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강좌

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3강> 반시대적 고찰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0-13 10:39
조회
654
1. <반시대적 고찰>

이번 주에는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반시대적 고찰>은 지난 주에 배웠던 <비극의 탄생> 다음에 발표한 책으로 젊은 시절의 니체가 쓴 책입니다. <반시대적 고찰>은 세 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첫 번째 글과 두 번째 글에서 니체는 당대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첫 번째 글에서는 다비드 슈트라우스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당대의 속물교양을 비판하고, 두 번째 글에서는 헤겔 철학의 유행으로 팽배해 있던 독일의 역사주의를 비판합니다.

그런데 니체의 이러한 비판을 마주할 때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니체는 흔히 말하는 ‘모두까기인형’이 아닙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서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될 경우에만 말해야 한다 ; 그리고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 - 다른 모든 것들은 잡담이고 문학이며 교양의 부족이다. 내 저서들은 오직 나 자신이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채운 쌤 강의안 재인용)

채운 쌤은 니체의 글쓰기가 회복중인 병에 대해서 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는 ‘회복기에 있는 사람만이 병의 감사함을 알 수 있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병을 앓지 않은 자도, 병에 머물러 있는 자도 아닌 병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 있는 사람만이 병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회복 중인’이라는 말이 중요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니체가 자신이 ‘오직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할 때조차 그것은 자신이 이미 떨쳐낸, 자신과 무관한 어떤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식주체의 제한된 지평을 드러내는 니체 자신의 계보학적인 방법과도 닮아 있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서 말할 때 마치 풍경을 감상하듯이 우리 자신을 그것의 바깥에 위치시킨다면 우리의 제한된 인식의 지평을 망각하게 되고 더 없이 편협해질 것입니다. 또한 무언가의 한 가운데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있을 때에는 그것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죠. 그러니까 니체는 주변에, 경계에 처해 있는 사람만이 무언가 말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보통 인식은 매우 정적인 활동으로 이해됩니다. 인식되는 대상으로부터 작용을 가장 적게 받을 때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니체에게 인식은 그런 정적이기만 한 행위는 아닐 것 같습니다. 니체에게 인식이 어떤 상태들을 이행할 때 가능해지는 것이라면요.

‘반시대적 고찰’의 ‘반시대적’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독일어는 ‘unzeitgemäß’입니다. 그런데 ‘unzeitgemäß’는 우리가 ‘반시대적’이라고 할 때처럼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고 시대를 거스른다는 느낌 보다는 ‘때에 맞지 않는’이라는 뉘앙스를 지닌 단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니체는 시대를 거부하고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는 자리에서가 아니라 시대로부터 조금 비껴난, 시대의 주류적 코드로부터 이탈한 자리에서 자신의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2.다비드 슈트라우스와 교양

니체의 신랄한 비판이 시작됩니다. <반시대적 고찰 1>에서 그는 다비드 슈트라우스로 대변되는 당대의 속물 교양을 비판합니다. 이때 니체가 비판하는 현대인의 특징은 바로 내면과 외면의 불일치입니다. 니체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고유한 내면성이라고 부른 것에서 소유의 대상으로 전락한 앎을 발견합니다. 니체는 근대적 교양인이 “어떤 노인이 스토아 학파에 충성을 맹세한 이상 그가 어디 있든 무슨 일을 하든 스토아 학자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저 소박한 지조를 가지고 살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지식은 그 자체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책장에 꽂힌 책처럼 인간의 내면에 쌓이는 어떤 것이 된 것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이것은 일종의 소화불량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니체의 눈에 토끼를 통째로 삼킨 뒤 꼼짝 않고 햇볕에 누워 있는 뱀처럼 그런 소화불량 상태에 깊은 만족감을 느끼는 병적인 동물로 비쳤을 것입니다. 이때 지식은 그 사람의 역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무능력을 구성합니다. 교양인들의 지식은 그들이 몸에 달고 다니는 돌멩이와 같아서 구체적인 순간들에 반응하는 능력을 상실시킵니다. 소유물로서의 지식은 삶의 불확실성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외면하고 그것들로부터 회피하게 할 것입니다.

니체의 비판은 지식인들의 나약함이나 삶에 대한 무능력함 자체를 향해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가 주목했던 것은 이러한 소화불량 상태에 머무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는 당대의 지식인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인간의 무력한 상태(소화불량)를 나타내는 소유된 지식이 ‘합리적 지성’이나 ‘객관적 학문’이라는 모습으로 전도된 채 나타나는 현상이었을 것 같습니다.

슈트라우스에 대한 비판 역시 이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슈트라우스는 헤겔 좌파의 핵심적인 인물로 전통적 기독교를 비판하며 새로운 이성종교인 낙천주의를 전파했다고 합니다. 슈트라우스가 말하는 낙천주의는 곧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고 어떤 현실 바깥의 구원에 대한 신앙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이것은 신의 자리에서 신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역사나 인간의 지성 등과 같은 다른 것들을 앉히는 행위입니다. 니체가 삶 자체라고 여겼던 몰락, 고통, 악, 소멸을 회피하고 외면하며 미래의 구원에 대한 상상으로 그것을 대체한다는 점에서 슈트라우스의 새로운 신앙과 전통적 기독교의 신앙은 동질적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문제는 왕좌에 무엇을 놓을 것인지를 두고 똑같은 싸움을 계속 할 뿐이겠죠.

