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n

0523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5-19 19:33
조회
446
날씨가 무쟈게 덥습니다. 연구실 사람들은 오늘 공부방에 에어컨을 틀어놓고 옹기종기 앉아 각자 책을 읽고 있는 중.
저는 딱히 게으름을 부린 것 같지는 않지만 이제야 늦은 후기 및 공지를 이렇게 적습니다. 기억력이 막 좋지도 않은데. 쩝.

지난 시간 수업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두 가지 이야기를 떠올려보지요.
하나, 개체적 차원,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인류적 차원, 아니 더 나아가 우주적 차원 — 이 두 차원을 모두 보는 것이 요구된다.
보살이 세계의 무상함을 투시하면서도 이런저런 일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아등바등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계로 또 돌아오는 것처럼.

세미나 때 이런 이야기가 나왔었죠.
인간의 유전자에 가능한 모든 것이 잠존하는 것이 맞다면 인간이 하는 어떤 일도 비인간적인 게 아니다. 자연 안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어떤 일도 반자연적인 게 아닐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외치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지만 사실 세계 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일,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란 없다.
하지만 이런 말에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럼 어떤 일도 해도 되고, 어떤 일에 대해서도 무심하라는 말인가? 윤리적 문제를 고민할 지점은 아예 없는 것인가?

수업 시간에 채운쌤 설명에서 이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과학과 철학을 통해 우리는 개체를 넘어선 관점으로 삶을 볼 수 있지요.
나 하나의 나고 죽음, 이 몸뚱이가 구체적인 일상사에서 겪는 일희일비가 아니라 개체보다 먼저 존재하고 또 영원히 존재하는 자연과 생명의 관점에서 철학자들은 삶을 조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간 읽은 경전들과 과학책들을 통해 삶이란 본질적으로 선악의 저편의 것임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자연은 선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게 아니며, 그보다 먼저 선과 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연 안에서는 부단한 발생과 변이들이 있을 뿐이라는 것, 실체하는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인연 속에서 그렇게 현상되었다 사라진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렇게 있잖아요? 우리는 느끼고 원하고 싸우잖아요?
즉 신체를 받아 태어난 이상 우리는 이 신체에 의해 세계를 감각하고 해석하고 그에 대한 정서를 만든다는 겁니다. 태어난 이상 뭔가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예요.
모든 게 공하다 해도, 자연은 도덕적이지 않다 해도, 개체로서 그 순간을 사는 우리는 특정한 시공간에 개입해야 하고 또 감당해야 합니다.
채운쌤께서 개체 차원을 말씀하셨을 때 그건 도무지 정해진 답 없는 세계에서 무언가 해야 하고 또 하고야 마는 그 존재론적 토대에 대한 것인 듯합니다.
고로 요구되는 것은 개체적 사유와 활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개체적인 것과 전개체적인 것 둘 모두를 보는 것이라는 게 채운쌤 말씀.

가령 일본 원전 사태나 세월호 사태를 생각해볼까요.
자연은 요동치고 삶이란 본디 무상하다는 생각으로 두 사건을 보노라면 대체 이걸 바라볼 때 내 마음의 쿨렁댐이 뭔지 해명도 잘 안 되고, 동요 자체가 문제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까지 이어지지요.
이건 사실 제 이야기입니다. 세계는 공하다는데 왜 나는 이 사건에 심정적으로 붙들려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잘 안 풀리는 거예요.
그러다 얼마 전 문득, 당시 죽음 직전에 있던 각각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세계가 공하고 자시고간에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된 그 순간, 눈앞이 가로막힌 그 순간에 각각의 신체들이 느꼈을 고통, 그 신체가 느꼈을 거부감과 공포, 이 사태에 대한 극도의 부정을.
세계가 공하다는 걸로는 지금 내 숨이 막히는 것, 내가 어딘가 깊은 곳으로 빠져드는 것이 무화되거나 해결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으로나마 그들에 대해 들었을 때 시청자인 내가 느끼는 감정 또한.

세월호 2주기 직전까지도 이게 그저 도취된 감정이입 같은 것 아닌지 잘 모르겠는 상태였는데, 이제 다른 해석을 시도할 수 있겠습니다.
세계 안에 공하지 않은 것이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인간은 어떤 일에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가령 살아 있던 한 생명체가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죽임을 당할 때 그의 몸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을 삶에 대한 (본능적, 근본적)집착과 미련, 죽음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이 붓다의 멸도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한 슬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사유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모든 살해당한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겠죠. (그러니까 저는 그 사건과 관련해 죽인 사람의 업만이 아니라 죽임 당한 자의 업 또한 어마무지할 수 있다는 상상도 해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죽음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미지화함으로써 내 의식에 내가 만들어놓은 사회, 정치, 죽음 등등에 대한 어떤 특정한 상도 있겠고요.

그래서 채운쌤이 두 개의 차원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을 때 제게는 세월호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어요.
개체의 실재적 고통에 대해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우주와 인간에 대한 사유 안에서 조망하는 것이 성인이라면, 붓다는 이런 사건에 대해선 어떻게 말씀했을까 그것도 궁금해졌지요.
세계는 공하지만 그 안에서 신체를 부여받아 사는 개체에게는 실재하는 고통과 공포, 그에 대해 그것을 무화하지 않으면서 어떤 위로와 설법을 들려주셨을까.(법구경에도 물론 몇 개 이야기가 있지만요)

이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두 번째의 인상적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니체의 뇌는 오작동했다!
깨달음이란 다름 아니라 뇌 회로의 변경이며, 이는 <아침놀>에서 니체가 말한 ‘先이해’를 깨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답니다.
그러니까 새롭게 사유한다는 것, 그것은 기존의 사유 회로를 바꾸는 것이며, 이는 뇌가 기존에 작동되던 방식에서 벗어나 교란과 카오스를 경험하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거죠.
실제로 니체는 살아 있는 내내 두통을 앓았다죠. ‘미친’ 라이히와 알튀세, 아르또, 고흐, 울프 등등을 생각해봐도 양식적이고 습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하는 생리적 조건이란 게 있지 않을까 싶어집니다.
물론 만성 두통을 앓거나 조현병 환자 모두가 다르게 사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르게 사유한다는 것은 어찌되었든 육체적 조성의 比를 바꾸는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겠네요.
그러니 책을 읽으면서도 글을 쓰면서도 머리가 아프지 않은 당신, 머리가 정말로 지끈거릴 때까지, 머리 꼭대기가 펄펄 끓을 때까지 생각을 멈추지 마시길. ........에, 물론 저도.

다음 시간에는 다시 금강경입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읽고 생각한 뒤 만나요. ^^
순서가 모두 돌아가 간식은 다시 제가 합니다. 후기는 현옥쌤께서 올려주셨으니 참고하셔요.

그럼 다음 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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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23 14:07
    아, 그날도 말씀하셨던 문제를 드뎌 푸셨네여~ 오랫동안 고민하셨던 것 같은데... '자신의 죽음을 사유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채 살해당한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긴긴 시간을 별 일 없이 살면서 결코 그 문제를 돌아보지 못하는 삶들도 사실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일 듯도 해요... 이나저나 저는 이제 죽음 자체보다는 그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사유해야 하는 것인지,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무엇과 싸워야하는 것인지가 더 헷갈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