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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생] 빨간머리 앤

작성자
선민
작성일
2016-06-16 05:32
조회
1104


[길 위의 생] 빨간머리 앤

캐나다 하면? 빨간머리 앤! 저는 추억의 책장을 넘기듯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빨간머리 앤을 읽고 있습니다. 사실, 몇 장을 채 읽기도 전에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작품의 첫 3장까지가 다 놀라는 이야기거든요. ‘제1장 레이첼 린드 부인이 놀라다’, ‘제2장 메튜 커트보트가 놀라다’, ‘제3장 마릴라 커트보트가 놀라다’ 모두를 놀래키면서, 앤은 그린 게이블즈로 걸어들어 갑니다. 오늘은 이 ‘놀램의 3단계’가 저를 놀래켰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1. 당신을 놀래키려고요

「빨간머리 앤」의 도입부는 레이철 린드 부인의 집에서 시작됩니다. 캐나다 동쪽 끝머리에는 ‘에드워드 왕자님’이라 불리는 쬐그만한 섬이 하나 있는데요, 그 섬에 또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이름하야 ‘에이번리’. 이 마을 길목에 자리잡은 한 농가에서는, 동네의 온갖 사건 사고를 꿰고 사는 린드 부인이 오늘도 창밖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린드 부인의 심문을 통과하지 않고 이 마을에 들어갈 수는 없어요. 딱 그 시대의 풍문과 편견으로 무장된 분이십니다. ‘상식’ 밖의 일은 절대로 참지 않는!!

그러니 놀랄 수밖에요. ‘고아를 입양하겠다고? 마릴라는 그런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결정을 왜 한 거야? 나랑 의논도 없이?’ 1908년 무렵 캐나다나 유럽에서는 집안의 일꾼으로 고아원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렇지만 린드 부인은 “멍청하고 덜떨어진 프랑스 아이”, “런던 거리에서 떠돌던 아랍 애”, 도무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뭘 하다 오는지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친구의 집 안에, 나아가 ‘우리 마을’에 들어오는 것이 불쾌하기만 합니다. ‘‘그런 애’가 초록색 집을 불태워버리거나, 우물에 독을 타도 난 몰라!”

저는 린드 부인의 도플갱어를 한 사람 더 알고 있습니다. 바로 카프카의 『소송』 도입부에 나오는 이웃 노파입니다. 『소송』에서 이 노파는 딱 한번밖에 출현하지 않습니다만, 그 존재감은 작품 전체를 흐릅니다. 두 작품 모두에서 이 늙은 여성들은 ‘우리의 이웃’을 상징하지요. 집 안에 틀어앉아 창문 밖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선들, 상식으로 ‘우리’의 울타리를 세우고 또 지키는 습속의 문지기들. 앤은 소박한 시골마을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켜야 할 갖은 규범, 즉 도덕을 켜켜히 두르고 있는 이상한 마을에 들어섰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메튜 아저씨가 놀랍니다. 아저씨는 여자라면 딱 질색이시죠. “수수께끼같은 여자라는 피조물이 남몰래 자신을 비웃고 있을지” 몰라서예요. 스무살 때부터 ‘핑크’ 빛을 두른 모든 것으로부터 등을 돌린 이 노인 앞에 하는 말마다 수수께끼인 ‘빨간’ 머리 앤이 나타난 셈입니다. 앤은 핑크빛 이야기로 메튜 아저씨를 서서히 물들입니다. 이런 앤의 말을 들었을 메튜 아저씨의 표정을 상상해보세요. 무슨 기분이, 뭐 어쨌다고?

          “오늘 밤 아저씨가 저를 데리러 오지 않으면 기찻길로 내려가, 저기 모퉁이에 보이는 커다란 산벚나무에 올라가 밤을 보낼 생각이었어요. 그랬더라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을 거예요. 하얀 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산벚나무 위에서 달빛을 받으며 잠을 자면 정말 멋질 것 같지 않나요? 대리석으로 꾸민 방에서 지내는 기분이지 않겠어요?”

