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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서독 에세발표(7.23) 후기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7-27 12:05
조회
713
병신(丙申)년 동사서독 상반기 에세발표 후기


지난 토요일 아침 9시부터 저녁 11시 즈음까지 동사서독 상반기 최종 에세이 발표를 했습니다. 가까이에서 또 먼 곳에서 맘 써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해요. 당근 많이 깨졌고요. 어쨌든 잘 마쳤습니다. 아쉽게 한 분 결석 있었고요. 원고 매수가 모자란 울 ㅈ샘도 계셨지만(담 번엔 꼭!) 다들 ‘나의 에세이’를 들고 만났습니다.
소세키 시즌까지 포함해 장작 5개월 가량을 함께 보냈어요.(3월 5일 개강~) 20대 ㅅ군의 말마따나 남들 ‘불금’ 보낼 때 ‘풍금’ – 풍요로운 금요일. 무슨 인연으로 책을 읽으며 풍.요.롭.게 금요일을 보낸다는 표현. 기이한 억울함 함유. – 보냄서요. 원래 모든 고통은 지나고 나면 아름답게 채색되는 법. 힘들었다는 한 학기도 또 에세 시간도 곧 미화되겠죠. 그리고 어째선지 ‘또’ 해야겠다는 이들이 있겠지요. 그렇다면 또 속아서 다음 동사서독 때 만나요. 이왕 시작한 거 중도이폐(中道而廢)마시고 가보아요. 물론 다른 갈 길이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진 않습니다. 방학 잘보내시고요!

아래는 에세발표 기간 동안 들었던 생각 몇 가지를 남깁니다. 제 생각에 빠져 있어서 1, 2에는 그걸 쓰고요. 3에는 에세 발표 때 채운샘 등에게서 들었던 몇 가지를 옮겨보았어요. 뼈에 새기자는 각오에서?-.-; 그럼.


1. 쓰게 하는 것

이번 에세이 발표를 마치고 두 마음이 같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 ‘어쨌든 썼구나’. 아무래도 이번에는 쓰지 못할 것 같아 많이 불안했던지라 어쨌든 써서 함께 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습니다. 동시에 ‘이게 뭐라고 기어코 쓴 것인가’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말했다시피 이번에는 어째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에세이를 쓰는 일이 중요한 것 같지도 않고, 뭣 보다 다른 일들에 훨씬 더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에세이를 쓰려고 앉아 있는 것은 제 무능과 자존심 - 이걸 하면 다 괜찮아 질 것이다는 식으로요...? - 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쨌든 해치우긴 해야하지 않겠냐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물론 제대로 해치우지도 못하고, 집중도 하지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몇 일을 보냈습니다. 아무래도 불안의 산물이고 두려움의 산물이 아닌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채로 ‘될대로 되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이거에라도 매달려야 겠다 해서 쓰고 만 것이 이번 에세이 인 것 같았습니다.

에세이 발표 때 채운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해본 것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왜, 사람의 약함에 대한 이야기 있었잖아요.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어떻게든 의지처를 찾게 되는 인간. 종교란 별 게 아닙니다. 신, 종교 지도자에게 자기 모든 욕망, 환상을 투사하는 것. 그래서 그것이 무너질 때 자신 역시 함께 무너집니다. 꼭 종교가 아니더라도 특정 인물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투사해버릴 수 있듯이 -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역시 종종 그렇게 되지요 - 어떤 활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공부 역시 종교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공부를 하고 글쓰기를 하는 것들이 그 자체 자유일 수는 없지 않나.

아Q는 자기의 온갖 기대, 욕망, 환상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혁명을 전유했습니다. 공부나 글쓰기도 그런 것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우위’에 오를 수 있는 마지막 출구 같은 것이요. 에세이를 잘 쓰고 싶다는 제 마음에는 아Q 못지 않게 이것만은 날 살릴 것이다, 이걸로는 좀 의기양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 없지 않았을지도요. 물론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도 참 단순합니다만.

