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622 수업 후기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6-24 12:50
조회
491
 
《안티오이디푸스》의 시작점은 혁명적인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고 합니다.
68혁명을 겪으며 질문한 것 “어째서 그토록 혁명적이었던 욕망이 순식간에 사그라질 수 있는가. 반동으로 돌변할 수 있는가.”
이 지점서 들뢰즈는 혁명을 다시 사유합니다.
혁명에서 본질적인 것은 정말 이념, 이성, 의식의 지점인 것인가. 혁명의 핵심은 오히려 그런 것들로 환원되지 않는 지점에 있는 것은 아닌가. 무엇보다 욕망이 내포하는 언어화되지 않는 목소리들을 혼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는 욕망의 존재론을 표명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체를 분석한다고 해요.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의 존재론이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존재를 결여태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존재는 그 자체 생산적이고 무구합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혁명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결여를 채우는 것, 부정을 긍정상태로 바꾸는 것, 주체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혁명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혁명이란 또 무엇인가...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욕망과 다릅니다.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은 항들 간의 관계 속에서 규정됩니다.
‘나’가 특정 ‘대상’을 욕망한다고 봅니다. 언제나 ‘~에 대하여’ 곧 부재하는 어떤 것에 대하여 욕망이 작동된다고요.
정신분석학에서 욕망은 괴로운 것이고 ‘잘’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 그것은 언제나 적합한 대상들을 향해야 하고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에, 욕망에 결여를 도입한 것 - 들뢰즈가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문제삼고 있는 부분.

오이디푸스 삼각형에에 따르면 ‘나’는 ‘어머니’를 욕망하지만 이것은 ‘아버지’라는 존재로 인해 충족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는 ‘아버지’라는 초월적 기표를 내면화함으로써 근본적 결여를 갖게 되고, 더불어 사회화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은 이제 가정 밖에서 또 다른 삼각형을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해소 - 물론 근본적으로는 결핍인 채로 - 되는 것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 오이디푸스 삼각형이야말로 가상입니다. 욕망은 대상을 전제로 하지 않지요. ‘아이’가 ‘엄마’의 젖꼭지를 무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부분대상들의 접속만이, ‘무엇’으로 고착될 수 없는 흐름만이 있다고요.

그렇다면 어째서 욕망이 ‘대상’에 대하여 작동되게 되고 (혹은 그렇게 보이며) 결여를 매우는 방식으로 요청되는 것 같은가.
결여는 주입되고 내면화되는 것이라 했습니다만 저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주사 맞는 것도 아닌데 대체 어디서 어떻게 결여가 주입되는거지, +1이 어디서 오는거지, 뭐 이런 베이비스러운 생각을 했더랬슴미다....-.-;;;
결국 갖가지 사회적 습속들 속에서 오이디푸스는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겠지요.
‘가족’이 그 대표적입니다만 ‘가족’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채운샘은 사제메커니즘을 이야기해준 것을 보면 오히려 어떻게 한 사람의 사고방식 자체가 존재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나 아프고 힘들어요. 쟤 때문이에요. 이 몹쓸 인생 때문이에요.” “너는 나 없으면 안돼.”
수업 때 이런 대사를 읊어주셨지요.
‘나는 괴롭고 이 괴로움은 해소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탓은 저이에게 있다. 이 생에서는 해결 불가능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 사람은 자기를 결여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무엇인가 다른 권위가 필요하고, 이 상태로는 살 수 없으니 더 나아져야 하고…
이 두려움과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본래 인간이 결여라서가 아니라 ‘결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결여를 생산하는 갖가지 시스템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 보기에 존재에서 본질적인 것은 욕망이며 이 욕망은 결여를 모릅니다.
욕망은 생산적이다!...
이 말은 ‘욕망’이 활동하여 그 결과 ‘무엇인가’를 생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고 활동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이 모든 일에 의식으로는 채 포착할 수 없는 접속들이 있으며 이 자체 과정이자 생산입니다.
‘이 욕망’, ‘저 욕망’ 이전에 어떤 흐름들이 부단히 나 자신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그 일련의 과정들이 생산과 다른 것이 아니다,로 이해했습니다.

욕망 그 자체 생산적이지만 사회적 삶 속에서 통상 결여를 출발점 삼아 행동하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목표 삼고, 또 이유 삼아 말하고 행동하지요. 또, 일들은 대상의 문제로 이해되고요. 이 모든 일이 존재 부정에 힘쓰고 있는 것... 어떻게 이 굴레를 빠져나올 수 있는가.

꽃들의 결백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꽃들의 생식은 암컷+수컷의 접속이 아니지요. 책에서는 한 여성의 수컷부분과도, 다른 남성의 암컷 부분과도, 아니면 다른 남성의 수컷 부분 등과도 소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칭을 모르는 꽃들의 생식에 어떤 죄의식이 들어설 수 없습니다.
꽃들만이 아니라 자연의 모든 사물들이, 인간 역시 ‘인물’을 모르고 ‘인칭’을 모르고 접속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접속에 소유관념을 부여합니다.
채운샘은 이 지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죠. - 욕망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방식 자체가 괴로운 것. 욕망에 대해 상을 만들게 됨으로써 사람은 스스로 붙들 수 없는 상황, 가질 수 없는 대상, 정서 등으로 인해 괴롭게 됩니다.

감정에 그토록 끄달리게 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슬픔, 즐거움…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일종의 힘의 차원이 부단히 자기를 가로지르며 자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데요. 사람은 이를 특정한 방식으로 포착하고 붙들어 두려고 합니다. 감정 역시 그렇게 생기고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욕망이 흘러가지 못하게 하는 것 - 실제로 가족을 이루고 있느냐와 무관하게 소유에 집착하고, 자기 영토를 만들고픈 움직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결국 자기를 부정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접속하느냐에 따라 존재는 달리 생성될 수 있는 것. 돌연변이의 출현 - 한번도 되어본 적 없는 내가 되는 것은 실은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지요.
하지만 어떻게?! 수업 때도 이 질문이 나왔었습니다만 일단 패스합니다.
어째서 단일한 방식으로밖에 접속하지 못하는가 혹은 익숙한 방식으로 밖에 행동하지 못하는가, 이 문제는 계속 돌아올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초라하고 가난하게 느껴질 때조차 무구하고 충만하다는 것은 즐거운 소식입니다. ‘다른 것’을 붙들려 스스로를 들볶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요. 가난하다는 것은 뭔가. 돈 없고 빽 없도 뭣도 없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 없음을 출발점 삼아 행위하려는 자들이라고 달리 말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말 많은 날인지 길어졌어요.
한 주 또 잘 보내시고요. 담 주에 만납시다!
더위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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