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십대들의 독자-되기, 저자-되기]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21-09-28 12:41
조회
1338

십대들의 독자-되기, 저자-되기 프로젝트 1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십대들의 독자-되기, 저자-되기'는 책을 읽는 '독자'가 되는 동시에 독서를 통해 촉발된 생각을 자기 언어로 풀어 쓰는 '저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읽고 필사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프로젝트입니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을 지금 '규문톡톡'을 통해 공개합니다. 여덟 명의 십대 청소년들이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낭송 열자』, 『모비 딕』 네 권의 책을 읽고 '나'를 둘러싼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닌 세계'를 여행했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내가 사는 세계는 과연 어떤 곳일까?' 이 알쏭달쏭한 생각의 바다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카렌 암스트롱 지음,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정영목 옮김, 푸른숲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왜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가?
-
김자비



우리도 이처럼 우리 쪽에서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예기치 않게 그런 순간이 찾아오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행복함에 대하여 생각하는 순간, 왜 우리가 이렇게 기쁜지를 묻고 자의식을 가지게 되는 순간, 그 경험은 빛이 바랜다. 우리가 자아를 이 기쁨 속으로 끌고 들어가면, 미리 계획하지 않았던 이 기쁨은 지속될 수 없다. 어쨌든 이것은 본질적으로 환희의 순간이다. 몸 바깥에서, 우리의 자기중심주의의 프리즘 너머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황홀이다. (...) 나중에 고타마가 사유했듯이, 그것은 “타냐(욕망)를 일깨우는 대상들로부터 떨어져서 존재했다.” 어린 고타마는 자신과 개인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생물들의 고통이 가슴을 꿰뚫었을 때, 자연발생적인 동정심이 생겨나면서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렇게 자아가 사라진 감정이입의 상태에 들어가면서 그는 순간적으로 영적인 해방을 맛본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 지음,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정영목 옮김, 푸른숲, p.120)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는 의외로 놀라운 책이었다. 저자 카렌 암스트롱은 영미권 사람이다. 서양에서는 흔히 기독교 사상만을 연구 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책이 나오다니.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서양 사람이 동양에 대하여 저술해 놓은 것들은 못 믿는다(정말이지 지독히 못 믿는다). 대부분의 책들은 항상 결론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지 않아 악마이고 이단이고 야만이다’라는 식의 말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양 사상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이분법이 너무 심하다. 서양 책들은 사람들을 너무 두 갈래로 나누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서양인이 이렇게 선인지도 악인지도 모를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좀 불안했다. 그러나 인용문과 같이 저자가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불안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은 붓다에 대해서 이분법이 아닌 붓다가 얘기하던 것을 가지고 그를 판단했고 제목도 범상치 않은 데가 있었다. 그토록 흔한 <붓다 전기>나 <붓다 이론> 같은 것이 아닌, ‘스스로 깨어났다’라는 말을 썼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어나다.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흔히 불교 경전에서 ‘깨어나다’ 혹은 ‘깨어난 자’라 하면 깨달은 사람, 혹은 영적 초월자라는 말로 통하기 때문에, 나는 ‘깨어나다’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음’이라는 의미로 놓고 수식 풀어나가듯 의문을 풀어보도록 하겠다. 아울러 ‘왜 깨어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함께 말이다.
흔히 불교를 접한 어른들은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깨달으면 잘 살 수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을 이미지로 떠올려 본다면 아마 신선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초현실주의적인 신묘한 도술을 사용하는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것은 모두 초기 팔리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텍스트들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 텍스트들에서는 흔히 붓다가 하늘을 날았다든가, 하늘에서 걸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깨어났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것도 스스로 깨어났다고 말한다. 그런데 만약 도술이 스스로 깨어난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도술 없이도 편안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 도술을 배워서 죽지도 않아야 하고, 늙음도 태어남도 죽음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도술을 쓴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던 모든 인물들은 사라지거나 죽었다. 그들도 태어나고 죽고 늙고 병드는 순환을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들도 모두 다 필연적인 괴로움인데 깨달아서 잘 살았다면 벗어나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제까지 살펴본 결과 도술은 진정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도대체 ‘스스로 뭐에 깨어있다’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모든 괴로움이다.
인간이 겪는 괴로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첫 번째는 외부의 괴로움 즉 남이 나를 치거나 찌르거나 죽이는 것 등이다. 이런 것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암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게 과학계의 아니 심리학계의 정설이다.
나머지 하나는 내부의 고통, 즉 마음의 고통이다. 예컨대 양심에 찔린다든가 아니면 우리가 습관을 들여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것들 말이다. 이것이 진짜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 습관적으로 말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공부를 게을리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을 습관으로 들여서 매일매일 미룬다고 생각해보자. 아마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제 명대로 못 살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도 이와 같이 산다. 그들은 자기가 습관들인 행동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을 뿐,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거나 자기 행동을 돌아보지 않는다. 우리는 이 습관적인 행동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간다. 그리고 그 행동을 간직한 채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내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습관들을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내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이기적 자아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은 순간적 쾌락을 추구하도록 한다. 최고로 누리는 것이 우리에게 득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나 답해보라. 오래 가는 순간적 쾌락이 있던가? 답은 ‘없다’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원리가 너무나 중요한 나머지 진짜로 중요한 존재원리에 필요한 것들은 다 놓치고 살고 있다. 깨달음이란 이런 습관적이고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진짜로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을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고 최선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그래서 정말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길을 간다.
깨달은 자들은 공감한다. “어린 고타마는 자신과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생물들의 고통이 가슴을 꿰뚫었을 때, 자연발생적으로 동정심이” 발동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사고를 가지고 살지만, 내가 남한테 잘해주면 남이 나에게 잘 해준다는 사실도(입버릇처럼 말하는데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남에게 공감하면 나와 그 주변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편안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진정으로 걱정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는 마음에서 행동하는 것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결국 나의 존재에 집착하지 않으면 나라는 짐을 버리게 되고, 진정으로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에 한 순간도 최선을 다해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에드 용,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양병찬 옮김, 어크로스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좋은 균과 나쁜 균
-
백재윤


