오늘날의 젊은이는 행복지수가 높다. 그것으로 괜찮지 않을까’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습니다. 저는 후루이치 씨 발언에 동의합니다. 이제까지는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고 일하며 경제성장을 했습니다만 누구도 풍족하지 못했고 그러한 과거를 일본사회는 언젠가부터 반성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괜찮지 않을까’라고 말한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후루이치 노리토시(古市憲寿),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絶望の国の幸福な若者たち)』, 講談社, 2011년. (국내에는 같은 제목으로 민음사에서 출판되었다 - 역자)


나카자와 :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감동했던 것은 마크 보일(Mark Boyle)이라는 젊은 작가가 쓴 『나는 돈을 쓰지 않고 살았다』*입니다. 1년간 돈을 전혀 쓰지 않고 생활한 젊은 영국인의 책인데, 그것은 우리가 하고자 생각하면서도 의외로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예전에 그와 비슷한 걸 일본 TV 프로그램에서도 했었는데, 그건 방송국이 주관하여 많은 돈을 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웃음). 그것을 전부 혼자서 스스로 해낸 이 영국인의 래디컬리즘을 일본인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년 마크에 따르면, 돈을 쓰지 않는 생활은 정말 바쁜 모양입니다(웃음). 아침 일찍부터 잡초나 땔감을 주변에서 모아서 난로에 불을 지피는 것을 시작으로 하루를 무척 바쁘게 보냅니다. 그래도 풀을 뽑으면 가끔 순간적으로 주변 풍경이 정말 다르게 보인다, 아침 풍경과 새와 식물을 이런 식으로 느낀 적은 없었다, 점점 자신이 바뀌어간다, 그것을 느끼며 땔감을 모으는 것도 바쁘다, 라고 하는데 좋은 이야기 아닙니까(웃음).

*국내 제목 『돈 한 푼 안 쓰고 1년 살기』 (부글) - 역자


고쿠분 : 우선 젊은이들에게 읽히고 싶네요(웃음). 그 후루이치 씨의 책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데, 그는 ‘지금의 젊은이들은 그저 만족하고 있으니까 어떤 것에도 나서지 않는다’와 같은 단순한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모럴 이코노미’ 라는 민중사 개념을 원용하고 있습니다. 민중사 연구에 따르면 민중은 ‘모럴 이코노미’라는 독자적 ‘규범’을 갖고 있고, 비근한 그 룰이 범해졌을 때 갑자기 나서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때려 부순다든가, 쌀소동*이 일어난다든가. 지금의 젊은이도 자신들의 모럴 이코노미가 자극받는 사태가 일어나, 그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유통되면 확실하게 나서지 않을까요? 실제로 이번 원전 사고가 일어나자 탈원전을 지향하는 많은 젊은이가 나서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쌀값 변동에 자극받아 일어나는 민중 운동을 통칭한다. 대표적인 일본의 쌀소동은 1918년 갑자기 쌀값이 폭등해 일어난 민중 폭동이다. - 역자


나카자와 : 그린 액티브에서도 그러한 일을 합니다. 젊은이가 나서는 것을 독려하는 계기를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돈을 많이 들여 선거에서 싸우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이러한 운동을 집요하게 계속해나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일본에서 사회운동은 이미 풍화(風化)되었고, 지금은 정부도 도쿄전력도 많은 돈을 들여 ‘원전은 괜찮다’라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그러한 공세를 대규모로 준비하고 있겠죠. 그러나 우리는 ‘그때 일어났던 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 진리로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해야 합니다.

고쿠분 : 하이데거는 그리스어 ‘진리(Aletheia)’를 ‘덮을 수 없는 것’이라고 번역했는데, 확실히 덮을 수 없이 바로 나타난 진리로군요.

나카자와 : 하이데거의 사상이 비로소 현실에서 나타나는 시대로 돌입한 것이죠.


(2012년 1월 10일 메이지 대학/야생의 과학연구소에서)



전체 2

  • 2021-03-15 11:58
    '나카자와 신이치의 "‘원자력시대’에서 선사(先史)의 철학으로'는 제 수준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어려운 부분이 많은 내용이었는데 완성까지 글이 왔군요! 능력부족으로 제대로 읽지는 못했지만 마지막 완성까지 어찌어찌 함께한 저에게도 뿌뜻한 마음이 듭니다.ㅎㅎㅎ
    인간의 번뇌 구조를 통해 만들어진 마음의 형태와 자연계의 형태는 ‘최적화’ 과정을 통해 하나로 이어져 있지만, 3·11 이래로 인간과 자연의 최적해를 추구하는 최초의 현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새로운 생각의 지점을 선물받았다는 생각이 들게하네요^^ 이 선물이 무상증여이겠지요?! ^^~~

  • 2021-03-18 11:56
    우리 삶에서 최적해를 갖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증여를 기다릴 줄 아는 삶의 방식이란 어떤 걸까요?
    딱딱하게 굳어진 머리에 틈을 내어주려고 혜원이 이렇게 보시를 해주는데 따라가질 못하고 있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