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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생] 레베카 솔닛

작성자
선민
작성일
2016-09-25 20:45
조회
1034


[길 위의 생] 레베카 솔닛
  • 당신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1. 여행의 이유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은 감각의 미로를 통해 들어온 정보를 맞아주기 위해 손을 뻗는 것, 그것을 껴안고 그것과 섞이는 일이다. 즉 타인의 삶이 여행지라도 된다는 듯 그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멀고도 가까운>)

2016년 3월 12일 오전에는 ‘문장을 훔치다’를 읽고 있었습니다. ‘‘감정이입’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불편하다니’라고 생각했고, ‘타인의 삶으로? 굳이 왜?’ 라는 반감도 들었습니다. ‘감정이입을 하면 해야 할 일만 더 많아질 거야. 자식도 타인. 최대한 거리를 둬야 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벚꽃이 총천연색으로 만개하던 봄을 지나, 초여름부터 여행을 다녔습니다. 와! 세상은 기대 이상! 미국 북서부 끝에는 겨울과 봄이 한데 뒤엉킨 채로 만년설로 얼어붙은 산 봉우리가 발 밑에 야생화를 기르고 있었고, 태평양 한 가운데에는 줄기가 땅 속으로 뻗었다가 다시 땅을 뚫고 자라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파란색이야말로 뜨겁고, 빨간색이야말로 죽지 않는 색, 불멸하는 미생물들이 뜨거운 온천수에서 살고 있었지요. 이백 만년 전 용암이 길을 낸 협곡에서는 태초의 지구가 보낸 듯 신비로운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가 부족했습니다. 그 어떤 새롭고 놀라운 광경도 ‘와!’ 한 마디로 압축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막히고 아름다운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기가 막히게도 초라했던 것이지요. ‘와!’ 이 한마디 하기 위해 8000km가 되는 여행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게다가 겨우 4살, 아이들은 금방 이 모든 풍경을 다 잊어버릴 겁니다. 어? 여행을 왜 해야하는거지? 그때 저는 레베카 솔닛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타인의 삶이 여행지라도 되는 듯? 레베카 솔닛은 여행의 비법을 알고 있을까? 우리가 왜 여행을 떠나야 하는지도?’

2. 멀고도 가까운

서점 점원에게 레베카 솔닛의 책은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오! 어디에나 있네요!(Oh, She is in everywhere!)” 실제로 레베카 솔닛의 책은 여성학(Man Explain Thinks To Me(『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사회학(Hope in the Dark(어둠 속의 희망』); A Paradise Built in Hell: The Extraordinary Communities That Arise in Disaster(『이 폐허를 응시하라』)), 도시학(The Encyclopedia of Trouble and Spaciousness; Nonstop Metropolis(A New York City Atlas); Infinite City(A San Francisco Atlas); Unfathomable City(A New Orleans Atlas), 역사학(A Book of Migrations) 등 여러 분과를 넘나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책의 제목들은 모두 ‘장소’와 ‘움직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The Faraway Nearby(『멀고도 가까운』); Wanderlust: A History of Walking(『걷기의 역사』); A Field Guide to Getting Lost) 게다가 유튜브를 보니, 그녀는 정말 안 가는 곳 없이 움직이면서 강연과 글쓰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멀고도 가까운』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작가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의 상태에서 시작해, 본인에게 닥쳐온 암 소식을 거쳐, 마침내 건강을 회복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간병과 투병 사이를 왕복하는 동안 그녀가 체험한 것은 고통이 선물하는 갖가지 이야기들이었어요.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어느 정도 ‘고통’을 안고 있었습니다.