린드 부인이 풍문과 편견으로 똘똘 뭉쳐있는 세상을 의미한다면, 메튜 아저씨는 그런 도덕적 세계는 어색하고 그 밖의 세계는 두려운, 어정쩡한 경계인이십니다. 이 경계는 무감(無感)하지요. 아저씨는 안으로나 밖으로나 철통으로 자신을 방어합니다. 그래서 그의 울음과 웃음을 본 이가 아무도 없었답니다. 이런 메튜 아저씨가 앤의 말에 귀 기울인다니요? 아저씨는 앤의 이야기가 산으로 가면 갈수록 더 크게 웃게 됩니다. 아무런 맛이 없던 세상과 쿨하게 결별하시게 된 거죠. 작고 마른 앤의 손을 잡고서요.

세 번째로 놀라는 인물은 마릴라 커트보트, 메튜 아저씨의 여동생입니다. 아줌마는 현실주의자! 온통 원리 원칙뿐이시죠. 농사를 거들 남자 아이도 아니고, 쓸모없는 공상이나 읊어대는 여자 아이가 마음에 들 리 없습니다. 게다가 앤은 기도하는 법조차 모르는 제멋대로입니다. 그런데 마릴라 아주머니조차도 앤 앞에서는 무장해제 됩니다. 아주머니도 빨강 머리였으면 착한 사람보다는 나쁜 사람 되기가 쉽다는 걸 이해하셨을 거예요.’ 하며 원리의 바깥을 들이밀고, 기도는 왜 무릎을 꿇고 해야 하나요? 저라면 혼자 드넓은 들판에 나가거나 깊은 숲 속에 들어가서 하늘을 올려다 볼 거예요라며 원칙이 왜 원칙인가에 대해 생각헤보게 했기 때문입니다. 천진난만한 앤의 말을 듣다가, 듣다가, 마릴라는 알게 됩니다. ‘모두의 규칙’을 순순히 따르는 것보다는 ‘자신의 원칙’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요.

굶고 무시 받던 작은 존재, 자꾸만 아름다운 것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는 특이한 존재. 마릴라는 원칙 밖을 뛰어다니는 앤의 그 모습 그대로가 소중해집니다. 그리고 그 ‘말도 안되는’ 존재를 조금이나마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입양을 결정하지요. 린드 부인과 메튜 아저씨가 앤의 발랄한 상상력에 놀란다면, 마릴라 아주머니는 자기 안에 잠자고 있던 연민, 모든 원칙을 초월한 순수한 애정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2. 우리가 고아였을 때   

이제 제가 놀랄 차례입니다. 이 작품은 어마무시한 말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8할이 대화입니다. 그 대화의 대부분은 열 살짜리 앤의 말입니다. 또, 소녀의 말은 온통 나무와 숲, 호수와 길에 대한 감탄과 질문입니다. 앤의 제일 중요한 일과는 산책입니다. 앤은 들꽃을 살짝 밀고 가는 바람의 온도와 습도를 느낍니다. 달빛을 받고 서 있는 사과나무의 꿈을 이해하지요. 이렇게 산책 좋아하고 말 많은 사람은 저 위대한 프루스트 씨 이래 처음이었습니다. 문득, 대단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콩브레에서 스완네 집 쪽으로 가는 길에(『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루스트 씨와 앤이 서로를 단박에 알아보고, 곧바로 함께 걷기 시작하는 풍경! 천천히 걷다가 돌연 멈추어 서서 풀냄새를 맡는 신사와 소녀. 두 사람은 자신을 통과하는 만물들의 천차만별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 나누겠지요. 음. 둘 사이에는 또 다른 공통점도 있군요. 앤도 프루스트 씨도 동물보다는 식물의 세계를 깊이 음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아 소녀 앤이 에드워드 왕자 섬으로 들어옵니다. 상식을 뚫고, 감각을 일깨우고, 원칙을 허물면서. 그런데 사실 모든 인간이 그렇게 생을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이가 이 세상에 올 때 모두 고아처럼 옵니다. 기억없이, 약속없이. 양육자가 남자 아이를 원했건, 우직한 성품을 기대했건 간에 제멋대로, 작고 무능한 존재로 생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땅을 느끼고 공기를 마시기 위해 손, 발, 머리, 배, 특히 히프를 쉴새없이 움직이지요. 태어나자마자 걷지 못한다고 해서 아이를 무능하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기고, 뒤집으면서 어깨로, 배로 세상과 접속하는 중인 거예요. 아이는 기쁨도 좌절도 거절하지 않고 다 느끼면서 서서히 두 발로 서게 됩니다.

