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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푸코의 철학 (2) 5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6-22 07:34
조회
255
이번 주 채운샘의 강의는 다시 이란 혁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어째서 푸코는 뜬금없이 이란 혁명에 꽂혔던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푸코가 항상 저항, 혹은 혁명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푸코가 이란에서 발견한 것은 도덕적으로 가장 숭고한 봉기도,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혁명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시대착오적이라며 비판한 이란의 종교적 혁명에서 푸코는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저항의 가능성을 엿보았던 것입니다. 이란 민중은 “당도 전위도 없이 ‘영혼의 봉기’를”(채운샘 강의안)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합법성의 영역 안에서 더 합리적이고 더 인간적인 통치를 요구하는 대신, 법률주의 자체를 거부하며 ‘이슬람의 통치’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푸코가 보기에 이들의 혁명은 국가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저항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성을 보존하고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능동적 저항이었던 것이죠.

아마도 채운샘이 이란 혁명을 둘러싼 푸코의 고민들을 다시 언급하신 것은, 푸코의 이러한 정치적 경험이 <안전, 영토, 인구>에서 드러나는 그의 관점의 이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전, 영토, 인구>에서 나타나는 ‘통치성’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통치성 개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규율권력’과 ‘생명권력’을 다시 상기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죽이는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주권적 권력을 대체하여 규율화된 신체를 ‘생산하는 권력’인 규율 권력의 탄생을 분석했습니다. 생명권력은 규율권력을 보완하는 개념이죠. 채운샘은 규율권력이 규격화된 하나하나의 벽돌을 생산한다면, 생명권력은 그것들 전체의 흐름을 조정하고 최대의 효율성을 이끌어 냅니다. 생명권력은 정치적·경제적 단위로서의 ‘생명’을 그 대상으로 삼습니다. 생명권력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주권 권력과 대비되는 ‘살게 하는 권력’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푸코는 규율권력과 생명권력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란 혁명에 대한 푸코의 관심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의 고민은 줄곧 권력의 메커니즘 자체보다는, 그것에 대한 저항의 문제를 향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푸코는 또 한 번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감시와 처벌>과 <앎의 의지>에서의 푸코의 작업은 ‘대상화하는 권력’(‘우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분석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메커니즘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것 자체는 이미 저항의 지점에 대한 사유를 내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시와 처벌>이나 <앎의 의지>에서는 여전히 (가령 <감시와 처벌> 후반부에 나오는 ‘베아스’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 저항의 문제가 암시되고 있을 뿐, 본격적으로 다뤄지지는 않습니다. 분명 푸코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규율권력이나 생명권력 같은 개념은 (그것이 이미 우리를 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항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개념으로 간주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 푸코는 “한 주체와 다른 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 개인적 지배의 기술들, 그리고 자기의 기술에 있어 개인이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안전, 인구, 영토>에 이르면 푸코는 ‘대상화하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화하는 권력’을 분석하게 됩니다.

“나는 지배와 권력의 기술에만 너무 집착해온 것 같다. 이제 나는 한 주체와 다른 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 개인적 지배의 기술들, 그리고 자기의 기술에 있어 개인이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하는 문제를 훨씬 흥미롭게 생각한다.”(<자기의 테크놀로지>)

‘주체화하는 권력’의 분석에서 보다 강조되는 것은, 권력에 의한 통치는 외부적 힘에 의해 일방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권력을 욕망하게 됨으로써 행해진다는 점입니다. 권력은 그것이 욕망되고 있을 때에만 작동합니다. 주체화하는 권력의 분석을 통해 푸코는 ‘통치성’ 개념을 이끌어내는데, 통치성 개념에는 “개인이 타인과 맺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실천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대상화하는 권력’에 대한 분석에서 우리가 지배와 권력의 메커니즘만을 발견할 수 있었던 반면, ‘주체화하는 권력’에 대한 분석에서는 통치의 상호성을 사유할 수 있고, 또한 이를 통해 저항의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죠.

‘통치성’은 “합법적으로 구성된 정치적, 경제적 종속 형식들을 포괄할 뿐 아니라 다른 자들의 행위 가능성에 대해 작용하도록 운명지어진, 고려되고 계산된 행위방식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푸코는 사목권력을 분석하면서 통치성 개념을 이끌어내는데, 이때 사목권력은 양떼와 양떼를 이끄는 목자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됩니다. 사목권력은, 양떼를 이끄는 목자가 그렇게 하듯이, 무리를 돌봅니다. 사목권력은 지배하거나 억압하는 대신에 헌신하고 희생합니다. 이러한 사목권력의 목표(?)는 복종을 영속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복종은 나약하고 무지한 상태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때에만 한시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영속적인 복종이라는 관념은 없었던 것이죠. 가령 플라톤의 철인통치는 지금 우리의 눈으로는 엘리트에 의한 독재로 보이지만, 실은 모두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통치하는 자가 되게끔 하기 위한 제도였죠.

이는 지금의 현대의 신자유주의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자유주의는 심지어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우리를 내부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환경을 정비하며, 인구의 흐름을 내버려두고 사후적으로 조정합니다. 통치성에 대한 분석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권력의 본질은 그것이 행하는 억압이나 배제, 폭력, 그것의 불합리와 모순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합리성과 자비로운 헌신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권력은 통치의 수단으로서 자유를 부여할 수도 있고, ‘최소한의 통치’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통치의 기예이며, 예속과 복종을 영속화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 가령 신자유주의에 의해 주어진 자유는 ‘자유롭게 스스로를 팔 권리’에 다름 아니죠. 즉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란, 우리의 예속의 다른 얼굴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저항의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동시에 보다 일반적인 문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유와 능동성을 구성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저항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푸코에 따르면 “잠재적 거부와 반항의 가능성이 없는 권력이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왠지 희망적이지만, 이는 다르게 말하면 어떤 거부와 반항의 지점도 실체적으로 주어져있지 않다는 말도 될 것 같습니다. 푸코의 이러한 저항에 대한 사유는 자유를 소비하거나 권력에 ‘대한’ 투쟁에 만족하지 말고 어떤 독특한 저항과 자유를 구성해갈 것을 촉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란 민중들의 ‘영성’과 같은, 통치의 합리성 안에서 번역될 수 없는 각자의 특이성들을 봉기시키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비틀어내는 것이야말로 통치에 대한 근본적 저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손 끝이 살아있는 푸코 사진을 투척하고 도망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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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22 11:41
    너 푸코안티지? 그 멋진것들 다버리고 어쩜 저런 요상한 사진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