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601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5-27 14:11
조회
3615
채운쌤 말씀으로는 1부에서 주요한 개념이 모두 나왔다 하셨죠. 기계, 생산, 기관 없는 신체, 강도…
놀랍지만 잘 잡히지 않는 이야기들이인데, 저로선 자본주의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싶어 신선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라는 기관 없는 신체의 표면에 등록된 욕망이 낳은 사회체라는 사실, 탈코드화와 재코드화를 통해 분열증을 생산하는 기계라는 사실, 그리고 혁명은 바로 욕망의 변화에서 온다는 사실.
앞으로가 아주 기대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일단 주요 개념들만 아주아주 간략히 다시 짚어볼까요.

하나, 기계.
들뢰즈+가타리는 사회를 이야기할 때도 기술을 이야기할 때도 기계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전제군주 기계, 자본주의 기계.
채운쌤의 설명에 따르면 기계의 본질은 다름 아니라 ‘작동’입니다. 입력된 것을 수행하는 기계가 아니라 쉼 없이 접속하고 절단하면서 무언가를 생산하는, 작동하는 기계.
자연 안에서 작동되는 모든 것은 그러므로 기계이며, 자연 안에서는 모든 것이 실은 생산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생산물이 된답니다.
‘생산하기’와 ‘생산물’의 동시성, 이 점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생산을 통해 무언가를 낳는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어떤 것을 한다, 이게 아니랍니다. 생산하는 것 자체가 곧 생산물이라는 것, 기계는 생산을 생산한다는 것이죠.
트랙 위에서 혹은 들판 위에서 전력 질주하는 육상선수와 톰슨가젤이 생산하는 것은 바로 그 달리기, 온몸의 근육을 끌어당겨 달리는 데에서 오는 쾌감, 그때 감각되는 공기의 강한 압박 같은 것이지요.
문학작품을 읽는 경험이 모든 독서를 마친 뒤 파악되는(파악된다고 믿는) 주제나 교양이 아니라 한 문장 한 문장이 선사하는 짜릿함과 의아함을 생산하는 것처럼.
욕망은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둘, 기관 없는 몸.
생산하는 욕망 기계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기관 없는 몸이 있답니다.
낮에 있었던 세미나에서 나온 이야기는, 언제나 돌아가려는 힘, 無가 되려는 힘이 아닐까 했는데,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군요.
아무튼 기계의 유기체화에 저항하는 ‘반생산’의 힘이 항시 존재한다는군요.
그런데 오해하면 안 될 것이 있는데, 반생산이라는 말이 반드시 생산에 대한 억압이나 대립은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실제로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의 기관 없는 몸을 자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자본이 반생산인 이유는, 맑스가 이미 말했던 것처럼 자본 자체가 생산을 하는 건 아니고, 다만 자본은 자신의 표면에 생산을 등록한다는 데, 그럼에도 마치 자기 자신이 직접 생산하는 양 마법을 부려놓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본은 등록과 기입의 표면일 뿐, 생산하지 않습니다.
한편 들뢰즈+가타리는 기관 없는 몸을 알, 지구 등으로 이미지화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도 차라리 알이 훨씬 이해하기 용이합니다.
未분화 상태의, 유기체에 저항하는, 비어 있는, 강도=0의 몸.
이 몸이 욕망 기계와 접속했을 때 발생하는 인력과 척력에 의해 앞으로 차이들이(모든 차이는 플러스 값) 생산된답니다.

셋,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데 자본주의와 분열증 이야기가 첫 장에서부터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있지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들뢰즈+가타리의 분석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분열증을 생산하는 기계입니다.
그간의 다른 사회 기계들과 달리 자본주의 기계는 욕망의 흐름을 하나로 포획하지 않고 풀어놓습니다.
그것은 모든 욕망이 다양하게 흐를 수 있도록 강요하는(탈코드화) 극단적 기계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는 풀어놓은 욕망들을 다시 회수하길 잊지 않습니다(재코드화).
TV방송까지 점령한 인문학 붐, 힐링을 꿈꾸는 연예인과 중산층들이 점령한 제주도로의 이주 및 귀농, 여러 가지의 대안 교육 공동체들 등이 좋은 예가 됩니다.
모든 낯선 것, 모든 이국적인 것들을 자본주의는 환영합니다. 그 모든 것이 다시 자본으로 회수되는 것, 자본의 표면 위에 등록‧기입되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 기계가 바라는 바지요.
뭔가 딱 잡히지는 않는데,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가 앓는 분열증을 말하는 것이 이 대목인 듯합니다.
오직 새로운 것, 기입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찾아 옮겨 다니기 바쁜, 욕망을 풀어놓길 강요당하는 수동성의 무한한 생산.
아마도 그래서,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 기계에 대한 혁명은 분열증 환자들의 사회체 안에서 분열증적 주체가 되는 것, 흐르지만 등록되지 않고 영토에 갇히지 않은 힘들을 사유하고 사용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라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 두고 봐야겠지만;

개인적으로 지난 학기 <의미의 논리>보다 더 신선하고 더 유쾌하고 더 힘이 느껴져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즐겁게 예습과 복습 해주시고요. 채운쌤은 1부를 반복해 읽으시라 권하셨죠.
다음 시간에는 2장 5부까지 읽어오심 됩니다. 세미나 참가자들 모두, 꼼꼼한 공통과제 잊지 맙시다.
이번 주 수업후기는 락쿤쌤, 다음 시간 간식은 쫑은쌤+채영림쌤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럼 다음 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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