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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사〉루쉰, 길 없는 대지-프롤로그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5-17 09:07
조회
841

[특별기획] 루쉰, 길 없는 대지-프롤로그


사상의 게릴라를 따라 일본과 중국 대륙을 걷다 


 

 

도쿄에서 광저우에 이르는 루쉰 생애의 ‘길 없는 대지’를 따라 걷는 인문학적 대탐험기… 본디 땅 위에는 길이 없고,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는 환희의 여정
 

▎사진2. 1936년 10월 상하이에서 열린 목판화 전시회장에서 청년들에 둘러싸여 있는 루쉰의 모습.(맨 왼쪽) / 사진·중앙포토
인간과 기술, 생명과 우주, 물질과 정신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에 <월간중앙>은 독자와 함께 루쉰의 사상을 다시 읽고 삶의 궤적을 더듬고자 한다. 세계혁명문학사에서 가장 고독하고 가장 집요한, 그래서 가장 독보적인 게릴라 루쉰! 대혁명의 시대 한복판에서도 그는 강령과 이데올로기의 수용을 거부하며, 가장 명징하고 독립적인 생명의 길을 추구했다.
▎사진1. 1903년 일본 유학 시절 20대 루쉰의 모습. 강인한 의지와 결단력이 서려 있는 표정이다.
#사진1. 1903년 도쿄. 변발을 자르자마자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20대의 청년답게 어설픈 듯 풋풋하다. 허나, 옆으로 찢어진 눈, 꽉 다문 입이 내뿜는 아우라가 예사롭지 않다.

#사진2. 1936년 10월 8일 상하이. 목판화 전시회장에서 한 중년의 남자가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폐병으로 뺨이 움푹 패인 탓인지 좀 지쳐 보인다. 헌데, 놀랍게도 그를 바라보는 청년들의 표정이 생기에 넘친다.

루쉰은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아니, 정말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수많은 사진을 남긴 것만은 분명하다. 사진 1이 그 스타트다. 변발을 자르기 전의 사진은 없으니까. 이 사진을 찍은 이후 그는 도처에서, 갖가지 포즈로, 다양한 사람과 사진을 찍었다. 사진 2는 죽기 열흘 전, 살아서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볼 때마다 깊은 울림을 주는 컷이다. 물론 거기서 끝은 아니다. 혼백이 그의 몸을 떠난 직후의 모습을 비롯하여 대규모 군중이 운집한 장례식장의 장면까지 이후에도 그는 수많은 사진을 남겼다.

그의 시대는 서세동점의 파고 속에서 무술정변, 의화단의 난, 청일전쟁, 러일전쟁, 신해혁명, 5·4운동, 대장정, 만주사변 등 그 이름도 ‘찬란한’ 역사적 사건들이 이어진 격동의 시기였다. 그렇다고 그가 이 시절로부터 비껴 서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도주하듯 고향 샤오싱을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귀국한 이후에도 베이징에서 상하이까지 쉼 없이 움직였다. 게다가 당시 사진을 찍는다는 건 얼마나 대단한 행사인가. 카메라 자체도 드물뿐더러 사진사가 있어야 하고 긴 시간 초점을 맞추고 펑 터지는 굉음을 내고.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나 많은 사진을 남겼다. 나르시스트라서? 명성을 남기려고? 헐~ 루쉰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낱말들이다. 그러니 아이러니라 할밖에.

하긴, 그의 사상과 글 자체가 아이러니 투성이다. 가벼운 터치엔 희미한 ‘썩은 미소’를 야기하지만, 한걸음만 더 들어가면 바로 선문답이다. 입구도 없고 출구도 없는 은산철벽!

‘희망’은 창녀다!
▎1932년 늦은 가을 베이징사범대 소운동장에서 강연하고 있는 루쉰. / 사진·중앙포토
“나의 마음은 아주 적막하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평안하다. 애증이 없고 애락이 없고 색깔도 소리도 없다.”(‘희망’, <들풀>, 이하 루쉰의 글은 모두 그린비출판사의 ‘루쉰문고’를 참조했음을 밝혀둔다) 적막, 그것은 그의 글쓰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출발은 아마도 그 유명한 ‘환등기 사건’(자세한 내용은 ‘외침’ 서문을 참조할 것)부터였으리라. 센다이 의학전문학교 시절, 루쉰은 환등기를 통해 중국인들의 ‘얼빠진’ 표정을 목격하였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학년이 끝나기도 전에 루쉰은 의사의 길을 접고 도쿄로 돌아온다. 그래도 그때의 적막은 그렇게 사무친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문예를 통한 정신개조라는 끈은 잡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신해혁명 이후 그는 깊은 적막에 빠져든다.

