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혜원's 다이어리 : "존재하는 건 존재한다” - 〈천사에 관하여〉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6-05-03 09:59
조회
1008

"존재하는 건 존재한다” - <천사에 관하여>




연극이랑 뮤지컬에 입덕하고 나서 이것저것 많이도 보고 다녔는데 '이런 것도 봤다!'라고 말 할 만한 작품이 있다면 <천사에 관하여>다. 제목 그대로 천사에 관한 극이다. 부제까지 본다면 '아 정말 얘는 이런 것까지 보고 다녔구나!' 하고 감이 확 올 것이다. 정식 제목은 이러하다: <천사에 관하여: 타락천사 편> 그리고 정말 천사가 나온다. 그것도 두 명이나 나온다!

극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를 그리게 된 비화를 담고 있다. <거짓말쟁이와 모나리자>에서부터 <다빈치 코드>까지, 다빈치 그림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많았으므로 낯선 소재는 아니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천재가 대체 무슨 사연으로 수도원 식당 벽화를 그렸고, 귀족도 아닌 신원미상의 여인을 그렸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천사에 관하여>는 그 상상의 극단(!)까지 밀고 가...다 못해 아예 질문 자체를 거부하는 영역까지 가버린 극이라고 생각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극은 시작하자마자 일체의 질문을 거부한다.

<천사에 관하여>는 자기가 천사라고 주장하는 존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그 천사는 (프레스콜을 본 내 친구 심모 양의 표현에 따르면) 매우 약장수같은 그럴싸한 태도로 이렇게 말한다. “천사, 본 적 있어요?”- “천사, 본 적 있어요? 그림이나 영화 말고 실제로. 어쩌면 보고서도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지. 본 적 없는 거, 믿을 수 있어? 믿거나 말거나. 천사는 있어. 내가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는 없지. 존재하는 건, 존재하는 거니까!



내게 놀라웠던 것은 배우가 이 대사를 정말 자연스럽고 침착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무대에서는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하므로 당연한 일이겠지만 영상도 아닌 무대에서, 그것도 관객과의 거리가 거의 없는 소극장 무대에서 배우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선언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으면 그 자체로 경이롭다. 마치 영화 말미에 붙는 “이 영화는 픽션이며, 특정 인물이나 단체, 사건과 관계없습니다.”라는 말을 극중 캐릭터의 입을 통해 맨 처음에 들어버린 느낌이다. 이 경고문은 보통 관객의 몰입을 깨지 않기 위해 스크립트 맨 마지막에 위치한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태연한 이 극은 맨 먼저 관객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나는 이제부터 천사에 관하여 이야기를 시작할거야.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여!' 그리고 이 대사는 극을 보는 내내 매우 큰 힘을 발휘한다. 정말 이 극은 사건을 전개하면서 뭔가를 설명하거나 증명할 의지를 조금도 내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 “루카”는 신의 영광을 드러낼 예술가를 찾아가 작업을 도와주는 천사다. 그는 이번에 담당할 천재 “다빈치”에게 모습을 드러내서 빨리 대작을 완성하라고 마감 독촉을 할 작정이다. 밀라노, 1495년 겨울밤! 미션을 위해 지상으로 자유낙하! 그런데 그만 실수로 “다빈치”가 아닌 그의 제자 “자코모”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한편 “루카”를 매번 방해하는 타락천사 “발렌티노”는 "루카"의 실수를 비웃으며 “다빈치”에게 모습을 드러내서 그림을 때려치우라고 종용한다.

역할은 4개지만 배우 2명이서 1인 2역으로 루카와 다빈치, 발렌티노와 자코모를 연기한다. 사실 막상 보면 재밌다. 기본적으로 천사와 인간 두 가지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하는 배우들이 코믹하면서도 중독성 강한 노래를 하며 춤도 추고 연기도 하는데 재미 없을 리가 있나. 하지만 그 재미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맨 앞에서 루카가 했던 선언,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에 동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스토리는 단지 “판타지니까~” 하고 넘어갈만한 수준을 훨씬 초월하기 때문이다.

