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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톡!톡! 3강 미술은 사기다 : 백남준 후기

작성자
우선
작성일
2016-09-30 01:09
조회
567
뒤샹의 레디메이드와 워홀의 미디어의 이미지를 너머 백남준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어릴 땐 백남준이 한국 내에서 신성시 되는 듯한 이미지가 좋지 않아 관심조차 없었는데, 우연히 올초에 현대갤러리에서 주최한 백남준 전시를 보고나서 부터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작업을 보게 되면 텔레비젼들의 형태들이 조형적으로 시선을 끌지만 쉴틈없이 펼쳐지는 텔레비젼 속 형형 색색의 이미지들도 시선을 끌었습니다.   수업에서 보여주신 작업들의 대부분이 전시 되었는데, 전시회에서 본 작업들에 대해 공부하게 되어서 반갑기도 하고, 재미 있었습니다.

백남준은 어릴적부터 일본, 독일, 미국등에서 공부를 하고 작가가 된 후엔 미국에서 주로 작업을 했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유목적임과, 무국적성을 추구 했다고 합니다. 이런 점은 그의 다양한 작업들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백남준! 하면 비디오 아트, 비디오 아트! 하면 백남준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비디오 아트로 유명해 졌고  능한 사람입니다.

잠시 그가 활동했던 시절을 둘러 보자면

그는 ‘네오 다다’라는 다다의 정신을 따르는 변주된 다다, 즉 플럭서스(흐름)그룹의 일원이었습니다.

여기서 플럭서스는!

플럭서스 운동 이라고도 불립니다.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를 중심으로한 그룹으로 안티아트(반예술) 그리고 예술을 해체한다는 면에서 이전의 ‘다다이즘’과 길을 같이 한다고 합니다. ‘네오-다다’는 이전의 ‘다다이즘’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장르들을 아우르며 작업을 했습니다.

보통 플럭서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해프닝’에 가까운 퍼포먼스 작업을 했지요.

퍼포먼스, 해프닝 이라는 것 자체가 판매 불가능성과 현장성, 우연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물질화, 상업화 하는 예술에 반대하는 행위 그리고 우연과 일회성을 추구하고 욕망과 정서를 검열하는 방식이기도 했다고 해요.

또 이것을 행위하는 것이 관객과 예술 그리고 예술가의 거리를 무너뜨리는 요소가 되었기 때문에 예술이 신성시 됨을 반대하는 행위 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플럭서스의 일원으로 우리에겐 음악가로 알려진 존케이지와 존레논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는 오노요코가 있습니다.

존케이지의 대표 작업이기도 한 프리페어드 피아노(prepared piano)는 관람자 모두가 피아노의 선율을 기대하고 있을 때, 반대로 피아노의 소리가 아닌 피아노 라는 개념에서 오는 소리를 연주(?) 하며 피아노 소리의 영역에서 벗어난 작업을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백남준의 작업으로 총체 피아노 라는 작업이 있는데, 채운쌤의 말을 빌리면 이것을 들뢰즈화 한다면 피아노의 기능이 탈 영토화 되는 것이라고 해요. 저는 들뢰즈를 잘 몰라 피아노라는 어떤 물체의 개념 ,일반적 인식에서 벗어난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갔습니다.

이외에도 백남준은 소리에관한 그리고 연주에 관한 연구로서 ‘~을 위한 선’ 이라는 제목으로, ‘선(zen禪)’시리즈 작업을 시작하면서 연주의 개념이 얼마나 다양해 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음악소리 라는 것의 개념을 확장 시키는 실험적 작업을 했습니다.

또, 존케이지의 <4분 33초>를 오마쥬한 작업으로 카메라를 한곳에 설치 해두고 빈공간을 계속 찍는 작업을 했어요. 존케이지의 작업에서 4분 33초간 피아노 연주가 아닌 공연장 속에서의 소음을 음악으로 만든다는 개념을 얻어와 카메라로 빈 공간을 찍어 빛에 보이는 먼지를 상영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필름을 위한 선(禪)' 이라는 제목으로  ‘비어있음’과 ‘차있음’의 경계를 보여주는 작업입니다.