신해혁명이 군벌들에 의해 좌절된 시절 그는 베이징의 소흥 회관에 머물렀다. 귀곡산장같이 음산하던 그곳에서 그는 옛 비문을 베껴 쓰는 데 몰두했다. “전에는 내 마음도 피비린내 나는 노랫소리로 가득하였다. 피와 쇠붙이, 화염과 독기, 회복과 복수. 헌데 문득 이런 모든 것이 공허해졌다. 때로는, 하릴없이, 자기기만적 희망으로 그것을 메우려 하였다. 희망, 희망, 이 희망의 방패로 공허 속 어둔 밤의 내습에 항거하였다. 방패 뒤쪽도 공허 속의 어둔 밤이기는 마찬가지이건만, 그런, 그런 식으로, 나는 내 청춘을 줄곧, 소진하고 있었다.”(‘희망’) 그때 들려온 헝가리의 애국시인 푀퇴피 샨도르의 ‘희망의 노래’.

희망이란 무엇인가? 창녀.

그는 누구에게나 웃음짓고, 모든 것을 준다.

그대가 가장 큰 보물-

그대의 청춘을 바쳤을 때, 그는 그대를 버린다.


“아, 얼마나 절망이 깊었으면…”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의 적막은 그런 손쉬운 이분법을 간단히 봉쇄한다.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이것이 그가 도달한 결론이다. 희망과 함께 절망도 사라졌다. 하여, 그는 평안하다. 그게 말이 되나? 물론 언어도단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취하고자 하는 바다. 희망을 둘러싼 그 어떤 담론의 입구도 봉쇄해버리는 것.

격동의 시절, 선각자들은 늘 말한다.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결국은 우리가 승리할 거라고. 지금도 지겹게 반복되는 메아리다. 루쉰은 그 허망한 메아리를 향해 비수를 꽂은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살지? 희망도 절망도 없는 그 경계에서 살 길을 구하라! 첫 번째 은산철벽!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가 이상하다. 점점 더 집요하게 나를, 내 몸뚱아리를 노리는 것 같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만사는 모름지기 따져봐야 하는 법. 밤새 역사책을 뒤적여봤더니 “이 역사책에는 연대도 없고, 페이지마다 인의니 도덕이니 하는 글자들이 비뚤비뚤 적혀 있었다.” 그럴 테지. 중국은 찬란한 문명국가니까. 하지만 요리조리 뜯어본 결과 글자들 틈새로 웬 요상한 글자들이 드러났다. 다름아닌 ‘식인’이 그것이다. 맙소사! 중국의 4000년 역사는 사람을 먹어온 식인의 역사였다. “반고가 천지를 개벽한 이래 줄곧 잡아먹다가 역아의 자식까지 이르렀고, 역아의 자식부터 줄곧 잡아먹다가 서석림까지 이르렀고, 서석림부터 줄곧 잡아먹다가 늑대촌서 붙들린 자까지 이르게” 되었고, 심지어 “작년 성 안에서 죄인을 참살했을 때, 폐병쟁이들이 찐빵으로 그 피를 찍어 핥아 먹기도” 했다. 그럼 나는? “공교롭게도 형이 집안일을 관장할 때 누이동생이 죽었다. 저 자가 음식에 섞어 몰래 우리에게 먹이지 않았노라 장담할 수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이동생의 살점 몇 점을 먹지 않았노라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젠 내 차례인데….”