 

“미생물이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질병의 위험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이 의존하는 생물학적 힘을 소홀이 여기기 때문이다. 전쟁의 역사는 협동의 역사보다 늘 화려했다. 페스트-콜레라-황열은 소설, 연극, 영화의 단골 메뉴가 되었지만, 위나 장에 서식하는 미생물의 유용한 역할을 소재로 하여 성공적인 스토리를 만든 사람은 없었다.” 그는 동료인 드웨인 새비지, 레셀 섀들러와 함께 미생물이 수행하는 역할을 연구했다. 항생제를 이용하여 고유종을 제거하자 그동안 맥을 못추던 열세종이 득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멸균된 인큐베이터에서 사육한 무균생 쥐를 연구해보니 수명이 짧고, 성장이 느리고, 소화관과 면역계가 비정상적으로 발육하며, 스트레스와 감염에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를 토대로 세 사람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수많은 미생물 종들은 동물과 인간의 정상적인 발육과 생리 활성 유지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에드 용,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양병찬 옮김, 어크로스, p.66)

이 책을 읽을 때 이 내용이 특히 흥미로웠는데, 나는 보통 균이 없이 깨끗하면 좋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기 위해 손소독도 아주 열심히 하는 중이라 균이 없으면 아프지 않다는 생각을 일반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유산균은 착한 균(?)이다. 그래서 그러면 착한 균과 나쁜 균이 딱 나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궁금해서 구글에 유산균 부작용이라고 검색을 해보았다. 그런데 구글이 보여준 검색결과를 보니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이 나왔다. 바로 균혈증이라는 것이다. 구글에 균혈증을 검색해보니 균혈증(菌血症,bacteremia, bacteraemia)은 혈액에 세균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혈액은 무균상태이기 때문에 혈액 배양 검사 등을 통해 세균이 검진되는 경우 질병으로 분류된다. 균혈증은 미숙아, 노인, 중증환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대충 이유를 말해보자면 프로바이오틱스로 면역이 과도하게 증가한 상태에서 장 점막이 손상되면 그 사이로 균이 들어가 균혈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장이 약한 나에게는 프로바이오틱스가 도움이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그럼으로 좋은 균과 나쁜 균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쥐가 멸균 상태에서 자라자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렇다는 것은 쥐에게 필요한 균이 제대로 가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으로 사람과 마찬가지로 균이 필요한 생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 역시 균이 필요한 생물이다. 이렇게 글을 쓰다가 든 생각이 하나 더 있다. 어린 아이가 흙을 먹으려 하면 부모는 그걸 막는다. 그런데 토끼가 흙을 먹을 때 과연 말릴까? 나는 그런 것은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러는 것이 토끼가 소중하지 않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필요한 균이 다르듯이 동물들 역시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미생물은 존경해야 마땅합니다
-
유태리


 

우리 네 사람은 점심을 먹기 위해 미시간 호수가 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만났는데, 주변에는 정장 차림의 경영자들이 널려 있다. “당신들은 이것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죠.” 길버트가 흠잡을 데 없는 인테리어와 아치형 천장, 밖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고층 빌딩들을 가리키며 말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살아있어요. 살아 숨 쉬는 생명이라고요.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건 세균이죠.” (에드 용,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양병찬 옮김, 어크로스, p.411~412)

이처럼 나와 나 이외의 것들 속에는 미생물이 충분히 들어있다. 그렇다면 미생물이 없는 생물도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살아갈까? 또 세균이 중요하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일까? 미생물은 우리 인류가 멸망해도 새로운 생명들을 탄생시킬까?
미생물은 참 신기한 존재다. 인간이나 동물, 식물보다 먼저 태어나 세상을 이끌어 왔으니 말이다. 게다가 미생물도 생명이라니! 애초에 지구 생명의 시작은 미생물이 아니었을까? 내가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을 잘 살펴본 결과, 18페이지에 “이 미생물들이 우리의 상상 속 달력에서 3월부터 10월까지 지구를 이끌어온 셈이다.”라고 적혀있다. 그러니 미생물이 애초부터 지구를 이끌어 온 것은 아니고... 그렇다면, 미생물 이전에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인데... 책에 있나? 찾아봐야겠다.