내가 스토리 더 말해줄게 잘 들어봐. 다빈치는 결국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는데, 그건 발렌티노가 그의 제자 자코모를 사랑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최후의 만찬은 프레스코에서 템페라 기법으로 바뀌는데 자코모에게 자기 모습을 잘 보여주기 위해 발렌티노가 다빈치에게 조언했기 때문이고. 그래서 <최후의 만찬>은 완성과 동시에 심하게 훼손되어 버렸대. 그리고 다빈치는 마지막으로 본 발렌티노의 미소를 남기기 위해 <모나리자>를 그린대. 그러니까 <모나리자>의 모델은 천사인 셈이지. 아, 그리고 사실 자코모는 여자애야. 공방에는 남자만 들어올 수 있어서 남장 한거야. - 이런 스토리가 눈앞에서 흘러가는데, 나는 개연성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극을 보고 정말 많은 생각을 했는데, 어디까지 했냐면 개연성이라는 말 자체가 사실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것까지 생각해보았다. 개연성이라는 말 자체가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 그러니까 픽션에서 찾는 현실성이다. 보통 부정적인 말에 많이 쓰인다. “이 스토리는 개연성이 없다” 라든가. 그런데 픽션에 현실성을 찾는 것 자체가 에러 아닌가. 애초에 이 극을 나는 왜 자꾸 반추하는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자꾸 하기 때문이다. 납득할 수 없는 스토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면 사람은 거꾸로 그것을 납득하기 위해 자꾸 그 빈틈을 메우려고 애쓰게 되는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외계인이 뉴욕 하늘을 찢고 쳐들어오는 영화라든가 만능 남자주인공이 날아다니면서 나라와 여자친구를 구하는 드라마를 대체 어떻게 받아들였던 것일까. 이 극을 볼 때처럼 픽션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작업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게 픽션에서 찾는 현실성, 즉 개연성이라는 것 아닐까. 다만 <천사에 관하여>는 그 간극이 너무나 심해 내가 그동안 픽션을 받아들인 과정을 돌아보게 만드는 부작용(?)까지 불러왔을 뿐이다. 혹은 그동안 너무 적극적으로 "왜?"라고 질문하는 극들을 보아왔던 것 같기도 했다. 왜 윤심덕과 김우진은 바다에 몸을 던졌나. 유다는 왜 예수를 배반했나. 누가 누구를 조종했나. 한밤중에 개는 누구에게 살해당했나. 정영은 왜 조씨고아를 위해 그렇게 많은 것을 희생했나. 대개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는 극 안에서 자체적으로 개연성의 조각을 찾아 짜 맞추는 식으로 전개된다. 관객은 그 해결과정을 따라가면 된다.

<천사에 관하여>의 톤은 전혀 다르다. 애초에 발렌티노가 타락천사가 된 이유도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인데, 루카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논평한다. “사랑에 빠지는 걸 어떻게 막아? 막을 수 있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겠지.” 여기서 발렌티노가 왜 사랑에 빠졌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 사랑한다잖아! 그럼 됐지! 자코모는 천사를 보고서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 줄 알았어. 천사는 있어." 자코모는 수많은 천사를 그린 화가의 조수다. 그런 그가 천사를 만나서 천사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냐고 묻는 것도 웃긴 일이 아닐까. (또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어렸을 때 천사를 만난 적이 있대...음, 그래.)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럴 줄 알았어. 천재는 있어!"



<천사에 관하여>는 이런 동어반복을 통해 질문을 일소한다. 거기다 극 자체에서 질문을 던지기는커녕 관객이 가질만한 의문조차 말소해 버린다. 모종의 사연으로 화가의 조수로만 남아야 하는 자코모에게 천사라는 비현실적인 존재는 그동안 가졌던 의문을 해결할 단서이기까지 하다. "천재는 있어! 난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불친절한데다 "대체 왜?"라고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달려가는 극은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예술가들의 사진이나 그림을 스크린에 띄우고 시나 소설, 그림들, 마법의 주문, 멜로디들이 이 세상을 떠도는 천사들의 도움으로 생겨났다고 암시한다. 그때쯤 가면 스크린에 등장하는 이른바 천재들이 왜 백인 남성에 국한되는지 따질만한 용기나 의지는 생기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노래가 흥겹고 어쨌든 재밌으니까 됐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게 된다. 아니, 천사가 나오는 극을 보러 와서 무슨 현실성을 따지고 그래? 그냥 그렇다면 그렇다는 거지. 천사는 있어. 날개도 없고 누드도 아니지만. <최후의 만찬>이 신의 계획일 수도 있고 다빈치의 유명한 제자 자코모가 여자일 수도 있고 <모나리자> 모델이 천사일 수도 있지. 아니라는 증거 있어? 없지? 없으면 내가 하는 말이 맞아. “믿거나 말거나. 존재하는 건 존재하는 거니까.

전체 2

  • 2016-05-03 12:12
    나는 안다. 혜원이는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 혜원이는 이 작품을 무쟈게 좋아한다는 것을! 같은 작품을 세 번이나 보고 종국에는 그에 대한 글까지 써버렸는데, 어찌 이를 부정하리오 ㅋㅋㅋ

  • 2016-05-03 15:14
    세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