역사는 ‘식인’, 민중은 ‘또라이’
▎상하이 거리에 붙어 있는 루쉰의 글귀. “눈썹 치켜세워 많은 사람들 손가락질에 차갑게 대하지만, 고개 숙여서는 기꺼이 아이들의 소가 되리라”라는 뜻이다. 적과는 비타협적 투쟁을 하되, 청년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다. / 사진·중앙포토
루쉰의 데뷔작 <광인일기>의 줄거리다. 서구의 도래와 함께 중국의 앞날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었다. 이때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은 역사 바로 세우기! 그래야 외세에 맞서 민족적 주체성을 수호할 수 있으므로. 근대 민족주의가 탄생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루쉰의 길은 싹수부터 다르다. 4000년 중화문명은 찬란하기는커녕 먹고 먹히는 ‘식인의 역사’일 뿐이다. 여기서 ‘식인’은 약육강식이나 권력투쟁의 수사학이 아니다. 정말로 살점을 피에 찍어 먹는 행위를 뜻한다. 실제로 당시까지도 정치범을 처형하면 그 시체를 그렇게 먹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역사를 그렇게 암울하게 그리면 어떡하나?라고 하면 루쉰은 말하리라. 사실이 그런 걸 어떡하냐고. 자신은 그저 ‘있는 그대로’ 썼을 뿐이라고. 이것이 그가 적막 속에서 벼리고 벼린 시선이다. 이 시선의 예봉을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식인의 역사에는 예외가 없다. 봉건잔당과 군벌, 부르주아 반동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과 가족, 나 자신조차 식인의 욕망으로 그득하다. <광인일기>의 마지막 구절, “사람을 먹어본 적 없는 아이가 혹 아직도 있을까?/ 아이를 구해야 할 텐데….”

과연 그런 아이가 있기나 할까. 만약 있다면 그들에 의해 역사가 다시 쓰여지리라. 이름하여 역사적 주체가 그것이다. 국민, 민중, 노동자/농민, 프롤레타리아트 등등. 공화주의, 민족주의, 공산주의 등으로 이어지는 정치 이념들이 내세운 주체들이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식인’이라는 이 수천 년 묵은 업장에서 자유로울까? 그에 대한 루쉰의 응답. 아Q를 보라!

아Q는 동네 사당에서 홀로 기식하는 날품팔이다. 일손이 필요할 때 빼고는 그의 존재감은 제로다. 약골이라 동네 깡패들에게 늘 얻어터진다. 이런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아Q가 채택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정신승리법’이다. 실컷 두들겨 맞고 버러지라고 경멸을 받은 뒤, 십 초도 안 되어 아Q는 흐뭇해하며 승리의 발걸음을 돌린다. 자기야말로 자기를 경멸할 수 있는 ‘제일인자’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여기서 ‘자기 경멸’이란 말을 제외하면 남는 건 ‘제일인자’라는 것. 노름판에서 한판 대박을 터뜨리고도 막판에 다 잃어버리자 이번에는 얼마간 실패의 고통을 맛보았다. “그래도 그는 이내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두세 번 자기 뺨을 힘껏 때렸다. 제법 얼얼하니 통증이 왔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평안해지기 시작했다.”(<아Q정전>)

오죽 살기가 어려우면 저러겠어,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속이 거북해진다. 루쉰이 노리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 그렇게 녹록지 않다고. 그러니 그렇게 쉽게 떠들어대지 말라고. 아Q는 약자 중의 약자다. 대개의 혁명문학에 등장하는 약자들은 순결하다. 지배계급의 탄압을 뚫고 혁명의 주체로 우뚝 서거나 아니면 거룩하게 희생되어 혁명의 별이 되거나. 하지만 아Q는 무식한 데다 비열하기 이를 데 없다. 한마디로 대책 없는 ‘또라이’다. 세계 혁명문학가 중에서 인민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풍자한 예가 또 있을까.

그럼 아Q는 대체 어쩌다 저 지경이 되었나. 그러면 대개 이렇게 말한다. 봉건적 잔재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서, 교육이 부족해서, 타고난 약골이라, 등등. 천만에! 오히려 거꾸로다. 아Q 같은 하층민의 습속이 저럴진대 나머지 계급이야 말해 무엇하리.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고매한 인물들은 한술 더 뜬다. 정신승리법 대신 허세와 위선에 더 능할 뿐이다. 루쉰의 눈에는 이념과 계급을 뛰어넘어 도처에 ‘아큐’고, 하나같이 ‘아큐적’이다. 그럼 역사는 대체 누가 이끌어가지? 두 번째 은산철벽!

혁명, 지옥의 판타지
▎1998년 11월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국가주석이 루쉰이 청년시절을 보낸 센다이(仙臺)의 도후쿠(東北) 대학을 방문, 중일 우호를 강조한 자작 한시를 전달하며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그러니 혁명을 해야 한다. 맞다. 저 지독한 노예근성과 끔찍한 습속을 전복하는 근원적 혁명! 하지만, 누구도 이런 혁명을 원하지 않았다.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그가 죽자 군벌들이 발호하면서 다들 자신이 혁명의 주체라 주장했다. 하나같이 천국을 약속했지만 사실은 ‘지옥의 통수권’을 둘러싼 투쟁에 불과했다. 루쉰이 보기에 그때 혁명이란 거대한 판타지에 지나지 않았다.