이번 학기를 보내고, 세미나를 하고 연구실 생활을 하면서는 다른 좋아하는 것들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모르진 않았으나 사람들하고 이야기하고 맛난 것 먹고, 이런 것들이 훨씬 좋습니다. 물론 같이 글 읽는 것도 좋아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째 점점 애써서 공부할 것이 뭐있나,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공부야 맨날 하는 것 아닌가, 에세이는 어제도 그제도 그그제도 썼고, 담 주에도 다담주에도, 다담 달에도 또 쓸 것이고. 어차피 대단하게 잘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에세이가 일상이 된다는 것이 딱 이런 걸까요. 쉽사리 내칠 수도 없지만 내버려 두어도 괜찮은 것으로 다가왔어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같았다가 이제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 없는 것이 된 것 같습니다. 나를 속박하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했고요. 공부든 에세이든 대체 뭘까요.

하지만 딱히 달리 할 일도 없고 “어쨌든 그래도 써야한다. 잘 써야한다.”는 당위가 없지 않아 이번 주에는 시간을 백지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알바를 다 빼고요. 신경 써야 할 여러 일들은 다 내버려뒀어요. 힘이 좀 빠진 것도 있었는데 마침 “에세이 기간”이라는 명목이 생긴 것. 아무 것도 하기 싫은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해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얼마 동안은 스스로를 좀 속였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에세이에는 집중해야 하니까….” 하지만 에세이에 집중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뭘 어떤 식으로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책상 앞에 있었던 몇 일, 몇 시간은 ‘에세이 쓰고 싶다. 써야한다’는 생각이 뻥인 것을 잘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이상해요.

아무 것도 하기 싫은데 ‘에세이만은 쓰고 싶다’는 상태가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일들이여, 다른 이여, 마음이여) 나를 건드리지 마라.’하면서 소세키나 루쉰과는 만나고 싶다는 것이 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에세이를 쓴다고 하면서 쓰고 싶지 않은 상태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요. 어쨌든 막판에는 정말 겁났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못 쓰려나... 그럼 부끄럽고 미안하긴 한데... 어쩌지...

에세이를 쓴다는 건 뭘까요. 그리고 에세이를 쓰게 하는 것은 뭘까요. 정말 못 쓸 것 같았었는지 쓰고 나서 이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쓰고 싶지 않고 또 못 쓸 것 같았는데 쓰게 된 것일까. 그렇게 쓰기 싫었던 것은 뭔지. 이 얄궂은 것이라도 내밀려고 하는 건 또 뭔지. 이런 것이 같이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인가요. 아니면 같이 공부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9시에 우르르 올라온 에세이 몇 개를 조금 읽고선 조금 더 쓸 수 있었고요.(-.-;) 새벽을 같이 보내 준 가깝고 먼 이들을 생각하며 조금은 더 의자에 있었습니다.(ㅋㅋ) 매수를 채워 9시에 인쇄를 하고 자리에 앉아있을 때는 좀 기뻤고요. 왠지 조금 더 같이 공부할 수 있을 것 같다?!

괜히 의미부여 하게 되는군요. 아무튼 같이 에세이를 쓰고 세미나를 하고, 이 모든 일들이 내 결심으로 되는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진짜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좀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다음 시즌은 또 누구와 어떤 일들과 함께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2. 살게 하는 것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한가로이 거닐고, 두루미 길게 울음 울고, 흰 구름이 피어나고…….”(루쉰, <일각>, 《루쉰전집3-들풀》) 이런 것들이 아니다!
후기를 쓰려니 저 내용이 다시 떠올랐어요. (후기에 본인 에세 내용을 언급하니 민망합니다만...)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예쁘고, 좋고, 내게 편안하고 익숙한 그런 것들이 아니다.
살고 싶고 갖고 싶은 좋은 것들 속에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도리어 스스로를 죽게 한다고요. 자기를 살게 할 것 같은 아름답고 좋은 것을 향해 돌진하게 되지만 그 때 사실 스스로를 방기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의존하지 않고는 못견디겠다는 그 약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요.

에세이 시간 때에 ‘깨진다’는 일은 그러므로 기쁜 일입니다. 에세이 장에 노출(?)되는 것도요. 낯선 글자들, 생각들을 만나면서 부끄럽고 앓게 될 때 그 때 우리 좀 살아 있는 것?;; 때때로 분명 따뜻한 말들이 필요합니다만 그것이 도리어 자기를 옴짝달짝 못하게 하는 것이기도요.



