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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2탄 <7강> 후기 1 (안티크리스트)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7-01-11 10:41
조회
410
니체 2-7강. ‘디오니소스 vs. 십자가 예수’ : <안티크리스트>

 

니체 마지막 수업이었어요. 지난주에 이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극에 달했죠. 어떤 분들은 ‘사이다’라고, 속 시원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요. 저의 경우는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기독교문화 속에서 성장한 배경 탓이겠지만, 어어, 이거 괜찮은가, 불경한 것 아닌가, 이렇게까지 말해도 되는가, 좀 안절부절 못하는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또 그 불안감에 못지않은 희열도 느끼며,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로 요 몇 주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마냥 하하 웃게 되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이게 배우는 과정이 맞긴 하구나 했어요. 후기를 쓸 때마다 다른 수업들에 비해 니체는 정리를 하기에 실력이 터무니없이 모자람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수업을 들을 때 꽤 다양한 것들을 인상 깊게 만난 거 같지만, 막상 정리를 하려니 내용들이 다 토막토막 떨어져 있어서 각각의 마디가 서로 통합·연결되지 않는 것 같아요. 선생님의 표현을 제외하고는 한 문장도 설명할 길이 없을 정도로 저 자신만의 어휘가 빈곤하다는 것도 절감합니다. 아무튼, 토막토막이나마 이해한 것들을 나열해 보도록 할게요.

 

니체는 당시의 그리스도교적 도덕이 반자연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졌는데요. 이것을 데카당의 도덕, 즉 몰락의 도덕이라고 보고 이에 반대하는 비도덕주의를 말했다고 할 수 있어요. 니체가 보기에 교회는 인간의 감성과 욕망, 열정들을 공격하고 ‘거세’를 처방이자 치료로 제시하는데, 이것은 삶에 적대적인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을 거스르는 것이었죠. 어떤 외부의 자극 앞에서 얼마나 다양한 반응을 할 수 있는가가 한 인간의 민감함과 건강함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특정 자극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것, 혹은 한 가지로만 반응하는 것은 그 의지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힘의지가 약한 자들은 욕구 자체를 능동적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힘이 없는데, 교회에 의해 ‘치료’받은 약자들은 모두 이렇게 ‘거세’되거나 ‘조로’환자가 되고 맙니다. 니체는 ‘젊음’이 ‘평화를 요구하지 않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그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가 싸우거나 모험을 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안정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늙은 사회’이자 ‘조로 사회’이죠. 거세된 자들의 약함의 징후는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한 증오로 나타납니다. 증오는 얼핏 보면 강하고 능동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반동적인 차원으로, 여기엔 아주 부정적인 힘의지가 도사리고 있어요.

 

인간은 결국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과 현실성은 같이 갈 수밖에 없죠. 하지만 니체에 의하면, 그리스도교는 모든 자연과 현실성, 삶 자체를 부정하며, 적대시합니다. 사람들은 신 등에 의해 주어진 가치가 없을 때 쉽게 허무감을 느끼지만 우린 삶이 이러저러하다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도 삶의 바깥에 위치할 수 없기 때문에 삶의 가치를 매길 수 없어요. 만일 이미 주어진 가치가 없는 것이고 그것을 무의미라고 한다면, 그 무의미함으로부터 의미와 가치를 만들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중요하게 되는 것이죠. 그럴 때 삶이 긍정될 수 있어요. 삶의 가치가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죠. 우리가 이미 주어진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삶 자체가 스스로 가치평가를 한다는 말이에요. 니체에겐 세상에 유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세상을 더럽히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은 모든 생기와 끊임없는 생성이라는 현실을 보지 않으려는 의지이자 삶에 대한 범죄이며 데카당의 도덕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타락으로부터 시작했고 심판의 날이 가까워진다는 식의 교회의 발상은 내세를 신봉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죠. 타인을 지배하거나 뒤섞이려는 자연스러운 힘인 에로스를 불결한 것으로 본다거나, 육체를 모욕하기 위해 영혼과 정신을 날조한 것, 정신성에서 자연성을 추방해 버리고 생성에 대한 부정을 통해 ‘반자연’을 최고의 도덕으로 숭상하는 것. 니체가 보기에 이것은 삶을 부정하고 삶에 보복하려는 도덕이고, 성직자들에게 권력을 주는 수단에 불과한 몰락의 도덕입니다. 성직자들은 스스로 몰락하는 자들이나 강자들이 아니라, 혼자서는 몰락할 수도 없는 약자들을 양으로 삼고 지배하죠. 니체는 이런 그리스도교 도덕 전체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것, 기존의 가치들을 전도하는 작업을 자신의 운명으로 느끼는데요. 그의 깨달음은 ‘이제껏 진리로 불러온 모든 것이 가장 해롭고 음험하고 가장 지하적인 형식의 거짓’이라는 것이었죠. 여기서 니체는 그리스도교도만을 핍박했는가 생각할 수 있는데요. 사실은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무장한 현대성 자체도 그리스도교의 변형일 뿐이라고 생각한 니체는,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현대 자체를, 진보와 발전에 대한 믿음 자체를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삶을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자들을 신의 이름이나, 피안이나, 참된 세계나, 불멸의 영혼 같은 것으로 현혹하는 모든 것, 현실의 건강 대신 영혼의 구원을 바라고, 실재성을 왜곡시키고 부정하는 허구의 세계를 숭배하는 모든 것이죠. 니체에게 그리스도의 신 개념은 지상에 실현된 것 중 가장 부패한 신 개념인데, 스스로 선한 자라 부르는 약자들의 신이면서, 타인의 신을 악마로 만듦으로 상상적인 비겁한 복수를 선택한 것이라 본 것이죠. 니체는 한탄합니다. 삶에 대한 영원한 긍정 대신 삶에 대한 반박과 삶에의 의지에 대한 적대가 선언되고, 이 세상에 대한 비방의 공식이자 저 세상에 대한 거짓 공식이 신이라니!