아Q에게 혁명당은 반란을 일삼는 무리들이며 반란이란 곧 고난이었다. 그래서 줄곧 통절히 증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이것이 백 리 사방 이름이 알려진 거인나리까지 벌벌 떨게 만들었다니 그로선 ‘신명’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 갖고 싶은 건 모두가 내 거라네. 맘에 드는 년은 모두 내 거라네.” 그랬다. 아Q에게 혁명이란 미워하는 이들을 무릎 꿇게 하고 마을의 여자들을 제멋대로 농단할 수 있는 찬스였다. 하여, 기를 쓰고 혁명당에 들어가 개선장군처럼 마을로 돌아온다. 그렇게 설치다 결국 혁명의 희생양이 되어 자신의 영혼을 물어뜯는 군중들의 시선 속에서 죽어간다. 마침내 정신승리법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런 혁명으로 아Q를 바꿀 수 있다고? 식인의 역사를 청산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리고 식인의 역사와 아Q의 습속이 해방되지 않는다면, 그 혁명은 무조건 가짜다! 니체와 바이런, 불교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그럴 수도 있다. 대개 이런 경우, 산정으로 후퇴하거나 미학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하지만 루쉰은 달랐다. 그토록 래디컬(radical, 근원적이고 급진적)한 입장을 견지했음에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뿐더러 쉬지 않고 투창을 치켜들었다. 그러니 얼마나 적이 많았겠나. 국민당 파쇼정권의 관료들을 비롯하여, 거기에 아부하는 문인 지식인들―특히 모더니즘, 상징주의, 자유주의 등 서구편향에 물든 인텔리들―과 좌익소아병에 걸린 좌파문인들에 이르기까지. 루쉰이 주력했던 싸움은 전자보다 후자였다. 전자야 쉽지 않은가. 욕망의 동선이 빤히 보이니까. 후자는 다르다. 늘 혁명을 입에 달고 살뿐더러 공산당을 등에 업고 음모와 배신을 일삼는다. 이들의 치부는 들추기도 어렵고 드러내기도 힘들다. 국민당 정권의 탄압이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주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당시는 전운이 감도는 시대가 아니었던가. 요컨대 국민당과 공산당, 일본과 중국, 서양과 동양, 정치와 문학, 이상과 현실 등이 중첩되는 참으로 복잡한 형세였던 것. 이럴 땐 대체 어떤 자세로 싸워야 하지? 비스듬히 자세를 잡아야 한다. 사방의 적을 동시에 꼬나볼 수 있도록. 단 한 놈도, 한 터럭의 허튼 짓도 용서하지 않기 위해서. 그를 “모로 선 전사”라고 부르는 이유다.

물론 그도 한때는 혁명에 대한 열망을 불태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신해혁명 이후 그는 혁명이 어떻게 순식간에 반혁명이 되는지, 혁명가들이 어떻게 졸지에 변절자가 되는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처음엔 봉건주의가 문제야,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엔 부르주아적 의식 때문이야, 혹은 외세의존적이라서, 그렇게 혁명에 대한 판타지를 키우다 보면 결국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도달한다. 하지만 루쉰은 그런 식의 교리와 약속을 믿지 않았다. 계급과 당파성보다 훨씬 더 심오한 건 기질과 습속이었다. 정치체제와 권력구조를 바꾼다고 해서 과연 그 지독한 노예근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기에 공산당이 대세가 된 이후에도 그는 끝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국민당의 탄압에 맞서기 위해선 저항세력의 연대가 필요한 그 시점에도 그는 좌파문인들의 영웅심리를 폭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만주사변의 발발로 항일을 위한 통일전선이 절실했던 그때에도 그는 민족주의의 함정에 결코 빠지지 않았다. ‘이민족의 노예’가 되는 것이 싫다고 ‘같은 민족의 노예’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지금의 좌익 작가들이 아주 쉽게 우익 작가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런시엔즈, <인간 루쉰>, 323쪽)

1930년 3월 2일, 좌련 창립대회에서 루쉰이 한 연설의 서두다. 당시 그는 좌련의 대표로 추대되었다. 공산당원도 아니고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면서 좌련의 수장이 된 것도 특이하지만, 저 황당한 연설은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단지 조직의 강령에 의지한 운동이란 결단코 아Q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