3. 에세이와 관련해 오고간 내용들을 메모한 것

(발표자와 내용이 매치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기억+우연에 의존한 것이고 샘 이야기도 있지만 제 생각이 섞인 것도 있어서요. 후반에 누구 발표 때 이야기한지 모르는 메모들 따로 남겼습니다.)

- 현옥샘: 사고의 과정을 쳐내고 과정의 핵심을 남기는 연습.

- 민영: 소세키나 루쉰이 말하고 있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텍스트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분석의 핵심에 두고 있는 텍스트가 뭔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왜 사랑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 각주 표시 주의, 띄어쓰기 주의 / 하고 싶었던 말을 추측해 볼 수는 있지만 인용한 텍스트들로부터 충분히 말해지지는 않는다.

- 민호: 1번에서 문제제기한 것 까지 매우 좋았다. 2번 제목 ‘실패자의 자리에 선 지식인~’인데 왜 지식인, 왜 하필 지식인의 전락을 다루고 있는 것인가. 그럴 거라면 차라리 루쉰 및 소세키에게서 ‘지식인’에 대해서 쓰는 게 낫지 않나. 너에게 전락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래서 결국 결론이 없어지지 않았나.

- 종은샘: 에세이 매수를 채우도록

- 락쿤샘: 문장을 따라가기 힘들다. 문장의 연결이 생각의 흐름을 보여주는데 단절이 많다. 마음이 몸보다 앞서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지. 자기 글을 자기가 끌고 가는 느낌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버겁게 느껴지만 따라 읽는 사람에게도 어렵다. / 자신을 폄하하는 마음은 욕심과 같이 간다. 마음을 편안·느긋하게 갖고 생각을 차근차근 가다듬도록.
감자: ‘본다’는 것이 뭔가. 차라리 ‘시선’을 문제시해야 했던 것 아닌가. 소세키에서 본 ‘본다’는 문제를 식인의 시선 그리고 <고독자>에서 할머니, ‘나’ 등과 연결시키는 것에는 좀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 소세키와 루쉰에게 공동지반이 되면서도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을 잡았어야 했다.

- 태욱샘: 선생님에게 “내면의 ‘어둠’을 직시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면의 어둠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 어떻게 하면 되는가. 글에 자기 고민이 없으면 그 글은 거짓인 것 아닌가. 자기 생각 하나를 돌파하는 게 중요하다.

- 은남샘: 선생님께서 일상에서 겪는 죽음과 병의 문제들에 대해서 좀 더 허심탄회하게 썼으면 좋지 않았을까. ‘죽음과 일상이 다르지 않다’고 하지만 실상 작은 상처 하나에도 죽을 것 같고, 당장 죽음을 선고 받는다면 무너질 것 같은 게 우리 모습이다. 이 괴리는 뭔가. / <죽음을 슬퍼하며>와 <우미인초>를 가지고 왔는데 전체 맥락과 다소 무관하다. /소세키, 루쉰이 죽음을 그리는 방식이 죽음에 대해 다른 생각의 길을 갖게 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삶, 죽음에 대한 그들의 글을 이해하려면 그 강도로 사유를 거쳐야 한다. 건너 뛰고 아름다운 결론에 도달하려 하는 것이 글 쓰면서의 욕심이다.

- 정옥샘: 뒷 이야기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쯔쥔을 혁명적으로 읽는 것은 좀 무리가 있는 것 아닌가. ‘사랑’과 정체성 확립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건가.

- 수영: 문제제기 모호하다. 마음을 ‘감당’한다는 말을 썻는데 그것이 ‘책임을 진다’, ‘지킨다’ 이런 것이랑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느낌’이라는 것 역시 모호하다. ‘마음’이랑 같은 건가 다른 건가. 소세키에서 읽은 ‘마음’과 루쉰에서 읽은 지점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설명되지 않고 있다. 텍스트 분석이 더 필요하다.
어째서 다들 그렇게 자기 문제를 아끼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싶으면 바꾸도록 해야지. 이상하게 붙들고 있다. 나중에 가면 자기만 그 문제가 중요하고 아무에게도 설득되지 않는다.