미생물은 천문학적 숫자로 존재하는데, 사실은 천문학적 숫자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은하에 존재하는 별의 개수보다 한 인간의 소화관에 서식하는 미생물의 개채 수가 더 많으니까 말이다. (에드 용,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양병찬 옮김, 어크로스, p.19)

‘미생물’이라는 특별한 존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인가? 또 그렇게 많다면 존재감이 뿜뿜 빛을 발해야 하지 않는가? 하긴 그렇게 작으니 안 보이긴 하겠지. 아, 아니다 우리도 미생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 한마디로 미생물은 존재감도 엄청나다는 거??? 미생물은 참 아리가리한 존재 인 것 같다. 미생물님, 존경합니다!!!

여기서 강조할 것이 하나 있다. 우리 눈에 익숙한 가시적 생물, 즉 우리가 자연을 생각할 때 퍼뜩 떠올리는 생물들은 모두 생명의 전체 이야기에서 아주 느지막이 나타난 지각생들이다. (에드 용,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양병찬 옮김, 어크로스, p.17)

위에 글이 사실이라면, 우리 인간이 길게 느끼는 시간은 얼마나 적은 시간인가? 또 미생물은 그 기나긴 시간을 어떻게 버텨왔는가?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쓰는 1시간조차도 지루해 하고 있다.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미생물과 우리
-
허도현




“우리는 모두 혼자 태어나, 혼자 살다가, 혼자 죽는다”고 했을 때, 오슨 웰스는 큰 실언을 한 셈이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도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공생자로 존재하며, 공생이란 ‘상이한 생물들이 함께 사는 것’을 가리키는 놀라운 용어다. 어떤 동물들은 미수정란 상태에서 이미 미생물에게 점령되고, 어떤 동물들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첫 번째 파트너를 고른다. 우리는 미생물의 면전에서 평생을 살며, 우리가 음식물을 먹을 땐 미생물도 함께 먹는다. 우리가 여행할 땐 그들도 동행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죽을 때, 그들은 우리를 분해하여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모두 일종의 동물원이다. 우리는 하나의 몸으로 둘러싸인 거주지이자 여러 종으로 구성된 집합체이며, 하나의 세계다. (에드 용,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양병찬 옮김, 어크로스, p.11)

우리는 혼자 있을 때도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어딘가 먼 우주에 혼자 떨어져 있든, 집에서 혼자 있든 간에 주위의 미생물들과 내 몸속의 미생물들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미생물과 우리가 함께 공생한다면, 결국 미생물과 우리는 다른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우리 몸속에도 미생물이 존재하고, 바깥에도 미생물이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의 육체는 미생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말은 나는 미생물들의 집합체, 즉 미생물이라고도 볼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않을까? (물론,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미생물은 아니겠지만, 편의를 위해서 그냥 미생물이라고 칭하도록 하겠다.) 내가 미생물이라면 우리가 미생물과 함께 공생한다는 말이 조금은 어색하게 들리게 된다. 내가 미생물인데 어떻게 나와 같이 공생할 수 있냐는 말이다.
여기서 ‘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진정한 ‘나’란 무엇일까? 만일 육체가 진정한 나라면 어떨까. “우리는 간혹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몸이 내 맘 같지 않다.” 등의 말을 하고 한다. 그런데 육체가 정말 ‘나’였다면 내가 그것들을 통제하지 못했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육체는 그저 겉껍데기에 불과하다. 육체가 진정한 ‘나’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육체가 내가 아니라면 그럼 미생물도 내가 아닌가? 그럼 결국 우리가 미생물과 함께 공생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과 미생물들이 만들어낸 나의 육체가 공생한다는 말일 지도 모른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미생물들이 모두 한꺼번에 사라진다고 상상해보자. 먼저 긍정적인 결과로, 감염병이 모두 사라지고 많은 해충들은 동반자가 사라져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희소식은 딱 거기까지다. 소, 양, 영양, 사슴과 같은 초식동물들은 굶어 죽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장내 미생물이 사라져 초원에서 뜯어 먹은 식물의 질긴 섬유질을 분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은 어떻게 될까? 신기하게도, 얼핏 생각하기에는 인간은 괜찮을 것 같다. 미생물이 없어지면 곧 죽고 마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우리 인간은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 동안 그럭저럭 버틸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인간의 건강도 결국 악화되겠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걱정거리가 있다. (...) (‘분해의 달인’이라는 미생물이 없어져서 노폐물이 쌓이고, 동식물이 사라져 먹을 것이 없어져 지구는 심각한 식량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함) (에드 용,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양병찬 옮김, 어크로스, p.26~27)

에드 용은 계속 우리에게 미생물은 아주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킨다. 그 많고 많은 미생물이 없어지면 결국 뭐가 되었든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그래서 우리는 미생물과 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 부분을 보고, 내 생각보다 미생물이 차지하는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원초적인 모든 것의 중심인 먹이 사슬의 제일 꼭대기 층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미생물들이었다. (먹이 사슬 그래프에서는 가장 밑이겠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서열이라고 보면 된다.) 그만큼 미생물들이 사라지고 나서의 참혹한 결과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미생물이 사라지게 되면 그로 인해서 다른 생물들도 줄줄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도 미생물과 함께 공생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다른 생물들에 비해서는 인간이 오래 살아남겠지만 결국 인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게 될 테니까.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유전자를 절반씩 물려받는다. 그건 운명이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유전자는 평생 동안 남아 있으며 더 이상 추가하거나 누락 되지 않으니 말이다. 당신은 내 유전자를 가질 수 없고, 나도 당신의 유전자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친구와 동료들끼리 유전자를 마음대로 교환하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당신의 보스가 바이러스 저항성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 유전자를 빌릴 수 있다. 당신의 자녀가 질병에 약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당신의 건강한 유전자로 교체해줄 수 있다.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이 특정 음식을 잘 소화 시키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당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런 세상에서 유전자는 단지 대대손손 수직으로 대물림되는 가보가 아니라 개체들 간에 수평으로 교환할 수 있는 상품이다. (에드 용, 『내 속엔 미생물이 너무도 많아』, 양병찬 옮김, 어크로스, p.305)