부디 먼지처럼 흩어지기를!
▎중국 샤오싱 루쉰 생가 앞에 설치된 초대형 루쉰 벽화. 페병으로 사망했을 때 그의 관에는 ‘민족혼’이라는 글씨가 쓰인 천이 덮였다. / 사진·중앙포토
미래를 위해 좀 참으라고? 뭣 때문에? 그렇게 해서 혁명이 성공한다 한들 그것은 이 지옥을 저 지옥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 고로, 미래는 없다! 조직도 없고 강령도 없다. 하지만 전략전술만은 분명하다. ‘지구전, 참호전, 산병전’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게릴라였다. 세계혁명문학사에서 가장 고독하고 가장 집요한, 그래서 가장 독보적인 게릴라!

게릴라에겐 사방이 적이고, 일상이 곧 투쟁이다. 안과 밖도 없다. 가장 치열한 전투는 바로 자신을 향하기 때문이다. 아, 그렇다면 혹시 사진 찍기를 즐겨 한 것도 그 때문인가? 카메라를 통해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훈련을 했던 것인가.

“나는 암흑을 향하여 무지(無地)에서 방황할 것이오. 그대는 아직도 나의 선물을 기대하오. 내가 그대에게 무얼 줄 수 있겠소? 없소이다. 설령 있다고 하여도 여전히 암흑과 공허일 뿐이오. 그러나, 나는 그저 암흑이기를 바라오. 어쩌면 그대의 대낮 속에서 사라질 나는 그저 공허이기를 바라오. 결코 그대의 마음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그림자의 고별’, <들풀>)

그는 결코 이름을 원하지 않았다. <광인일기>를 시작으로 죽기 직전까지 쉬지 않고 글을 써댔지만 자신의 글이 먼지처럼 흩어지기를, 불후가 아니라 속후(速朽)하기를 열망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벗과 원수, 사람과 짐승, 사랑하는 이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나는 이 들풀이 죽고 썩는 날이 불같이 닥쳐오기를 바란다.”(<들풀> 서문)

지금은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후세엔 반드시 불멸을 얻으리라, 이것이 대부분의 작가 혹은 예술가들의 꿈이다. 허나, 루쉰에겐 이런 표상이 통하지 않는다. 그에게 글쓰기는 생계고 현존이며 비판의 무기다. 살아남아야 하고, 먹고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싸워야 한다. 다만 그뿐이다! 헌데, 자신의 글이 ‘썩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여전히 ‘식인’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뜻이다. 맙소사! 그러니 바라건대, 부디 자신의 글이 먼지처럼 흩어지기를! 추억조차 되지 않기를! 희망과 절망, 과거와 미래, 기댈 수 있는 모든 기반을 해체하고자 한 것이다. 이름하여, 무지(無地)! 그럼 이제 남은 곳은 백척간두. 여기선 어디로 발을 내디뎌야 하지? 세 번째 은산철벽!

농담삼아 덧붙이면 루쉰의 전투를 지켜보노라면 루쉰이 아니라 루쉰과 논쟁한 이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표하게 된다. 자신을 늘 백척간두로 밀어붙이는 자와 싸우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trotzdem). 이 말은 루쉰의 사상적 젖줄이기도 한 니체가 즐겨 쓴 말이다. 담론의 형세를 한판에 뒤집는 묘수다. 여기서는 반대의 예로 썼다. 그는 먼지처럼 흩어지기를 열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과 글은 티끌이 아니라 우상이 되었다.

1936년 10월 19일 폐병이 그의 생을 앗아갔다. 죽자마자 그의 관에는 ‘민족혼’이라는 천이 덮였고, 정강산에서 대장정을 지휘하던 마오쩌둥은 그를 혁명문학의 전위로 내세웠다. 이후 그는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가 되었고, 문화혁명 때는 마오와 더불어 하나의 정전이 되었다. ‘모주석 왈’, ‘루쉰 선생 왈’, 홍위병들은 오직 이 두 마디만 앵무새처럼 외쳤다고 한다. 수많은 혁명전사가 티끌처럼 사라졌지만 루쉰은 마치 ‘올림포스산 위의 제우스’(린시엔즈, <인간 루쉰>의 서문)처럼 추앙되었다. 세상에, 이렇게 꼬이는 팔자도 있을까? 생시라면 그는 ‘루쉰이라는 우상’을 향해 집요하게 비수를 날렸으리라.