- 건화: 왜 하필 ‘정치성’인가. 문제의식 명확히 해야 한다. ‘머물다’가 아니라 ‘머묾’. 소세키를 나름대로 문제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문제화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맥락화 한다는 것. 소설 속에서 소세키가 던지고 있는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내 문제가 소세키의 문제와 공명할 수 있어야 한다. ‘불화’든 ‘정치성’이든 어떻게 개념화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 소민: 중요한 문제이다. 들뢰즈가 자본주의를 ‘냉소의 시대’라고 했는데 그 때 냉소가 딱 이런 것이다. 냉탕 온탕을 왔다 갔다 하게 된다. 희망을 갖게 하고 거기서 매번 미끄러지게 하는 메커니즘, 근본적으로 행복할 수가 없다. ‘혁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혁명이 일어나면 뭐 할 것인지를 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부자’가 아닐 때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면 부자일 때에도 마찬가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 존엄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절망에 절망한다’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것 같다.
재원: 지금까지 쓴 것 중 가장 굳. 푸코는 근대의 바깥으로서의 광기 그리고 근대에서 배제된 것으로서의 광기를 구분했다. 너가 말하는 ‘광기’란 어떤 것인가. 이치로의 광기, 루쉰이나 소세키에게서 말할 수 있는 광기 등이 착종되어 있다.

- 소담: 지난학기에 쓴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구경꾼’에 대해서 단순하게 재단하고 있지 않나.

- 혜원: 문제의식 모호하다. 도입에 ‘나를 구성하는 타자들’ & ‘타자의 시선을 통해 나를 본다’는 것은 다른 내용이다. 아Q가 의기양양해서 뭐 어쨌다는 거냐(맥락은 까먹음). 이야기 속 타자를 통해 ‘나’를 확인한다는 것은 뻔한 소리다. 소세키는 당시 서구권의 소설들을 충분히 읽고 있었다. ‘무의식의 흐름’에 대한 것 역시 소세키에게 낯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소세키의 《갱부》를 가지고 ‘소설이 아니지 않나’ 문제 삼는 것은 소세키를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 아닌가. 내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이런 것이다~를 말하고 있는 정도에 그친 것이 된다.

- 기타 등등.

- 내가 가진 개념으로 루쉰을 뭉갠다.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읽은 것들 속에서 생각을 가다듬으며 언어를 끄집어내야 한다.

- 글쓰기의 핵심 중 하나, 전체 분량 속에서 에너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몇 페이지를 쓰든 힘 분배를 해야 한다. 뒷심이 딸리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에 대해서 엄청 고민해야 한다. 가령 ‘표상’이라 할 때에도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상인지 ‘언어표상’이라 할 때의 그런 상인지 다 다르다. 근대에 ‘이미지’가 문제 된다 할 때에도 그것은 ‘스펙터클’로서의 이미지. 단순하게 ‘상’, ‘이미지’랑 똑같은 것으로 보고 쓸 수 없다.

- 글 쓰면서 뭐가 남았나. 루쉰과 소세키에게서 이번 학기 동안 배운 것은 무엇인가.

- 어째서 비문 : 비문은 생각이 정리가 되어있지 않은 채 쓸 때 나타난다. 생각은 과잉되어 있는데 문장은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생각들을 침착, 촘촘하게 풀어내는 연습 필요.

- 생각은 대개 망상들이다. 문장은 그런 생각들이 차분하게 나오는 그 만큼 가능하다. 이 점에서(??) 글은 곧 몸이다.

- 의지할 것이 없어지는 것 같은 순간에도 인간은 자신이 가장 의지하고픈 데에 의지한다. 약함이란 이런 것.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도 그 하나다. 누군가에게 자기 욕망, 의미…… 그 모든 것을 투사한다. 그리고 내가 의지하고 있던 것이 무너졌을 때 ‘나’ 역시 무너지는 일이 생긴다. 냉소란 이런 것이다.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시니컬한 반응. 힘든 상황에 처하면 어째서 스스로 돌파할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일까. 스스로를 매번 ‘피해자’로 두는 것은 어째서인가.

