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629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6-25 14:29
조회
508
지난 시간에는 클레어 콜브룩의 <들뢰즈 이해하기>의 몇 페이지+세 가지 종합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일단 앙띠에서 반복해 나오는 논의들을 한 번 더 정리해볼까요.

하나, 욕망은 부단히 흐르고, 절단하고, 접속하고, 생산한다.
욕망은 어떤 대상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욕망 자신을 통해 새로운 욕망을 재생산하는 과정 자체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저것을 욕망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욕망은 대상과의 접속 이후 다시 새로운 것과의 접속을 통해 꿈틀꿈틀 변한다는 거죠.
가령 성적 욕망의 경우 흔히들 생각하듯 관계 성취 후 제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욕망으로 이행된다는 것.
이것을 그저 하나의 쾌감 이후 더 큰 쾌감을 원하는 것, 보다 강렬한 쾌감을 추구해 변태적 성욕으로 발전하는 것이라 이해한다면 곤란한 일입니다.
채운 쌤이 몇 번이고 강조한 바대로 욕망은 애초 하나의 코드에 포획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늘 가시적 대상, 사회적으로 정의된 대상을 넘쳐흐릅니다.
‘나는 그 사람을 원해’라고 우리는 쉬이 믿지만 들뢰즈 말대로라면 그것은 나의 부분대상이 다른 부분대상을 절단, 채취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이를 통해 제3의 욕망이 생산된답니다.
그래서 채운 쌤께서 욕망은 곧 ‘차이’라 하신 듯합니다. 욕망은 부단히 차이를 생성하는 차이 자체입니다.

둘, 정신분석은 욕망을 하나의 틀에 집어넣는다.
사회체 안에서 욕망은 언제나 특정한 방식으로 포획됩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채 포획되지 못한 욕망들은 언제나 회로를 넘쳐흐른다지요. 들뢰즈는 이에 대한 표현이 분열증이라 말합니다.
문제는 욕망과 정신을 다루는 정신분석학이 실은 가장 상식에 부합되는, 즉 현 사회체에 부합되는 방식으로 욕망을 코드화한다는 데 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정신분석은 외삽된 결여와 금지로 형성한 삼각형 틀 안에 욕망을 집어넣고, 자신의 모든 환자들에게 ‘오이디푸스화 될래, 아님 신경증환자가 될래’라고 묻는다지요.(이중구속)
채운 쌤에 따르면 정신분석은 이 같은 방식으로 가족(자본주의 사회체의 최소단위)을 관리하고 분열자를 사회에 복귀시킨답니다.(<광기의 역사>를 읽을 때도 했던 생각인데, 그렇게 치유되고 복귀되는 게 과연 분열자들에게 좋은 일일까)
들뢰즈가 정신분석에 이토록 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와 정신분석 사이에 명백한 친연성이 존재한다는 거죠.
정신분석은 자본주의의 최소 단위를 공고히 하고, 자본주의의 문턱을 방황하는 사람들을 다시 안쪽으로 밀어넣습니다.
지난 시간 채운쌤 표현에 의하면 정신분석은 ‘인간’을, 사회 속의 인간을 생산하고자 합니다.

넷, 혁명이란 무의식을 바꾸는 것이다.
정신분석에서도 분열분석에서도 문제 삼는 것은 욕망과 무의식입니다. 하지만 욕망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둘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전자는 체제 유지를 효과로 갖고 후자는 여태 들어본 적도 없는 혁명론을 외치지요.
들뢰즈에 따르면 혁명에 있어 근본적 문제는 이데올로기 차원에 있지 않습니다. 혁명의 완수는 사회 제도의 변혁에 있지 않습니다.
개인의 욕망이 곧 사회적인 것인바, 그렇다면 개인의 욕망을 바꾸는 것이 곧 사회를 바꾸는 것이요, 거꾸로 사회를 바꾸는 것은 먼저 개인의 욕망을 바꾸는 것이어야 합니다.
특정 욕망을 생산케 하는 배치를 묻고, 그것을 바꾸는 것 -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생각하는 혁명이랍니다.
제도가 아니라 내 무의식을 바꾸는 것,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내 욕망을 문제 삼는 것, 내 욕망을 문제 삼기 위해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포획하고 재생산하는 사회기계를 문제 삼는 것, 그것이 혁명입니다.
고로 분열분석은 그 자체로 혁명의 과정이 됩니다. 내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명상 수행, 그것이 곧 혁명의 과정이 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번에 가장 이해되지 않은 것은 ‘종합’이었습니다.
<차이와 반복>에서 세 가지 종합이 나올 때 생긴 의아함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듯합니다.
어째서 종합인가? 누가 종합하는가? 무엇을 종합하는가? 어디서 종합되는가? 내내 갸웃거리고만 있습니다.

지난 시간 채운쌤께서 설명해주신 바대로 이해하자면 종합은 일종의 해석입니다.
개체는 자신이 지각한 것을 일정하게 종합하지 않고는 세계를 구성할 수 없으며 행위할 수 없습니다.
구성된 세계, 그것은 내가 종합한 세계, 내가 해석한 세계에 다름 아닙니다.
들뢰즈는 종합을 크게 세 층위로 구분합니다만, 채운쌤에 따르면 이는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동시적 진행으로 이해되어야 한답니다.
(굳이 구분해 생산/등록/소비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정신분석 및 자본주의의 어떤 지점을 환기시키고 그에 맞서는 것 같기도 한데, 아직은 예감?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 세 가지 층위의 종합을 말함에 있어 두 개 사용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 점입니다.
한쪽에는 욕망적 생산의 종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물과 인칭을 모르고, 분리와 거리를 긍정합니다. 인간이 갖는 n개의 性, 몰로이를 점유한 분자적 점들.
다른 한쪽에는 종합의 오이디푸스적 사용이 있습니다. 오이디푸스적으로 종합한다는 것은 욕망하는 개인/인물을 표상하고, 그것을 부모와 혼인 이미지로 결박하는 것이며, 분자적인 것을 주체로 수렴하는 것입니다.
이러저러한 욕망은 나의 욕망이다, ‘나는 ○○를 욕망한다’, 나는 엄마를 원한다…….

글을 쓰고 세미나 등등을 하면서 주체/주어/화자의 문제를 종종 언급하곤 하지만 여전히 삶에서는 모든 것을 ‘내 것’인 양 구는 저를 발견합니다. 내 것이라 생각하니 집착하고 언짢아하는 거겠지요.
지난 수업에서 부분대상과 욕망의 문제가 소유 관념을 공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로 배운 것이 큰 수확이었는데, 앞으로 이 점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싶네요.
여러분들이 앙띠에서 지금 꽂힌 것은 무엇? ^^

자, 다음 시간에는 앙띠 2장 7, 8,9절입니다. 꼼꼼히 읽으시고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해두신 질문들도 한 번 펼쳐봅시다.
후기는 수영이가 올려주었으니 일독하시고요. 간식은 정옥쌤+아라쌤 부탁드립니다.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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