다행인 건 세상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이라는 끔찍한 터널을 통과한 이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바야흐로 세계경제를 주름잡는 위치에 섰다. 그 결과 중국은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공산당 국가가 되었다. <산해경>에 나오는 동물들처럼 기괴하기 짝이 없다. 동시에 이제 마오주의도 더 이상 중국의 비전이 아니다. 대신 문혁 때 땅에 묻었던 공자를 부활시켰다. 3000개가 넘는 공자 아카데미를 세우면서 동시에 공자의 사상을 21세기적 비전으로 구축하는 중이다.

깨달음의 여정-루쉰 온 더 로드
 
아울러 루쉰은 이제 국정교과서에서 사라질 전망이란다. 그가 그리는 세상이 너무 어둡고 칙칙하다나. 그의 적막을 이제야 눈치챈 것인가. 혹여 그의 혼이 구천을 맴돈다면, 이제 비로소 ‘희미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는 우상과 허상의 족쇄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것도 쉽지는 않으리라. 어쩌면 그냥 박제화될지도 모르겠다. 이념의 푯대로 쓰기는 뭣하고, 그렇다고 그의 명성과 카리스마를 외면하기는 아깝고,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이 박제화하는 방식이다. 그 신랄한 야생성은 제거하고 상투적인 이미지만 길이 보존하는 방식으로. 그리 되면 루쉰은 더더욱 교과서적 암기물로 굳어질 것이다. 민족혼, 혁명문학의 전위, 저항과 반역 등등으로. 어쨌든 좋다. 국가와 자본이 어떻게 포획하든 이제 우리는 루쉰을 만날 것이다. 더 정확히는 드디어 그를 만나야 할 때가 왔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루쉰의 시대와 우리 시대는 묘하게 닮았다. 물론 형세는 영 딴판이다. 그때는 격렬한 이분법의 시대였지만, 지금은 서양과 동양, 좌파와 우파는 뒤섞인 지 오래고, 국경도 계급도 아주 희미해졌다. 대신 인간과 기술, 생명과 우주, 물질과 정신 등 무와 유 사이의 경계가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국가간 전쟁이 줄어든 대신 국지전이 빈발하고 모든 일상이 테러가 되었다. 화성까지 길이 열렸건만 현실에선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만만치 않은 역설의 시공간! 대체 어디로 가야 하지? 루쉰은 말하리라. “본디 땅 위에는 길이 없다.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우리도 그런 길을 탐색하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란 감이당, 남산강학원, 규문으로 이어지는 공동체 네트워크를 말한다. 공통점은 ‘수유+너머’에서 분화한 조직이라는 것. 돌이켜보면, 우리는 처음 ‘수유연구실’을 시작할 때부터 루쉰을 읽었다. 그때의 테마는 동아시아의 근대성. 루쉰과 나스메 소세키, 이광수가 주 텍스트였다. 이광수는 투명하고 순진하다. 근대와 서구에 대한 동경을 숨기지 않는다. 그 사춘기적 열광이 이광수 소설의 원동력이다. 그에 비하면 나스메 소세키는 노회한 중년에 가깝다. 한학에 정통했으나 일찌감치 영국유학을 떠났고, 런던 포그 탓인가. 그는 근대의 ‘찬란한 빛’에 눈멀지 않았다. 아니, 근대 너머의 어둠을 일찌감치 보고야 말았다. 근대의 진군 앞에서 소멸되어가는 군상들, 그 내면의 회오리와 번뇌를 주목한다. 하여, 그의 미학은 근대가 저물어가는 지금 훨씬 더 리얼하게 다가온다.

그럼 루쉰은? 한마디로 난감하다. 루쉰에 대한 우리의 선이해는 대개 80년대식 담론의 산물이다. 중국의 국정교과서나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루쉰을 읽는다는 건 그런 낡은 담론을 전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루쉰은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소설보다 더 방대한 분량의 평론서와 잡문집, 그리고 번역서를 냈다. 형식도 자유분방하지만 내용의 편폭도 실로 드넓다. 진화론, 자연과학, 민속, 신화와 전설, 목판화 등등. 마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다고나 할까. 더 놀라운 건 어려운 개념이 하나도 없는데도 도무지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무슨 혁명문학가가 이런 ‘지각불가능한’ 글을 써댔을까? 이건 뭐 전근대도 아니고 탈근대도 아니다. 그럼 읽지 않으면 그뿐이다. 헌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몹시 끌린다는 것. 삼킬 수도 토할 수도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지난 10년 동안 루쉰을 놓지 못했던 이유다.

