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525 안티 오이디푸스, 수업후기

작성자
락쿤
작성일
2016-05-29 23:09
조회
658
5월23일 절차탁마, <안티 오이디푸스> 후기

지난 시간에 이어 본론으로 들어간 첫 번째 수업이었습니다. 다들 어떠셨는지요. 앞의 공지에서 수경샘은 지난 학기 <의미의 논리>보다 이번 책이 더 재미있다고 하셨는데, 저 또한 공감합니다. 들뢰즈가 젊어진 것 같아요^^ 전투적인 것 같기도 하고요.

채운쌤께서 이번 책은 1장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만 후기가 늦어졌습니다.

욕망= 생산 (욕망하는 생산)
구조는 욕망을 대상화한다고 합니다. 구조는 일반성이라 할 수 있고, 사건이나 생성처럼 환원불가능한 것은 다룰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을 넘어가는 것으로 ‘기계’를 얘기합니다. 기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machine’이 아닙니다. 기계는 작동을 본질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운동이고 움직임이죠. 그런데 작동에는 고장도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성이라 그러면 소멸하고 반대되는 것 같지만, 생성이라는 말 자체가 소멸을 깔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는 생명도 기계입니다. 자연도 그렇고, 인간, 동물, 사회도 기계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즉 욕망이란 구조 속에서 접속과 작동의 흐름, 이것이 기계라고 합니다. 그러니깐 ‘무엇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본질적으로 생산이라는 것입니다. 작용자체가 욕망의 본질이고 작용하는 한에서 욕망이라는. 욕망하는 생산이죠. 욕망하는 기계.

“기관 없는 신체”, “기관 없는 몸”이라는 생소한 개념이 나오는데요. 우리들의 몸을 나타내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채운샘께서는 도덕경에 나오는 “허”의 개념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로 큰 수레바퀴에 바퀴살이 있고 바퀴가 굴러가려고 하면 가운데 축에 빈 구멍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마치 그릇이 그릇인 것은 비어있어서 그런 것처럼 말이죠.
44쪽을 보면, “기관 없는 몸은 어디까지나 기관들이 없는 채로 있으며 보통 의미의 유기체로는 되지 않는다.” 규정성이 없다는 얘기겠죠.

그리고 기관없는 신체는 유기체에 반항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을 유기체라고 했을 때, 입은 입이고, 팔은 팔인 자기 나름의 기능을 가지고 있죠. 유기체는 이 기능을 고착화시키는 거죠. 하나의 전체에다가 복속시키는 겁니다. 유기체라는 개념이 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의 존재가 가지고 있는 외부성을 보지 못하는 것, 일단은 자기 완결성이 있다고 전제하는 상태에서 외부성을 가지고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손이 불편한 화가들은 입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또 그것이 손이 된 것이기도 하잖아요. 입에 다른 용법을 만든 거죠. 그런데 우리는 원래 그림은 손으로 그려야 되는 거지만 손이 없어서 그걸로 그린다라고 하는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기능을 고착화시킨 다음에 예외적인 상태로 생각을 하는 거죠.

자연은 과정이라고 합니다(26쪽). 결과, 목적 이것과는 다른 과정이라고 하는데요. 이들은 접속을 할 때도 무턱대고 접속하는 게 아니라 접속을 할 때는 코드가 맞는 것끼리 한다고 합니다. 완전하지 않는 상태의 코드와 코드가 만나 접속, 생산되는 거죠.

“사회체”라는 개념도 나오는데요(36쪽). 쉽게 말하면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코드를 만든다고 해요. 채운쌤은 자본주의를 예로 드셨는데요.  “자본은 어떤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 생산해 내는 것은 노동이다. 마치 모든 생산에 근원이 되는 척한다.”  저는 이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마치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공장주가 관료들이고 자본가들이고. 그 밑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그들을 신봉하는 자들이고요. 전 무언가에 대상화되고 거기에 놀아난 기분이 들었어요.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이렇게 살았을 거고 나 또한 이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어찌됐든 욕망은 규격화되고 동일화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이런 메커니즘 위에서 살고 있구나, 그럼 어떻게 살아야할까 고민하게 했습니다.

여하튼, 사회체는 도망가든 원하지 않든 코드화 되는 것만 원한다고 합니다. 욕망을 사회적으로 기입되게 그렇게 만드는 거죠. 애초에 욕망의 흐름만이 있고, 사회체는 그것을 조직하고 통제합니다. 자기들은 아무것도 안하면서 하는 것처럼 말하는 거죠. 그리고 사회체의 역할은 특정한 가치를 뽑아낸다고 합니다. 잉여가치를 말하는 거죠. 다시 말해 욕망의 흐름은 원래 있고 이것을 표면에 격자화하여 어떤 것은 노예제도, 원시사회, 자본주의라고 보는 겁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만 느끼는 인간을 만든다고 해요. 뭐든 교환관계로 빨리 전환하는 거죠. 그러니깐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체 속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자본주의는 가족주의와 더불어 발전하고 그것을 통해 전진합니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은 자본주의와 셋트를 이룹니다. 실은 자본주의적 질서의 재생산은 상품을 생산하는게 아니라 욕망을 재생산 한다고 합니다.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을 타겟으로 싸우는 거라고 합니다. 정신분석학은 욕망을 사적인 것으로 만든다고 해요. 실은 모든 욕망은 그 자체로 사회적 욕망이고 무의식이 사회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특정한 구조 속에서 어떤 욕망을 기표로 환원하려 한다는 거죠. 그러니깐 프로이트는 욕망이란 억압되어 있다고 보는 겁니다. 무의식 밑바닥에 있는 억압된 욕망들은 왜곡된 표상들을 전제하고 있고, 왜곡된 표상들을 잘 분석 해내면 이 사람의 욕망이 어떻게 꼬여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치료 끝. 그리고 왜곡된 표상이라고 얘길 했으니까 표상을 해석할 메커니즘이 있어야 하겠죠.  그것을 오이디푸스라고 합니다. 여기서 채운쌤은 들뢰즈는 오이디푸스가 없다고 하는게 아니라 모든 것이 오이디푸스를 다 겪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채운쌤께서 수업시간에 말씀하신 ‘아돌프 뵐플리’의 그림을 한번 찾아보세요. 가지처럼 계속 나아가는 그림이라고 하셨는데, 감상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책 43쪽 설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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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5-30 11:52
    '~라고 합니다' 이 표현이 유독 많은 후기ㅋㅋㅋ 그 맘 저도 잘 알 겠네요^^; 앞으로 하나하나 차근차근, 1장을 되풀이해 읽으며 나아가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