백남준의 텔레비젼 비디오 작업들로 가보자면 자연에 관한 작업들이 몇 있는데 그중 ‘티비 달’과 ‘티비 정원’이 있습니다.  ‘티비 달’의 경우는 티비 속에서 달들의 이미지들을 계속해서 출력해 내면서 문명과 자연의 경계가 사라진 것 처럼 달의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티비 정원’은 텔레비젼의 이미지들이 마치 자연의 일부 인 것 처럼 보여지는  것에서 자연과 문명을 넘어서는 마치 문명이 자연의 일부인 양 보여집니다. 이것들은 실제와 이미지에 대한 역전 이라고 합니다.

실제와 이미지에 대한 역전의 다른 작업으론 ‘실제 물고기/생방송 물고기'(실제 제목입니다.)이 있는데 이는 두개의 텔레비젼에 한쪽에는 실제 어항을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그 실제 어항을 촬영해서 실시간으로 영상이 재생되는 작업입니다. 작업을 직접 보게 된다면 어떤것이 실제인지에 대한 의심이 들 정도로 두개의 이미지가 무척 유사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것이 실제인 것인 가에 대한 논란이 생기게 됩니다. 즉 원본과 카피의 경계가 무너지게 되면서 원본과 복제의 진실관계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원본도 복제도 없는 것 이미지 자체가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 하게 됩니다.

<티비 정원>                                                           <실제물고기/생방송물고기>                                                                                                   

우리나라에 역으로 백남준의 이름을 알리게 해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위성의 발전으로 동시적으로 한 영상을 볼 수 있어 서로 다른 나라에서 같은 방송을 틀었던 작업입니다. 이는 동일한 영상을 위성으로 한꺼번에 쏜다는 의미에서는 동시성을 가집니다. 하지만 나라와 나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시간과 공간의 차가 있기 때문에 더불어 동시적이지 않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백남준의 가장 포인트적인 작업으로 ‘티비 부처’가 있습니다.

티비는 서양의 물질 문명의 대표적 상징이라면 부처는 동양의 정신적인 것으로서 그 둘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설입니다.

하지만 불교적으로 풀이하자면 부처가 보고 있는 것은 ‘시간’입니다. 영상이 전파를 통해 텔레비젼으로 옮겨지면서 붓다가 텔레비젼으로 보는 것, 그리고 영상이 흘러가는 것에 시간차가 생깁니다. 텔레비젼 속의 입자들이 멈춰 있는 것 같지만 계속 움직이면서 그 속에서는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만들어’진’ 것만을 보게 됩니다. 매번 붕괴하고 생성하는 텔레비젼의 입자들이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계속된 ‘찰나’의 연속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성과 소멸이 계속되는 찰나는 불교에서 보면 삶과 죽음을 함께 의미 합니다. 불교에서는 죽음도 삶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티비 부처에서 부처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삶과 죽음이 연속되는 '찰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티비 부처’ 작업에 부처가 아닌 다른 조형물을 놓았을 때에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그 예로 로뎅의 ‘생각하는 상’이 티비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로뎅의 ‘생각하는 상’은 ‘지옥문’의 꼭대기에서 ‘지옥’을 내려다 보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 조형물이 텔레비젼 앞으로 가게 되면 그는 지옥을, 그리고 지옥 속에 있는 자신을 보는 의미를 가지게됩니다.

<티비부처>

앞선 뒤샹이 대상을 재현하는 것에서 벗어나 레디 메이드(공산품)를 전시하면서 어떤것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 주었다면, 워홀은 미디어를 적극 활용해 원본과 복제물들의 구분과 미술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백남준은 모니터에 이미지를 생산하면서, 카피와 원본에 대한 구분조차 사라지게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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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30 12:17
    오~ 사진까지!! 공들여 쓰느라 늦어진 것으로..? ㅋㅋ / 암튼.. 저는 지금시대에도 깜짤 놀랄 것들을 그 옛날에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싸워가며 펼쳐냈다는 게 두고두고 대단해보입니다. 한국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것과 달리 한국인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것도 새롭게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