그렇게 각개약진을 하다가 문득 돌아보니 지난해부터 모든 공동체에서 동시적으로 루쉰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와우~ 이 돌연한 마주침이라니.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루쉰의 평전을 함께 작성해보는 게 어떨까, 이렇게 해서 ‘루쉰 프로젝트’가 발주된 것이다. 프로젝트의 제목은 <루쉰, 길 없는 대지>. 참가자는 고미숙(감이당), 채운(규문), 문성환, 길진숙, 신근영(남산강학원).

지금까지는 계속 루쉰전집과 참고문헌만 읽어댔지만, 이번에는 방법을 좀 바꾸기로 했다. 그가 지나간 길을 실제로 밟아보기로 한 것이다. 코스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샤오싱에서 난징으로 2. 난징에서 도쿄와 센다이로 3. 다시 샤오싱에서 베이징으로 4. 베이징에서 샤먼으로 5.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이 5개의 코스를 각자의 취향에 따라 나누기로 했다. 홀로 완주하기는 너무 벅차서 릴레이를 선택한 것이다. 과연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길이란 워낙 변수투성이니까. 허니, 일단 가보는 수밖에. 루쉰 온 더 로드!

영원한 도망자, 루쉰를 포착하라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 그는 항상 최전선에 있었다. 늘 수배 중이었고 언제든 실종될 수 있는 처지였다. 말하자면, 도망자 신세였다. 처음 샤오싱(紹興)을 떠날 때는 스스로 선택한 도주였지만 후반부 베이징을 떠날 때부터는 목숨을 건 탈주였다. 말하자면, 그가 움직인 길은 일종의 도주로였다. 영원한 도망자, 루쉰! 

허나, 그는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체포된 적도 투옥된 적도 없다. 그야말로 도주의 달인이다. 문득 고대 페르시아 전쟁사에 나오는 스키타이인과 다리우스 대왕 사이의 추격전이 떠오른다. 페르시아 대군의 추격에 맞서 스키타이인들은 늘 ‘하루의 노정’만큼 앞서 나가면서 지상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켰다. 적들의 근거지를 없애버린 것이다. 비겁하게 도망만 가느냐고 비난하자, 그들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도주하는 게 아니라 원래 가려던 길을 갈 뿐이라고.(헤로도토스, <역사> 4권) 루쉰의 도주도 그와 비슷하다. 간발의 차이로 앞서가면서 적의 추격을 따돌리고, 그와 동시에 적들이 기댈 수 있는 표상의 근거지를 계속 해체했다는 점에서. 참 멋지지 않은가?

가장 매력적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그의 무기가 글쓰기라는 사실이다. 그는 140여 개의 필명으로 무려 700여 만 자를 썼다. 그에게 글쓰기는 ‘살아있음’의 유일무이한 증거였다. 우리도 글쓰기를 삶의 비전으로 삼고자 한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글쓰기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밀고 가기에 루쉰보다 더 좋은 지도는 없다.

하여, 이제 우리도 루쉰을 추격할 것이다. 물론 그는 계속 달아나리라. 힘들면 그의 조언대로 잠시 쉬면서 숨 고르기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틈새를 찾아내 다시 쫓을 것이다. 끝내 잡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이 추격전을 즐길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의 심오한 본질 따위가 아니라 그의 전략전술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표상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도주의 기술을, 사방의 적과 대치하면서도 일상을 담담하게 지켜내는 참호전의 전술을 기필코 훔쳐낼 것이다. 혹시라도 거기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가차없이 그를 내팽개치고 우리의 길을 갈 것이다. 애증도 없이 애락도 없이!

고미숙 - 고전평론가. 강원도 정선군에 속한 작은 광산촌에서 자랐다. 고려대학교에서 고전시가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40대 이후 지식인 공동체 활동을 해왔고, 현재는 감이당&남산강학원에서 ‘공부와 밥과 우정’을 동시에 해결하고 있다. 지금까지 낸 책으로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등이 있다.

펌: 감이당 gamid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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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17 09:08
    감이당 홈피 갔다가 퍼왔어요. 마침 동사서독 루쉰도 시작하니, 읽어봅시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