채운쌤은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기독교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전제하는 평등이 기독교적인 평등 관념(신 앞에서의 평등)과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다른 가치들은 쉽게 냉소의 대상이 되지만 ‘평등’ 만큼은 그렇게 쉽게 부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만큼 평등이라는 관념이 우리가 속한 사회체의 핵심적인 동력이 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역사적으로 집단을 지배해 온 것은 항상 한 줌의 사람들이었는데 평등이라는 관념은 나머지 모든 이들로 하여금 그 소수의 자리를 욕망하게 만듭니다. 불평등을 문제 삼으며 사회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담론을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원한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그 자리에 대한 욕망을 나타내며, 그러한 욕망에 의해 그들 모두는 평등을 외치면서 불평등을 낳는 배치를 재생산합니다. 이것은 강하고 건강하고 귀족적인 것에 대한 기독교적 원한감정과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3.역사주의

우리는 기억하는 능력이 제 기능을 못할 때, 아니면 어떠한 한계에 도달했을 때 망각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망각을 자체로 능동적인 작용으로 여겼습니다. 망각능력은 건강함을 증명하며 오히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자, 역사적으로 느끼는 자야말로 잠을 자지 못하도록 강요당하는 사람이며 되새김질로만 살아가는 동물과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니체의 눈에 당시의 독일은 역사의 과잉 속에 있었으며 역사라는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망각은 기억에 대해서 우선적이며 오히려 기억은 인간이 약속할 수 있는 동물로 길러지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니체는 인간의 역사에서 기억술은 고통, 고문과 관련된다고 말했습니다(<도덕의 계보>). 또한 르네상스 이전까지만 해도 역사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마천의 『사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서의 형식과는 많이 다르죠. 정말 거기에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선적인 시간관념 속에서 역사를 보는 방식이 발명된 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일어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종류의 기억, 역사적 관점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것은 조형력입니다.

니체는 역사적인 태도와 비역사적인 태도를 구분합니다. 역사적인 태도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소화불량 상태, 기억에 짓눌린 상태를 말합니다. 비역사적 태도는 지금 현재적으로 생성되는 것들에 주목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 사이에서 현재의 삶을 조형해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니체가 당대의 역사주의를 비판한 것은 단순히 과거에 얽매인다는 차원의 문제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비판하는 것은 역사라는 지평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는 무력함입니다.

하나의 지평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능력이 없거나, 낯선 지평 안에 자신의 관점을 포함시키기에는 너무나 이기적이라면, 그것은 지치거나 급격한 몰락으로 시들어갈 것이다. 명랑함, 양심, 즐거운 행위, 다가올 것에 대한 신뢰 이 모든 것은 () 우리가 제때에 기억하는 것처럼 제때에 잊을 줄 아느냐, 우리가 힘찬 본능을 가지고 언제 역사적으로 느껴야 하고 언제 비역사적으로 느껴야 할지 감지해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찰>2)

4.쇼펜하우어와 니체의 교육론

3번 째 글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채운쌤은 시간관계상 짧게만 언급하셨습니다. 니체는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대학 안에서 철학을 한 칸트와 달리 쇼펜하우어는 강단 철학과 자유로운 철학을 구분하며 “인간의 정신이 가장 높고 고상한 힘을 모든 문제들 중 가장 중요한 문제에 사용할 수 있으려면, 국가가 철학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채운쌤 강의안)고 생각했습니다.

니체는 철학과 문화는 정치·국가와 양립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국가·정치는 항상 보편적인 선을 전제하죠. 그렇지 않으면 성립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니체가 생각하는 철학과 문화는 그러한 보편적인 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니체는 ‘평등교육’과 ‘민주주의 교육’을 비판합니다.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교육의 효과는 ‘나사못으로 틀어올린 범용’(부르크하르트)을 육성하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니체는 평등주의 교육을 이질적인 것들이 무화되고 유럽인들이 인종적으로 동질화되는 생리학적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평등이나 보편적인 선에 대한 관념을 떨쳐내는 일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문제는 보편적인 선이 실행되거나 그렇지 않는 데에 있지 않고 그러한 가치가 보편성과 자명성의 탈을 쓰고 모든 독특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말살해 버리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니체의 철학은 ‘이렇게 살아야 해’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에게 철학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질문하게 하는 기초를 놓는 일이었습니다.
전체 1

  • 2016-10-13 10:55
    오잉, 건화가 썼넹?! 토끼를 통째로 삼키고 햇볕에 누워만 있는 무력한 뱀의 소화불량 ㅡ 이런 신랄한 표현이 나올 때마다 느껴지는 짜릿함, 요런 게 니체 배우는 재미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