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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0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6-12-13 10:49
조회
326
이번 조별토론에서 자(慈)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깔끔하게 얘기가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자’라는 개념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흠흠)

 

저는 ‘자’를 단순히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인자하다, 자애롭다, 자비롭다와 같은 식으로 이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를 자꾸 인간의 개념과는 좀 다른 것으로만 생각한 것 같습니다. 토론 때 이야기됐던 것은 ‘자’를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자애와 같은 감정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사랑을 ‘자’라고 하면 지금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것 역시 ‘자’의 일환이냐는 얘기였습니다. 사자나 캥거루 같은 유대류 얘기가 나온 것도 자연으로 범위를 확대했을 때, 새끼에 대한 사랑이 생물의 본성은 아니라는 쪽으로 생각한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하다면 혈연관계도 끊어낼 수 있어야 하고, 그때 필요한 것이 용(勇)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자’를 지금 우리의 사고에 맞지 않도록 생각하다보니 지나치게 샛길로 빠진 것 같네요. ㅋㅋ;;

채운쌤이 말씀하신 대로 ‘자’를 ‘모든 것을 품는 어머니’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단순히 자식을 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해하려는 적까지 포용하는 것이 노자가 얘기하는 ‘자’라는 것이고, 대상을 가리지 않는 까닭에 ‘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채운쌤은 여기서 어머니의 위대함을 얘기합니다. 어머니가 포용하는 행위는 이질적인 것, 타자를 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임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임신하게 되면 ‘어머니-태아’라는 운명 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어머니에게 기생하는 태아의 탄생일뿐입니다. 요즘 태반이 화제가 되는데, 실제로 임신 중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태반은 태아로부터 오는 세균을 막음으로써 어머니의 면역력을 유지하고 기타등등 호르몬을 조절합니다. 임신기간 동안 태아는 어머니를 위협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질적인 것, 타자를 품기에 어머니는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임신이 결국 출산으로 마무리되듯, 어머니의 품기는 결국 내보냄으로 마무리됩니다. 내보낼 수 있기에 또 다시 품을 수 있고, 이런 것들을 기꺼이 해내기에 노자는 ‘어머니’를 중요시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품는 것을 그치고 내보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자식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것들이 아마 그것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물의 원리인 도(道)는 어떤 한 상태로 고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태, 조건에 빠져들더라도 곧 그것을 벗어나 다음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어떤 상태에 고착될 때 발생합니다. 우리는 분별을 통해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만들고 언제까지나 선과 행복 안에서만 살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끝이 있듯이, 아무리 선과 행복을 추구하더라도 그것들은 끝이 나고 곧 악과 불행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선과 행복에 더 집착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다 자기 마음대로 되던가요. 오히려 악과 불행에 빠지게 되고 그럴수록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합니다. (행복이 끝나면 불행이 오고, 그것을 견뎌내야 다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런데 노자의 본의는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의 분별 자체를 넘어서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도에 따르면, 품는 행위는 곧 내보내는 행위까지 포함합니다. 내보내지 않고 계속 품는 것은 ‘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 ‘자’를 얘기하면서 예로든 부모의 사랑도 실은 자식을 품기만 하는 부모의 모습이었습니다. ‘자’에 대해 얘기하려면 우선 제가 생각하고 있는 ‘자’를 먼저 정리하고 그 다음에 노자의 ‘자’에 대해 얘기했어야 하는데, 무작정 노자의 ‘자’를 제 생각과 거의 비슷하게 해석해버렸네요. 하하하