이 부분은 나에게 아주 흥미롭게 다가왔다. 현대에서는 아주 당연한 유전자 대물림이 미래에서는 상품으로 쓰일 수 있다는 발상이 새로웠다. 우리는 당연히 태어나면서 엄마, 아빠의 유전자를 받으므로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그래서 유전자에서 비롯되는(요즘은 별로 상관이 없다고 한다.) 키에 대해서 “우리 부모님은 다 키가 작으셔서 나도 작아”와 같은 말은 흔히 우리가 하는 말들이다. 또는 부모님으로부터 질병을 물려받은 아이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점, 싫은 점 등을 미래에는 고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많은 사람이 바라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단점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서로 유전자를 바꾸다 보면 나중에는 점점 몸에 뭔가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다. 기형아가 태어나거나 여러 병이 도는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최근 들어 유전자 변형 실험 등을 동물, 식물에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때문에 모습이 기괴해지는 생물들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귀가 3개인 토끼, 잎 대신 꽃이 피는 해바라기 등) 당연히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내 몸속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이처럼 몸에서 거부반응 같은 것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열자, 『낭송 열자』, 홍숙연 풀어 읽음, 북드라망


 

『낭송 열자』
답이 ‘없는’ 철학?
-
엄이우


 

열자는 철학자인데 날아다니기도 하고, 또 철학자 티를 풀풀 내지 않는, 뭔가 내가 생각한 철학자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계속 철학자는 다락방에서 고뇌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편견이 정말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낭송 열자』를 읽으며 철학에 대한 나의 생각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처음에 철학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을 때는 철학이 그냥 사유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철학을 이용해 어떤 답을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철학은 오히려 답을 구하고자하는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심지어 답을 제시하거나 생각할 방향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내가 처음 읽은 철학책은 『소피의 세계』라는 책이었는데 그 책을 읽고 ‘철학자들은 참 독특한 생각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책을 시작으로 철학이 별로 재미없다는 생각을 키우게 된 것 같다. 당시 나에게 어려운 책이어서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항상 어떤 책을 읽을 때면 ‘결론은 깔끔하게’, 그리고 ‘답은 확실하게’를 바랐다. 그 책을 읽고 어떤 확신이 들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철학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철학은 철학대로,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조금이라도 철학적인 느낌이 나는 책은 멀리 떨어져서 보았다.
열자도 철학자이고 절대로 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지루할 때도 있었다. 나는 답을 주지 않는 것을 혼자 ‘애매모호하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보니 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 조금 다른 것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열자도 내가 지루하다고 생각한 철학자였지만, 그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를 들이밀어서 차마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나 쫌 철학하는 사람이야’라는 티를 내지도, 어려운 단어를 쓰지도 않아서 부담스럽지 않고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낭송 열자』를 읽어보니 이 책을 읽기 전에 어디선가 열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장자』에서 언뜻 비행인간처럼 날아다니다가도 땅으로 내려와 아내에게 밥해주고 돼지도 치고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장자, 열자, 노자... 등등 이름이 ‘자’로 끝나는 분이 너무 많아서 헷갈렸는데 이번 책에서 드디어 열자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열자의 이름은 ‘어구(禦寇)’로 자신의 삶을 해치는 것을 막는 뜻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름이 뭔 도적을 막는 것인가 싶었지만, 한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었다. 열자는 땅이나 재물, 명예 같은 것에 집착하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너무 집착한 나머지 죽는 인간을 보며 ‘저게 무슨 소용인가’라고 말한다. 그는 다른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기 위해서 간단히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닌, 우주에 대한 탐구도 많이 했다.
이 책에서 나에게 가장 다가왔던 챕터는 ‘아이도 아는 이치를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부분이었다. 어른들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편의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포씨네 아들 꼬마는 멋진 말을 던진다.