고통은 촉각과 함께 온몸에 퍼져 있어 자아의 경계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딱 그만큼까지가 바로 나인 것이죠. 저희 집 근처에 올해 초 도로 정비 공사가 있었는데요. 우람한 나무들이 마구 베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쓰렸는데, 그때 저는 그 나무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레베카 솔닛은 우리가 아픔을 느끼는 모든 자리에 ‘나’가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은 생각보다 더 멀리 더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우려 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도 우리를 울고 웃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북극은 냉기의 극한입니다. 냉기는 모든 것을 얼리지요. 냉기 속에서 숨이 오고가던 생의 구멍들은 얼어붙고 공기와 떨어지면서, 존재는 지속을 멈춥니다. 영어로 얼다, 얼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freeze’는 “꼼짝 마!”의 뜻으로도 쓰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끊고 정지시킨다는 뜻이 있는 거지요. 냉혈한. 피가 차가운 사람은 아무 와도 교감할 수 없습니다. 냉기, 얼림, 고립, 죽음. 이 연쇄 속에서 우리는 혼자가 되지요. 그런데, 북극의 여름은 백야. 어둠없이 빛이 내리쬐는 날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얼어붙는 것 중에는 찬란한 빛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빛나는 혹한에 매료된 19세기의 한 여성은 차가운 실험실에서 생명을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작가 메리 셀리(1797~1852)는 실제로 냉정한 인품을 지녔다고도 하는데요. 자신이 낳은 자식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는 와중에 지금까지도 읽히는 불멸의 작품을 창조했으니 그녀야말로 냉기로 숨을 불어넣는 창조자였습니다.

냉기의 반대는 온기일 텐데요. 온기는 따뜻함. 손을 맞잡고 함께 있을 때 느끼게 되는 연속의 기운입니다. 그러나 레베카 솔닛은 온기의 극단에 냉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알려줍니다. 아마존의 열대 우림에서는 나병이 만연합니다. 환자는 바이러스가 주는 고통에도 괴로움을 느끼지만, 사회가 강요하는 격리에 더 고통 받습니다. 게다가 나병의 핵심은 환자가 자신의 신체적 고통에 점점 무감각하게 된다는 것인데요. 자기 손이 타들어가는 것도 못 느끼고 계속해서 뜨거운 다리미를 잡고 있게 되는 거지요. 환자의 신체는 여전히 따뜻하지만, 그의 감각은 얼어붙어 자기 자신을 자신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사회로부터의 고립과 자기로부터의 소외. 열대 속에서 얻은 병이라 할지라도 나병 환자는 냉기 속에 고통 받습니다. 그런데 이 아마존의 밀림에서 나환자들의 고통을 보면서 자기 안의 냉소를 깨트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나환자의 무감각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게 된 뜨거운 혁명가, 체 게바라입니다.

레베카 솔닛은 냉기와 온기, 북극과 아마존.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은 두 개의 감각, 두 개의 장소가 수많은 이야기의 파도 속에서 가까워졌다 멀어지곤 하는 모습을 그려냅니다. 그러면서 ‘레베카 솔닛’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곪고 있던 상처를 다른 풍경 속에서 다시 바라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분명 고립된 섬입니다. 하지만 그 섬은 이야기가 흘러나가고 흘러들어오는 섬. 실제로 이 책에서 단 한번만 나오는 인물이나 장소, 이야기는 없습니다. ‘살구, 거울, 얼음, 비행, 숨, 감다, 매듭, 풀다, 숨, 비행, 얼음, 거울, 살구’ 각 장의 제목들은 이렇게 풀려나갔다가 다시 뭉칩니다. 소재들은 뜻밖의 장소에서 조우하고, 다른 토양 위에서 다시 발아합니다. ‘삶과 이야기는 고립을 모른다’ 레베카 솔닛은 몇 번이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피고 지며 만드는 하나의 굉장한 그림. 이것이 레베카 솔닛이 본 우리가 사는 풍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볼 수 있으려면 우리는 ‘자기’를 떠나야만 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그녀가 이렇게 물었던 것은 우리가 이 굉장한 이야기 속에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3. 방랑자

레베카 솔닛(1961~ ;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http://rebeccasolnit.net/)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많습니다. 환경운동가, 인권 운동가, 역사가, 여성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등등. 하지만 그녀 스스로가 가장 마음에 들어할만한 이름은 방랑자가 아닐까 합니다. 레베카 솔닛의 책은 도처에 있고, 그녀의 관심은 고통을 겪는 모두에게 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레베카는 특정한 종교적 신념 때문에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구도를 위해 고통을 찾아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왜 돌아다니고 있냐고요? 그건 우리가 삶의 온갖 풍경을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고통의 장소냐고요? 그건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삶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베카를 방랑자로 키운 것은 우선 책이었습니다. 책이야 말로 무한한 세계, 손만 뻗으면 들어갈 수 있는 신비한 모험의 입구였어요. 실제로 정규교육을 충분히 받지도 않았는데요, 하지만 본인은 대부분의 시간을 공립 도서관에서 보냈기 때문에 공교육의 수혜자라고 자랑합니다. 두 번째는 자연이었습니다. 17살부터 집을 나왔다고 하는데요, 자신의 목소리와 천직을 찾기 위해 그 어떤 규범도 통하지 않는 광활한 장소를 찾아다닌 모양입니다. 특히 미국 남서부의 사막에 매료되었다고 하는데요. 황량하지만 충만한 기운을 지닌 ‘빈 곳’들을 돌아다니며 캠핑을 하고 원주민 활동가를 만나고, 새로운 감각을 깨워주는 야생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 사막에서 그녀는 “개인적인 것에서 나와 인간이 아닌 것을 껴안을 때” 인생을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을 겁니다. 레베카 솔닛은 여행을 통해 구원을 찾는 방랑자입니다.

