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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푸코의 철학 (2) 4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6-16 15:58
조회
229
홉스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구분합니다. 유명한 말처럼 그는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으로 보고, 그러한 전쟁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고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국가를 탄생시키게 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구체적 절차로서의 계약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개인들이 짐승상태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마음대로 할 자유를 얼마간 주권자(리바이어던)에게 양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와 개인 사이에는 일종의 계약관계가 성립하며 그러한 계약이 이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사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 같습니다. 저는 홉스를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네요^^;

그러나 푸코는 홉스가 세팅해 놓은 전제들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푸코가 사회를 전쟁모델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전쟁상태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게속해서 새롭게 그어지는 수많은 전선들로 이루어진 전쟁터라는 것이죠. 푸코는 야만/문명, 전쟁상태/평화상태, 자연/사회 등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사고방식 자체를 의심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를 계약과 법에 의한 평화상태로 이해하는 홉스의 논리는 모든 주권이란 사실 “정복에 의해 성립된 것”이라는 점을 은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고, 법에 복종하는 주체의 원초성을 확립합니다. (홉스는 통일적인 전체를 이루는 요소가 될 수 없는 ‘다중’개념을 거부하고자 했다고 하네요.) 권력의 주권적 이미지를 재현하는 담론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들이 이것을 원했던 것이야. 당신들을 대표하는 주권을 설정한 것은 바로 당신들, 제반 주체들이야. 그러니 이제 그 지긋지긋한 역사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야. 정복 끝에서(왜냐하면 정복을 당신들은 실제로 원했으니까), 그곳에서 당신들은 계약을, 주체의 두려움에 떠는 의지를 찾아내게 될 테야.”