“하늘은 사람들에게 후하게 내려주십니다. 오곡을 자라게 하고 물고기와 새를 살도록 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먹도록 하니 말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메아리처럼 따라했다. 그때 자리에 끼어 구경하던 열두 살짜리 포씨네 아들이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대감님의 말씀은 옳지 않아요. 천지 사이의 만물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무리들입니다. 무리는 서로 귀하고 천한 게 없는데, 한낱 크고 작은 지혜와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며 서로를 번갈아 잡아먹고 있지요. 사람들은 서로를 위해 살게 해주기는커녕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잡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하늘이 본래부터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살아가게 한 것이겠어요?” (열자, 『낭송 열자』, 홍숙연 풀어 읽음, 북드라망, p.101~102)

이 인용문이 나에게 첫 번째로 들게 한 생각은 무리와 무리 사이의 관계였다. 이 아이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같은 무리일 뿐이다. 서로에게 과시할 것도 없고, 또 이상하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과시하고,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우연히 주어진 사유할 수 있는 머리로 남을 괴롭힌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것들보다 우월한 조건에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안심’한다. 신이 인간에게 후하게 내려준다고 말한 사람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물고기가 당연히 그에겐 자신보다 떨어지는 음식으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같은 무리임을 생각하면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꼭 동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보다 여러 면에서 조금 떨어지는 사람이 더 편하다고 느낀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나보다 무언가를 못하는 사람과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그것이 외모건 성격이건 성적에 관련된 것이건 간에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의 밑에 없다고 생각하면 불안해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누군가가 나의 밑에 있어야만 안심한다는 것도,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야한다는 것도 너무 이상한 것 같았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불편하다고 느끼면서도 나는 굳이 상황을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에게 나쁠 것이 없는 상황이니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모두 같은 무리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잡아먹고, 비하하고, 싸우는 것에 ‘익숙’해지니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해왔던 것 같다. 그래서 정말로 너무 오랫동안 해온 생각을 바꾸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번 상황을 뒤집어 보려고 한다.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내가 알기로 인간은 천적이 없지만 반대로 모든 생물의 천적이기도 하다. 여러 무기나 도구들이 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 ‘당연한’ 상황이 우리를 너무 ‘당연한’ 강자처럼 행동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강자, 그리고 다른 생물들은 인간보다 약하다는 인식이 너무 당연하게 새겨진 것이다. 우리가 만약에 반대로 강자가 아닌 약자의 상황에 있었다면 처한 상황을 수백 번이고 반복해 생각하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강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아마 내가 그런 상황에 있는 것 같다. 나는 스스로 나 자신에게 ‘나는 강자야’하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다른 여러 생선 같은 것을 너무 당연하게 먹는 내 마음 속에는 강자라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반대로 생각해보자면 우리는 닭이나 소, 돼지가 우리를 먹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닭, 소 그리고 돼지는 우리에게 너무 당연하게도 고기로밖에 여겨지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런 생각들을 바꿀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내가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먹던 것을 생각해 보니 갑자기 나 자신이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지만 이왕 <낭송 열자>도 읽었겠다, 행동을 조금 바꿔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무 당연해 습관처럼 항상 하게 되는 나의 행동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에 나는 열자의 맥락을 따라가지 못했다. 나는 내가 나름 바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 멀리서 내가 어떻게 사는지 들여다 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제기한 강자와 약자 사이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왜 나는 이런 의문을 여태껏 제기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모든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상황이, 그리고 내가 하는 행동이 나는 너무 당연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너무 믿고 하는 행동마다 옳다고 생각한 것이 이런 생각이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열자처럼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 안에서 세상을 본다면 전혀 다른 시각이 생겼을 것이다. 당연했던 나의 행동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면서 내가 남보다 위에 있으며 안심했던 마음이 멀리서 보면 비열한 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우주가 돌아가는 속에서 인간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 것 같다. 열자가 우주 속에서 사람을 보고 있었다면 나는 내 안에서 사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이 하는 행동을 꼭 멀리서 보아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내가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 나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너무 안심하는 태도 때문에 어쩌면 안심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막상 내가 하던 것이 이상한 행동이었다는 걸 깨달으면 멍해진다는 것이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 나 자신에게 합리화 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 이런 것이 반복 되는 것 같았다. 이상한 것을 깨닫고, 또 객관적으로 보고 고치려 하지만 막상 하려고 하면 인정하기 싫은 마음. 이런 마음에 누군가 나에게 답을 제시해주길 바랬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이번에 『낭송 열자』를 읽으면서도 뭔가 알 듯 말 듯 했으나 열자는 방법을 제시하는듯하면서도 갑자기 이야기를 끝내면서 사라지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이번에 『낭송 열자』를 읽으면서 계속 이상한 생각이 줄줄이 이어졌다. 왜 인간은 누군가를 밑에 두어야 편안하게 느끼는지, 그리고 그런 마음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또 다른 마음은 무엇인지 등등 말이다. 여러 생각들이 겹쳐서 머리가 복잡해졌는데 나도 열자처럼 문제를 조금 멀리서 보려고 한다.
나는 항상 행동을 할 때 어떤 틀이나 답을 요구해 왔다. 그래서 어떤 것들을 보면, ‘왜 저렇게 하지?’ 내지는 ‘저건 옳지 않아’라는 판단을 내렸다. 너무 당연하게도 내가 하는 행동에는 모두 기준인 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준에 맞춰가다 보면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이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질문이 들었다. 이런 행동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열자가 하는 답을 내지 않는 철학이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나는 내가 무조건적으로 답을 내며 행동하는 데에 의문이 들고 있었다. 꼭 답이 있어야만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나는 왜 정해진 어떤 것을 원할까? 심지어 내가 마음속에서만 생각하고 있던 ‘답’이라는 것은 정말 나만의 답이었다. 내 주변에 누구도 나한테 이렇게 행동하라고 답이라는 것을 정해주지 않았다. 다만 내가 혼자 불안해서 답이라는 기준을 만든 것이다. 이런 행동들을 하도 반복하다보니 일상이 되어버려 차마 고칠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열자를 읽기 조금 어렵기도 했다. 그리고 아직도 답을 내는 것과 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정확하게 정의 내려야 할지 잘 모르겠다. 열자가 말하는 것이 어떤 정확한 답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틀에 갇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것을 한 가지 알게 되었다고 열자처럼 쿨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처음에 책을 주문해서 받았을 때는 정말 이름이 ‘자’로 끝나는 수많은 철학자 중 한 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재로도 그랬고, 내가 예상한 것도 어느 정도는 맞았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새로웠던 것은 열자가 나에게 답을 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이다. 답을 내지 않는 것은 답답한 것이 아니다. 그저 틀에 갇힌 나의 생각을 풀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조금 쿨하게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 열자도 읽었으니 열자처럼 행동해보려 한다. 무조건적으로 다가가며 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것으로 말이다. 파이팅 :)