아이가 맺는 여러 관계의 중심이 꼭 부모인 것은 아닙니다. 앤은 초록색 지붕 집에 머물 수 있느냐 없느냐, 마릴라 아주머니가 자신을 좋아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지금 자기가 서 있는 대지를 완벽하게 인정합니다. 비록 그것이 궁핍과 오해로 채워져 있더라도 말이예요. 이 언덕과 꽃향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죠. 비록 내일 초록색 지붕 집을 떠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앤이 사과나무나 오솔길, 호수에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모든 것에서 인격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앤은 매일이 즐겁습니다. 현관문 밖에는 만나야 할 존재들이 한없이 많거든요. 앞으로 알아야 할 온갖 것들을 생각하면 신나지 않나요?”

『빨간머리 앤』에서 ‘부모’의 역할은 미미합니다. 친구 다이애나의 엄마가 앤을 오해하시는 정도? 특히 앤의 두 양육자는 부성이나 모성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내가 낳은 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 사람 사이에는 소유욕, 의무감, 무엇보다 ‘기대’가 없습니다. 세 사람의 인간관계 속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마릴라와 메튜는 앤의 공상을 ‘틀렸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상상을 하는 앤을 지켜보지요. 앤도 그들에게 투영된 세상의 이치를 발견해 나갑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우연이자 필연인 존재로 서로에게 계속 다가갑니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 부모나 사회의 그물 밖에 놓여 있었을 때, 온 몸으로 만물을 만났을 때. 저는 앤의 무궁무진한 말 속에서 바로 그 때를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었습니다. 장미는 장미여서 정말 좋고, 나는 나로서 정말 완벽했던 그때.

          “저기 좀 보세요. 벌써 들장미가 피었어요. 정말 예쁘지 않나요? 장미는 장미여서 정말 좋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이 작품을 썼던 루시 모드 몽고메리(1874~1942)는 에드워드 왕자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보통의 시골 마을에서 있을법한 일들을, 그것도 모든 연령의 독자를 위해 쓰려고 했습니다. 특히 어린이 책을 많이 썼는데, ‘한 줌의 도덕’도 들어가지 않게끔 쓰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캐나다의 출판인들은 교훈이 들어가지 않는 아동물에 질색팔색 했다고 해요. 1908년에 출판된 『빨간머리 앤』에는 목사님이 주는 중요한 교훈이 들어있기도 하고, 당시 캐나다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인종적 편견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몽고메리가 혼심을 다해 창조하려고 한 존재는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듯, 매사에 감탄하는 한 인간이었습니다.

* 코너 안의 코너! 짭쪼름한 영어의 맛

오흥흥! 앤이 하는 모든 말이 ‘생활 영어’였습니다. 이 장편 소설을 몽땅 소리내어서 읽는다면 정말 영어 회화 공부가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워낙 의문문, 감탄형이 많아서 따라하다 보면 긍정의 화신으로 변신할 것 같기도 합니다. ^^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Isn’t it lovely? 인 것 같습니다. 정말 사랑스럽지 않나요? 정말 좋지 않나요? 정말 예쁘지 않나요? 자, 따라해 보세요~

예문 : Oh, Look. There’s one little early wild rose out! Isn’t it lovely?

Don’t you think it must be glad to be a rose?

Wouldn’t it be nice if roses could talk?

다음과 같이 활용해보겠습니다.

: Don‘t you think it must be glad to be a 無用之無用?

* 위에서 인용한 한국어 번역은 강주헌 옮김(세종서적, 2013), 『빨강머리 앤』을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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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6-16 07:10
    앗, 혼자 막 빠져서 읽다가 마지막에 깜짝놀랐어요ㅋㅋ
    맘 발랄하게 만들어주는 mornig 글이군요.. ^//^!

  • 2016-06-16 09:51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성우의 목소리와 풍광은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지만 정작 어렸을 땐 별로 좋아하지 않았네요. 주인공이 너무 시끄럽고 밝아서... / 그나저나 맘에 드는 구절 "모두 고아처럼 옵니다." "한 줌의 도덕도 들어가지 않게" "장미는 장미여서 정말 좋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