“세상이 크다는 사실이 구원이 된다. 절망은 사람을 좁은 공간에 몰아넣고, 우울함은 말 그대로 푹 꺼진 웅덩이다. 자아를 깊이 파고들어 가는 일, 그렇게 땅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가끔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일, 자신만의 이야기나 문제를 가슴에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탁 트인 곳으로, 더 큰 세상 속으로 나가는 반대 방향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양쪽 방향 모두로 떠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며, 가끔은 밖으로 혹은 경계 너머로 나가는 일을 통해 붙잡고 있던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 이것이야말로 말 그대로 풍경 안으로 들어온 광활함, 이야기로부터 당신을 끄집어내는 광활함이다.”

**** 코너 안의 코너! 짭쪼름한 영어의 맛

레베카 솔닛은 The Faraway and Nearby에서 우리가 자주 쓰는 말들의 어원이나 비유의 속뜻을 자세히 설명하기도 합니다. 특히 각 장의 제목으로 나오는 명사는 그 자체로 은유가 되고 주제가 됩니다. Apricots(살구), Mirrors(거울), Ice(얼음), Flight(비행), Breath(숨), Wound(감다), Knot(매듭), Unwound(풀다) 단어 하나하나는 익숙한 것들이었지만 새롭게 맛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빽빽한 영어의 숲에서 지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지요. 가장 좋았던 것은 작가가 되는 일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작가는 먼저 숲 속으로, 타인들의 세상 속으로 뛰어들고 그 안에서 친밀한 듯 외롭게 작업하며, 마침내 그 숲 너머를 만나게 됩니다. ‘책’이 ‘숲’에 비유되기 때문에 사라지다(disappear into)와 뛰어들다(running into)라는 말에는 긴장감이 돌고, 숲과 고독의 건너편(another side to the forest and the solitude)라는 말에는 용기가 깃듭니다.

“Like many others who turned into writers, I disappeared into books when I was very young, disappeared into them like someone running into the woods. What surprised and still surprises me is that there was another side to the forest of stories and the solitude, that I came out that other side and met people there. Writers are solitaries by vocation and necessity. I sometimes think the test is not so much talent, which is not as rare as people think, but purpose or vacation, which manifests in part as the ability to endure a lot of solitude and keep working. Before writers are writers they are readers, living in books, through books, in the lives of others that are also the heads of others, in that act that is so intimate and yet so alone.”(강조는 제가 했습니다)

“작가가 된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책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마치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가듯 그 안으로 사라졌다. 나를 놀라게 했고, 지금까지도 놀라게 하는 것은 이 이야기의 숲과 고독 그 너머에 건너편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건너편으로 나가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직업의 특성상 고립되며, 또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 가끔 재능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재능이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희귀하지 않다. 오히려 그 재능은 많은 시간 동안의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며, 책 속에서, 책을 가로지르며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또한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매우 친밀하지만, 지극히 외롭기도 한 그 행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레베카 솔닛, 김현우 옮김,『반비』, 2016)
  • 첫 번째 레베케 솔닛의 사진은 여기에 있습니다. http://articles.latimes.com/2013/jun/21/entertainment/la-ca-jc-rebecca-solnit-faraway-nearby-20130623

  • 두 번째 책 이미지는 이정호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입니다. http://www.insight.co.kr/newsRead.php?ArtNo=7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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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03 13:17
    차분한 친밀감이 배어 있는 글을 이제야 찬찬히 읽었네요...개천절 쌩유ㅜ ............... "고독을 견디고 계속 작업을 해나갈 수 있는 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