16~17세기의 정치적 논쟁은 바로 이 ‘주권’의 문제에 묶여있었다고 합니다. 왕권을 옹호하는 쪽의 담론도, 그것에 저항하는 측의 담론도 ‘주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뜻이겠죠. 그렇게 본다면 지금에 와서도 정치적 논쟁의 구도가 크게 바뀌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홉스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의 현대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적인 환상, 우리 모두는 권력을 똑같이 나눠서 소유하고 있거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환상은, 국가와 제도를 정당화하고 스스로를 법에 복종하는 예속 주체로 주체화하는 논리로 작동할 것입니다. 주권이론은 항상 주체를 감싸는 동시에 배제를 만들어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할 때 ‘국민’이라는 언표주체에 스스로를 겹쳐놓을 수 없는 수많은 존재들은 주체들에 권력을 부여하는 바로 이 문장에 의해 배제되겠죠. 푸코의 문제의식은 ‘법적 주권’과 ‘국가제도’ 바깥에서 권력을 분석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채운샘 강의안).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바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18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새로운 권력의 역학이 나타나는데 이전 강의에서 들은 것처럼 푸코는 이를 규율권력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주권적 모델에서 군주는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권력은 무엇보다 “물건, 시간, 육체, 마지막으로 생명에 대한 탈취권”에 다름 아니었죠. 그러나 규율권력의 작동방식은 죽게 하거나 살도록 내버려두는 방식이 아니라, 규율을 부여하고 훈육함으로써 개체들을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최대의 생산력을 이끌어냅니다. 이러한 규율권력이 자본주의와 더불어 작동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규율권력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 새로운 전선을 만들면 되는 것일까요? 푸코는 책이나 논문 강의록 등에 따라서 어떤 때는 주권권력, 규율권력, 생명권력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기도 하고, 동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주권적 권력이 규율권력으로 완전히 대체되고 다시 생명권력으로 완벽히 뒤바뀌는 방식은 아닐 것입니다. 미시적으로 보자면 상이한 권력의 메커니즘들은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지 않을까요? 가령 군대에서 상관과 부하의 관계는 주권적 권력의 구도로 드러나지만 사실 그 두 사람이 맺고있는 다층적인 관계들을 고려해본다면 둘 사이의 주권적 관계는, 규율적 장치로서의 군대를 작동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문제는 특정한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시적 관계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일일 것 같습니다. 우리를 생산하고 있는 권력을 분석함으로써 전선을 계속해서 달리하면서 투쟁을 계속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자유를 구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채운샘은 자유는 권력자로부터 되찾거나 권력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투쟁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규율권력 개념을 이끌어낸 뒤 『앎의 의지』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는 규율권력을 보완하는 개념인 ‘생명권력’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주권권력이 죽게 ‘하거나’ 살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었다면, 생명권력은 반대로 살게 ‘하거나’ 죽음으로 ‘몰아내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규율권력이 신체를 조련하고 순응시키는 것을 문제로 삼았다면, 생명권력은 규율 절차에 덧붙여 “종으로서의 육체, 생명체의 역학에 의해 검토되고 생물학적 과정에 대해 매체의 구실을 하는 육체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수행합니다. 규율권력이 각각의 개체들을 훈육하는 장치들을 통해 기능한다면, 생명권력은 전체로서의 인구를 관리하고 부의 흐름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생명 자체를 관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규율권력과 생명권력은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생명권력이 규율 절차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생명권력 개념은 규율권력 개념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던 금지와 배제 억압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버린 것 같습니다. 생명권력은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있을 장소를 마련하고 확정하고 고정시키며, 자리를 배정해주고, 개인이 있어야 할 장소, 즉 바둑판으로 구획된 공간 안에서의 개인의 자리를” 한정해줍니다. 개인의 건강을 세심하게 관리함으로써 전체 인구의 흐름을 관리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건강한 국민’을 생산해 내는 것. 저는 개인적으로 군대에서 이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군대에서는 물론 규율적 절차를 통해서 하나하나의 병사들을 조련하고 그들의 신체를 획일적으로 규율화하죠. 그러나 동시에 군대는 병력관리를 위해서 병사들로 하여금 온갖 예방주사를 맞게끔하고, 형식적일 뿐이지만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게 합니다. 요즘에는 정신적인 차원의 관리에도 신경을 써서, 요청하면 언제든 상담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죠. 현대사회에서 개인들을 가장 심하게 억압하고 조련하는 공간이 군대이지만, 동시에 가장 신경 써서 그들을 관리하는 공간이 또한 군대인 것 같습니다. 군대는 전투력이 뛰어난 병사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명령에 순응하는 건강한 신체를 생산하고 그러한 병력들 전체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규율 절차를,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병력의 흐름에 대한 관리와 통제를 행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건강한 국민들을 생산하는 생명권력에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코는 생명권력과 인종주의를 연결시킴으로써 문제를 좀 더 명확하게 해줍니다. 인종주의란 “권력의 통제 하에 있는 생명 영역에 단절을 도입하는 방식”인데, 이는 사회 내에 “살아 마땅한 자와 죽어 마땅한 자”의 구분을 성립시킵니다. 인종주의의 경우에 이러한 단절은 인종 혹은 민족이 되겠죠. 이것은 사실 생명권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동일합니다. ‘생명’을 관리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전체로서의 ‘국민’ 혹은 ‘만인’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모든 것들을 보호받고 관리되어야 할 ‘생명’의 범주로부터 배제시킬 수 있음을 뜻합니다. 그런점에서 생명권력의 논리와 보편적 인종주의의 논리는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치의 기본적인 논리는 순수한 아리아인의 건강을 위해 다른 종들을, 특히 유태인들을 죽어 마땅한 종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푸코가 보기에 사회주의 국가든, 자본주의 국가든 동일자를 관리하고 보호한다는 논리를 통해 모든 위협적인 존재들로부터 ‘국가’를 혹은 ‘사회’를 보호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인종주의와 다르지 않은 것이죠. 그러므로 생명권력의 논리에 의해 우리는 보호받는 존재인 동시에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됩니다. 우리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혹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사회로부터 우리를, 혹은 '국민'이라는 규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저항해야 할까요? 우리는 권력에 대해 저항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권력은 이미 작동하고 있고, 우리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저항해야 할 '권력'을 바깥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죠. 이러한 문제를 돌파하게 해주는 개념이 바로 '통치성'입니다. 권력은 어떤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작용하고 있으며 생산하고 있습니다. 통치성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권력의 생산하는 측면을 보다 잘 보여줍니다. 통치성은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치적, 경제적 종속 형식들을 포괄할 뿐 아니라 다른 자들의 행위 가능성에 대해 작용하도록 운명지어진, 고려되고 계산된 행위방식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그런 점에서 통치성은 명령이나 지배와는 달리 통치하는 자와 통치 당하는 자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통치는 절대적 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통치 당하는 자의 자발성을 이끌어냄으로써 행해집니다. 그렇기때문에 통치에는 복잡한 기예들이 수반되며, 이러한 통치의 역학관계에는 언제나 어떠한 틈이 생겨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성 개념을 통해서 볼때 어떤 내리누르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통치와 더불어 동시적으로 생산되는 어떤 틈으로서의, 내재적인 저항적 실천을 사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저항이란 권력의 역학관계로부터 떠나기 위해 권력에 맞서는 부정적인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영역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 '스스로를' 구성"하는 능동적인 방식의 저항일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능동적인 저항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기존의 권력의 역학관계에 대한 부정을 내포하겠죠. 푸코와 채운샘에 따르면(^^) 우리는 "역학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으나 통치의 형식에 저항하여 다른 주체화 양식을 결정할 수는" 있습니다.
전체 4

  • 2017-06-17 18:40
    영양가 많은 알찬 후기로구나야~~, 잘 읽고 지나간다^^. 그나저나, 예제서 공지노동하느라 욕보는구나!! ㅎ

    • 2017-06-17 20:55
      아닙니다ㅋㅋ저같은 놈팡이가 공지라도 써야죠 강의를 들으셨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 2017-06-17 20:10
    직장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효율과 관리라는 단어인 것 같네요. 우리는 세심하게 관리 당하고, 스스로 주류의 논리에 따라 자신을 관리하기도 하죠. 관리의 큰 선을 넘어가지 않으면 우리 신체에 특별히 관여하지 않지만,넘어서는 순간 주체권력과 규율권력이 같이 작동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2017-06-17 21:00
      선생님처럼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푸코의 개념들과 정말 즉각적으로 접속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다른 분들은 강의를 어떻게 듣고 계신지 궁금해지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