이번 노자에서 ‘자’와 함께 가장 인상적인 글자는 65장에 나오는 우(愚)였습니다. 이 ‘우’라는 글자는 명(明)과 반대되는 것으로 ‘어리석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노자는 단순히 ‘어리석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때의 ‘우’가 뜻하는 것은 ‘명’과 ‘우’의 분별 자체를 넘어서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를 이해하기 힘든 것이, 지금 시대에서는 우리는 분별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명’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서 ‘우’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채운쌤은 ‘우’를 생각하는 것이 곧 통치에 대해 다시 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는 <논어 - 공야장>에서 ‘영무자’를 평가할 때도 나옵니다. (자세한 내용은 격몽복습 공야장 18~22를 참고해주세요.) 영무자는 나라가 잘 다스려질 때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고생과 험함을 피하지 않음으로써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고 합니다. (不避艱險) 공자께서도 영무자의 지(知)에는 미칠 수는 있겠으나 ‘우’에는 미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와 ‘우’ 둘 다 실천성을 내포하는데 ‘우’를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지’와 ‘우’라는 글자가 가진 뜻을 말하기 보다는, 이것저것 따지고 분별하는 것보다는 우직하게(우직하다에도 ‘우’가 쓰입니다.) 맡은 바 역할을 하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본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공자와 노자의 출발점은 달라집니다. 공자는 교화를 통해 각자 계급에 맞게 살아가는 것을 얘기했지만, 노자는 이러한 구분이 인간세상을 어지럽힌다고 얘기하면서 계급과 같은 구분 자체를 거부합니다. (노자가 계급을 거절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고응본 410쪽 장묵생의 주를 참고하면, 이미 노자는 계급을 거절하지 않았을까 하는 얘기도 없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에서 이 둘이 비슷한 모습을 보이니까 이것 참 신기합니다. 채운쌤이 얘기하신대로 노자의 ‘자’와 공자의 ‘인’은 거의 같은 모습을 보여줄 것 같습니다.

69장의 첫 구절은 군대를 다스리는 사람의 말로 시작합니다. 채운쌤은 이때 세(勢)를 얘기하셨는데, 이 단어는 병가뿐만 아니라 동양미술에도 쓰인다고 합니다. ‘세’란 역동적으로 변하는 불균형한 힘을 말합니다. 병가에서는 군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진과 후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는 것이 ‘세’라고 합니다.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사가 공격해오자 성을 버리고 계속 달아나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적을 기만하려는 유인책이었고 나중에 적이 평양 근처의 살수를 건너려 할 때 협공함으로써 거의 몰살시킵니다. 어떻게 보면 전략적 후퇴라는 말이 ‘세’를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난을 자주 쳤는데, 사실 저는 ‘세’를 듣기 전까지 왜 난을 치는지 몰랐습니다. 난의 잎 하나하나가 강렬하게 올라가다 뚝 꺾이면서 부드러움을 나타낸다나.......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잎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힘을 그리는 것이고, ‘세’를 본다는 것은 잎이 가진 힘을 어떻게 포착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미술작품을 논할 때, 붓의 힘이 어떻다고 얘기한 게 이런 이유일까요?

 

처음에는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었는데, 벌써 마지막이군요. 이제 노자가 얘기하려는 것이 뭘까~ 하고 궁금해지던 차였는데....... 흠흠. 어쨌든 마지막에 아쉬움을 덜 남기려면 지금이라도 더 열심히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시간에는 노자의 도덕경을 끝까지 읽으시면 됩니다.
전체 2

  • 2016-12-13 13:22
    이질적인 것을 품고서 그걸 자신과 동일화시키려 하지 않는 것(내보내는 것), 책을 읽는 일에도 적용되어야 할 덕목(?)인 것 같네요...
    이번주 간식은 규창이와 윤몽누나입니다~ 그리고 토요일에 마지막으로 민호에게 보낼 책 받습니다~

  • 2016-12-14 10:23
    노자를 읽은것 참 다행이에요..순간순간 '이런것을 말하는가보다' 스쳐지나가지만, 곧 잊어도 ^^ 찰나라도.
    채운샘이 언급하신 프랑수아 줄리앙의 '사물의 성향' 주문했는데 이거 과연 읽을수 있을까요? 노자 책도 다 안 읽고 가서 조원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 마당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