 


허먼멜빌, 『모비 딕』,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모비 딕』
이름 없는
-
기세희


 

어원 (얼마 전 폐병으로 숨진 어느 중등학교 보조교사한테 얻음)
얼굴이 창백한 보조교사였다. 코트도 마음도 몸도 두뇌까지도 너덜너덜해진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그는 언제나 낡은 사전과 문법책을 내놓고, 세상에 알려져 있는 모든 나라의 화려한 국기가 요란하게 그려진 이상한 모양의 손수건으로 먼지를 떨어내고 있었다. 그는 낡은 문법책의 먼지를 떠는 일을 좋아했는데, 그 일을 하면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조용히 생각하는 듯 했다. (허먼멜빌, 『모비 딕』,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p.11)

발췌록 (어느 사서의 보조의 조수한테 얻음)
독자들도 보면 알겠지만, 부지런한 두더지나 굼벵이처럼 가련한 이 사서의 보조의 조수는 바티칸 도서관 같은 큰 도서관들과 이 세상의 노점들을 찾아다니면서, 성스러운 책이거나 속된 책이거나 간에 어떤 책에서든 그가 찾을 수 있는 고래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수집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발췌록은 고래에 관한 언급이라면 무엇이든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므로, 그 언급들 가운데 권위가 있어 보이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 발췌록을 진정한 고래학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
그러니 그대 가련한 보조의 조수여, 안녕히 가시라. 앞으로는 내가 그대의 주석자가 되겠다. 그대는 이 세상의 어떤 술을 마셔도 활기를 얻지 못하는 가망도 없고 핏기도 없는 종족에 속해 있으니, 그런 그대에게는 순한 셰리주조차 너무 독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그대와 한자리에 어울려, 그대처럼 참담한 기분을 느끼고, 눈물을 벗 삼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에는 눈물이 넘치고 술잔이 비게 되면, 그다지 불쾌하지 않은 슬픔에 잠긴 채, “보조의 조수여 단념하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걸 좋아한다. 세상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대는 감사의 말을 듣기는커녕 더욱 참담해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를 위해 햄프턴 궁이나 튈르리 궁을 비워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지만 눈물을 집어 삼키고 기운을 내어 7층으로 된 천국을 청소하면서, 오랫동안 제멋대로 굴었던 가브리엘과 미카엘, 라파엘 등 여러 천사를 몰아내고 그대가 오길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곳 지상에서 그대는 산산조각이 난 심장들을 부딪치고 있을 뿐이지만, 그곳 천국에서라면 깨지지 않는 술잔을 부딪치며 축배를 들 것 이다. (허먼 멜빌, 『모비 딕』,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p.13~14)