- 지금 여기에서 소세키를 문제로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문제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을 때, 주제를 장악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기만 한다.


4. 끝

쓰고 났더니 왜 저리 혼자 생각한 것만 늘어놨나 싶어 부끄러워지는군요.(-.-) 현장 소식이 궁금하실 분들이 분명 계실텐데... 까묵었습니다(ㅎㅎ).
이번 에세이를 채운샘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40대의 정체, 30대의 약진, 20대의 ‘머묾’? 사실 세대로 나눌 수 있는지는 모르겠고 몇몇 아쉬운 에세이 그리고 빛나는 에세이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재원언니, 민호, 소민의 글, 많이 짱짱!

소민은 루쉰의 희망과 절망을 가지고 자신이 대안학교에서부터 겪었던 혁명이나 대의에 대한 고민에 대해 써주었어요. ‘희망이 허망하다, 절망이 그러하듯’ 이에 대해 더 풀어주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한 학기 동안 배운 것을 바탕으로 대안이나 혁명에 대한 기존의 자기 생각을 다시 점검해 보는 과정 매우 좋았습니다. 이렇게 경험을 재 사유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민호 에세이 역시 읽고 나면 기쁨을 얻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용을 떠나 공들인 에세, 책을 열심히 읽었고 나름대로 알아내고자 분투한 흔적은 어떤 식이든 글에 남는가 봅니다. 채운샘은 ‘평가자’의 태도를 아직 버리지 못했다고 하시긴 했습니다. 이건 민호가 더 치고 나가겠지요. 암튼 그래도 관심가는 점에 대해 성실하게 물고늘어간 점이 감동적이였어요. 물론 민호의 전락은 뭔지, 전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갖가지 더 궁금한 점들은 주었습니다. 아쉬운 만큼 다음 민호 에세이 더 읽고 듣고 싶은 것이지요. 군대 잘 갔다 오시길!
재원언니 역시, 전 제대로 ‘우와’했습니다. 나중에는 어째서 그렇게 우와했나, 싶긴 했습니다만(-.-;;) 역시 내용을 떠나 책에 충분히 들어갔다 나왔고 자신이 듣고 배운 것들을 성실하게 차근차근 풀어 나간 글이 주는 감사함인 것 같습니다. 언니는 꽤나 싸움꾼이겠다,,, 하는 이상한 생각도 했어요.
다른 글들에도 크게 작게 많이 배웠습니다. 잘된 점은 잘 된 점대로, 잘 안된 점은 잘 안된 점대로 여러 가지 생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것도 어렵고, 그 전에 문제 제기자체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소세키나 루쉰을 꼼꼼히 읽기가 정말 잘 되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대충 자기 생각이나 이미지로 덮어버리는 일이 흔한 것 같았습니다. 역시 아쉬운만큼 다음 에세이를 기다리게 되네요. 적어도 지금은요.

여러 가지로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방학 잘 보내시고요. 몸 잘 챙기시고요. 또 뵈어요!
전체 3

  • 2016-07-28 13:36
    어쩐지 생략된 부분이 많은 것 같기도,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후기네요. 항상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서 누구보다 많이 고민하시는 것 같아요. 공부가 "‘우위’에 오를 수 있는 마지막 출구 같은 것"일 수 있다고 하신 부분 중요한 문제인 것 같이 느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16-07-28 19:03
    나중엔 어째서 그렇게 우아했나 부분은 왜 쓴 거냐 콩! 싸우자!!!!! ㅋㅋ 전개인적으로 첨부터 끝까지 제대로(?!) 참석해본 에세이발표가 처음이었고, 다른사람의 스타일 다른 다양한 글을 보면서 배우는게 많다는 사실을 배웠어요.

  • 2016-07-29 21:27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이래저래 그대 같은 사람이 내 주위에 있다는게 참으로 느껍고도 감사하달 밖에~~~ ^^ 조만간 50대 그룹이 되면 그때서야 40대의 정체에서 헤어날는지~~원ㅠ 암튼 잘 읽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