 

니체가 데카당의 도덕에 맞서서 자처한 ‘비도덕주의자’라는 말은 지금까지 최고라고 여겨진 인간 유형(선하고 호의적이며 선행하는 인간)에 대한 부정과, 도덕으로 행사되어온 그리스도교 도덕에 대한 부정이라는 두 가지의 부정을 모두 내포합니다. 그가 보기에 선의와 호의에 대한 과대평가는 삶을 폄하하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의 결과이죠. 선함이라는 게 있다는 것 자체가 거짓에 기반하며, 낙관주의는 염세주의만큼이나 데카당한 것이에요. 세상은 일진일퇴하는 것으로 낙관을 예측할 수 없는데, 선하게 행동하면 복 받을 거라는 식의 믿음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으려는 약함의 징후인 것이죠. 니체에게 선한인간은 가장 해로운 인간 유형으로 간주됩니다. 그들 대신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강한 인간 유형, 현실적 조건 속에서 힘의지를 발휘하는 인간, 생성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필요한 것이죠.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 원래의 복음에는 죄와 벌의 개념이나 보상 개념이 부재하며, 구세주의 삶은 저항과 멸시와 분노가 없는 ‘다른 행동’, 복음의 실천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 복음은 정작 십자가와 함께 죽고 죄, 죄의 사함, 신앙, 신앙을 통한 구원 개념만이 살아남고 말았어요. 사도들은 예수가 보여준 ‘모든 원한 감정을 넘어서 있는 자유와 능가라는 모범’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끔찍한 죽음에 대한 합리적이고 납득 가능한 설명들을 찾으려는 노력 속에서, 예수를 가장 호전적인 투사이자 메시아로 만들죠. 사람들이 필요했던 보복과 심판, 가장 비복음적 복수심과 대중의 기대가 전면에 나서고, 신의 나라가 이미 현존하고 이루어졌으며 현실이라는 것, 즉 원래의 복음이자 역사적 현실로서의 예수의 숭고한 죽음은 심판과 재림에 대한 교리, 구원자와 부활에 대한 교리, 죽은 다음의 상태를 위한 복음으로 바뀌고 맙니다. 영웅을 만들어 그 안에 결집하고자 하는 약한 자들과, 그들의 믿음 때문에 부활해야만 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실천에 대한 보상이 ‘불멸’이 되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지상에서의 모든 행복과 복음은 끝나고, 모두 죽음 이후의 상태로 미뤄집니다. 그리스도교가 남발한 약속들의 이행도 사후로 미뤄지고요. 로렌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자기 사도들과 제자들을 끊임없이 실망시켰고, 항상 혼자였죠. 스스로는 싸울 수 없었던 약자들은 영웅을 만들고 무리를 이루어 권력을 갖기를 원했고요.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원하지 않았던 그리스도를 심판 체계의 가장 본질적 톱니바퀴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배반한 것에 대한 복수를 감행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강해지지 못하는 자들이 권력을 갖는 방식,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두 번 죽이는 방식이죠. 고통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방식이었던 십자가를 고통의 부정이자 삶에 대한 부정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안티크리스트인가요. 가장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이 가장 충실한 적그리스도가 되고 마는 역설이라니요!

 

저는 이번 두 번의 시즌을 통해서 니체를 처음 만났는데요. 정말 강렬했고 몇 군데에서는 엄청 충격을 받았어요. 물론 아직은 니체의 글을 직접 읽지 못하고 채운샘의 설명만을 들은 상태라 니체를 제대로 만났다고 하기엔 부끄럽지만요(곧 읽기 세미나가 시작하는 건 알고들 계시죠? ^^). 얼마가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제 눈과 입으로 직접 만나는 순간들이 기대가 됩니다.

 

참, 『비극의 탄생』에서 처음 등장했던 ‘디오니소스’는 마지막 저작 『디오니소스 송가』에 이르기까지 계속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나타나는데요. 니체철학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 바로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라죠. 이 이야기는 이응 양의 2차 후기에서 이어지겠습니다. 이것도 기대해주세요! (제가 꾸물거리는 사이에 먼저 올라왔네요;; )
전체 2

  • 2017-01-13 15:10
    예수가 제자들을 계속해서 배신하는자였다는 얘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를 따르는 자들로부터 영원히 보복당하고 있죠... 강의만 듣고 후기 쓰느라 매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ㅋㅋㅋ; 이제 니체를 직접 만나볼 차례^^

  • 2017-01-14 07:45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ㅋㅋ;; 왜 잘 된 건 하느님 덕분이고, 잘 안 되면 내탓일까요? 종교에 기대지 않고는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게 아니라 교리를 따르는 것에 신경 쓴다는 게 기억에 납니다.
    이제 세미나를 하면서 니체를 어찌 소화하고 들려주실지 기대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