위의 글은 모두 728페이지의 책의 가장 앞에 나오는 부분이다. 흔한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그저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모비 딕』이라는 긴 기록을 읽고 유독 뇌리에 새겨졌던 부분이 있었는데, 다른 인물에 비해 비중이 너무 적어서 목차와 함께 나오는 인물들이 있는 부분이었다. 그저 책의 작자에게 고래에 관한 인용문을 준 인물에 대해 훑고 지나가는 부분일 뿐 이지만, 오히려 훑고 지나가는 부분이 더 관심이 간다. 조금 더 그 인물에 대해 내가 이어서 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훑고 지나가는 그 인물들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 하는 상태이지만, 그들의 살아생전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에 대하여 글을 쓰고 싶을 뿐이다. 비록 그것이 상상으로 지어낸 것이라도.
만약 내가 작자의 주변 사람이었다면 보조강사와 어느 사서의 보조의 조수에 대해 열심히 글을 썼을 것 같다. 물론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글을 쓰는 행동을 끝내야하지만.
난 궁금했다. 어째서 이런 인물들이 이 방대한 기록의 문을 열었을까. 생각을 해보고 또 해보고 계속 해 보았지만, 위의 질문을 매듭지을 융통성 있는 답을 아직 찾지 못 했다. 내가 생각한 이유는 대부분 말이 안 되는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 질문의 매듭을 지을 수 있는 답을 찾았다. 하지만 정확한 답은 없다. 위의 인물들이 왜 방대한 기록의 앞을 맡았는지는, 이미 명을 거두어 이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작자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난 그저 그가 알고 있는 진실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것에 대해 글을 쓰면 되니까(그가 특별한 이유 없이 위 인물을 썼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그것대로 글을 쓰면 된다. 그다지 완성도 높은 글은 아닐 테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비중이 없는 인물에 더 관심이 갔다(백설 공주에서 공주 보단 일곱 난장이에 더 눈길이 갔다). 그것의 영향인지, 지금도 주요 인물보다 훑고 지나가는 인물에게 더 관심이 간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글을 쓰고 있고,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더 쓰고 싶다.
지금 내가 막 마무리를 짓고 있는 『모비 딕』의 리뷰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다른 주요 인물들에 대한 것들은 내가 내킬 때 막무가내로 쓸지도(사실 관심이 있는 분야가 아니면 글을 쓸 욕구가 없다).
다만 『모비 딕』의 프롤로그는 이 책이 고래에 관한 책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모비 딕』이라는 기록의 맨 앞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고래에 관련된 문장과 나오거나 그 문장을 준 인물들이다. 만약 이 기록의 앞이 없었더라면, 그냥 무턱대고 고래를 잡으러가는 책으로 인식될 수 있다. 물론 고래를 잡으러 가는 내용의 책은 맞지만, 맨 앞의 내용을 잘 보면, 그냥 고래에 관한 것 이라면 무엇이든 나오는 책이라고 나와 있다. 물론 고래에 관한 것을 책의 내용과 잘 엮어서 쓴 것일 뿐(앞의 문장과 거의 연관되는 부분이 꽤 나온다. 찾아봐라).
난 이 책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려면 책 앞의 내용을 더 신경을 써서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람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부분에 관심이 있어서 뒤적뒤적 거리다 위와 같이 생각을 했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니, 너무 몰입은 하지 않길 바란다.







『모비 딕』
나는 고래에게 감탄하기로 했다
-
이혜린


 

그러므로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고래는 하나의 개체로서는 죽을 운명이지만 고래라는 종으로서는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고래는 대륙이 바다 위로 솟아나기 전부터 바다를 헤엄쳐 다녔다. 튈르리 궁전과 윈저 성과 크렘린 궁전 위를 헤엄치고 있었다. 노아의 홍수 때도 고래는 노아의 방주 따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세계가 네덜란드처럼 다시 홍수에 잠겨 쥐들이 존멸한다 해도, 영겁을 사는 고래는 여전히 살아남아서 적도 해류의 높은 물마루 위로 머리를 쳐들고 하늘을 향해 물보라를 뿜어댈 것이다. (허먼 멜빌, 『모비 딕』,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p.553~554)

몇 백 페이지나 되는 『모비 딕』을 읽고 나서 화려하고, 또 자세한 묘사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약 한 시간 반 동안 읽고 나니, 약간 피곤하기도 했지만 정말로 그 책의 분위기에 압도되는 것 같았다.
두껍고 커다란 책 속 많고 많은 문장들 중에서 굳이 이 문단을 선택한 이유는 고래의 생김새나 행동을 주절주절 설명한 것보다 훨씬 나에게 고래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특히 고래가 노아의 방주 따위는 돌아보지도 않았다는 구절이 약간 신에게 고래가 ‘너 따위는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게 못 된다’ 하는 장면을 상상케 해서 고래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신이 무슨 뜻으로 나를 움직일지 몰라서 매일 매일 잘 살게 해달라고 빌고 있는데 고래는 코웃음을 칠 정도라니 불안감이란 걸 모르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신은 내 뜻이 어떻든 신의 마음대로 해야 하는 존재다. 그런데 고래는 특히 모비 딕은 어쩐지 신의 통제권 안에서 벗어나 있는 느낌이 든다.
물론 사람들이 집요하게 추적하거나 어쩌다 해안가로 밀려 나가는 등 고래도 사고를 당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생물체에 비해 생존을 위한 신체 조건이 월등히 좋은 것 같다. 일단 고래는 바다에서 살 수 있다. 숨을 쉴 수 있고 헤엄도 빠르게 칠 수 있다. 바다는 참 넓고 그곳에서 숨을 쉴 수만 있다면 살기에 꽤나 괜찮은 곳이다. 게다가 땅은 물이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이 높지만 바다는 마를 가능성이 낮은 편이다. 왜냐면 바다는 허먼 멜빌의 말마따나 대륙이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나는 땅에서 사는 것이 두렵다. 여러 재난 때문에 물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 들어가면 숨을 쉴 수도 없고 잘 볼 수도 없기 때문에 그것도 무섭다. 땅은 왜 물이 잘 들어오고, 물은 왜 땅이 잘 침범하지 못하는가. 땅에 사는 나는 물에서 땅으로 오는 재해가 너무 무섭다. 그러나 내가 알기론 물에 사는 생물들은 땅에서 오는 재해로부터 그다지 피해를 받지 않는다. 땅에서 일어나는 산사태 등은 물에 사는 생물들에게 그다지 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큰 파도 등으로 황폐해진 마을과 죽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내가 다 숨이 막히고 물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든다. 이런 생각을 전에도 자주 했지만 모비 딕을 읽고 나서 더욱 더 물과 그 안에 사는 생물들이 부러워졌다.
때문에 가끔은 정말로 신조차 이 포유류와 다른 물고기들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 실제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노아의 방주는 사람들의 악행으로 신이 홍수를 일으켜서 성한 인간인 노아에게만 그 사실을 알려 주고 배를 만들어서 동물들과 함께 타게 해준 건데, 그나마 동물들도 한 종당 한 쌍밖에 못 탔다. 그런데, 고래와 물고기들은 물이 원래 자기들이 사는 곳이니 자유롭게 잘 살았다. 신은 왜 온 땅을 메마르게 하지 않고 물고기들에게만 유리하게 홍수를 내린 걸까?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신도 대적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이 물에 사는 생물들에게 있어서가 아닐까? 너무 음모론으로 점점 가고 있는 것 가긴 하지만 내 생각은 가끔 이렇게 흘러갈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물고기들도 바다에 사는 그 자체로 굉장히 나의 부러움을 샀지만, 특히 고래가 부러웠던 이유는 자신에게 대적할 만한 물고기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래 중에는 압도적으로 덩치가 큰 종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내가 선택한 문단의 구절 “고래라는 종으로서는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한다”에 크게 공감했다. 돌고래나 그런 종류는 고래지만 그렇게까지 위대해? 보이지는 않는다. 위대하다기보다는 놀라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몸집이 큰 것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것이 있다. 큰 고래는 앞에서 말했듯이 크기 때문에 감히 달려들지 못하는 상대가 많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절로 손이 모아지는 그런 분위기를 풍긴다. 어떻게 이런 고래를 직접 마주하고, 죽일 수 있을까? 소설의 생생한(?) 거의 실제로 내가 배에 타 있는 듯한, 잔인하고도 뭔가 징그러울 정도인 묘사는 한 번도 고래 잡는 걸 본 적이 없는 나를 토할 것 같이 만들었다. 실제로 난 이 책을 읽다가 토하고 싶었다. 감탄하며 읽었던 거대하고 경이로운 고래가 인간의 손에 의해 작살이 꽂혔다. 그래서 심장이, 윽, 터졌다.
이 부분에서 너무너무 속이 안 좋았다. 원래도 피를 잘 못보고 안 좋아하긴 했지만 나에겐 분위기가 신성하기까지 한 고래를 그렇게 만들다니...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그런 면에서 포경선 선장들도 고래에 비할 만큼 신기한 것 같다. 그렇게 거대하고 신비한 존재를 직접 쫓아다니고, 심지어 잡기까지 하니까 말이다. 죄의식이 엄청날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고래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아무리 쫓아다녀도 쉽지 않다. 그런데 모비 딕은 훨씬 더 잡기 어렵다. 신체조건 좋은 덩치 큰 고래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좋기 때문이다.
소설 속 에이해브 선장은 모비 딕에게 다리 한쪽을 잃은 후 모비 딕을 향한 광기(?)와 엄청난 증오에 사로잡혀 그를 잡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인다. 그러는 도중에 겁도 없이 여러 번 죽을 뻔한 위기도 넘기는 보통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인다. 또 선원들을 닦달하고 마구잡이로 대하며 자연이 주는 재앙 말고도 가장 가까운 일등항해사에게 죽임을 당할 뻔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모비 딕은 역시나 에이해브를 이긴다. 자연에서 살면서 사람만큼 도구가 발달한 게 아닌데(물론 사람보다 몸을 자주 쓰긴 하지만).
고래의 스케일이 정말 신기하고 이렇게 열심히 읽고 생각한 적은 처음이다. 마치 고래전도사가 된 느낌이 아주 심하게 든다. 그래서 만일 이 책 『모비 딕』의 목적이 작가와 주인공 이슈메일과 여러 선원들이 모비 딕, 그리고 다른 고래에게 느낀 경외심과 놀라움, 두려움과 신비함 등을 독자에게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성공한 것이 틀림없다.
전체 5

  • 2021-09-30 18:17
    깨어난 자 붓다, 미생물에 관한 이야기, 열자라는 철학자, 모비딕를 읽고 쓴 글들 재미나게 봤답니다. 한 권을 빼고는 다 읽어보지 못한 책이라 인용한 문장들과 그에 관한 감상평들덕에 여러 권의 책을 읽은 듯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 2021-10-01 08:01
    짝짝짝~ 끌려서 밀려서 이러케 저러케 쓰니까 또 이게 되네요^^ 궁시렁대면서도 필사해오고 글써오고 토론하는 희귀종 십대들을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엄마미소^^ 모듀들 찐수고 했어요~

  • 2021-10-01 11:25
    철학함에 있어서 나이 제한 같은 것은 없음을 보여주는 글들이네요! 솔직히 좀 놀라기도 했습니다. 세계에 대한 다른 이해를 이렇게 흥미로워할 줄은 몰랐거든요. 청소년 수업 때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는데 ㅋㅋ 다음 글들도 기대되는군요^^

  • 2021-10-04 14:38
    씨앗문장에서 시작하여 이렇게 멋진 글이 완성되었네요..... 훌륭하십니다라는 말밖에. 여행지에서도 차안에서도 줌으로 접속하던 성의의 결과인가요? ㅋㅋ
    저도 다음 글이 너무나 너무나 기대되네요.

  • 2021-12-23 18:19
    yjjigso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