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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7강> 후기

작성자
윤몽
작성일
2016-11-11 04:00
조회
566
 

그대는 걸을 수 있는가, 춤출 수 있는가.

니체는 우리가 흔히 철학자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 - 비장하고 진지하고, 자신의 철학의 무게에 짓눌린 듯한 모습 -와는 확실히 다른 생각을 가졌던 것 같아요. 최소한 저에겐 춤추는 것과 철학은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거든요. 하지만 니체에게 철학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도 하는 것이었어요. 우리가 중력을 이기며 한 걸음을 내딛고, 다음 걸음을 내딛기 전까지 순간 중력에 끌려 중심을 잃었다가, 다시 다음 걸음으로 중력을 이겨내고 중심을 찾는 과정, 이것들이 반복되며 지속적인 걸어감의 과정을 만들어내죠. 채운샘은 우리의 정신에도 어떤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이 작동한다고 하셨어요. 자신이 아는 것들에 들러붙는 것, 특정한 지식과 앎을 절대화하고 그것에 고착되고 진부해지는 것이 바로 앎의 중력이 작용하는 것이죠. 대부분 이 중력의 지배를 받지만, 이렇게 자신을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중력의 힘으로부터 얼마나 능동적인 힘을 구성하며 걷고 춤출 수 있을 것인가가 우리의 고민이 됩니다. 오랜 훈련을 거친 무용수가 마치 중력의 작용에서 자유한 것처럼 보이는 가볍고 힘찬 도약을 하듯, 우리도 매번 우리를 진부하고 무겁게 만드는 것들에서 끊임없이 벗어나고 가벼워지려는 노력, 걸음을 계속해가야 해요. 운동하지 않는 사유, 걸을 수 없는 정신의 무능, 이것이 니체에게는 무지이자 악이었죠.

 

니체는 그의 독자에게 “튼튼한 이와 튼튼한 위장”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의 책을 ‘견뎌내라'고 했는데, 이것은 마치 음식을 먹는 것처럼 배운 것들을 철저히 부수고, 자신의 것으로 취하고, 소화시켜서, 온전히 흡수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에요. 니체의 비유들은 그 표현방식이 참 강렬하고도 인상적이죠. 언어의 마술사처럼 문장문장이 아름답고 잘 갖춰졌다고 하니, 언젠가 원어로 살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번역본도 들여다 보지 못한 주제에 꿈만은 큽니다. 하핫.

 

니체의 <즐거운 학문>을 떠올리게 하는 <즐거운 지식>이라는 이름의 전위적인 영화에서, 장 뤽 고다르는 이미지와 사운드가 진부해지면서 뻔한 감정과 생각과 언어를 재생해내는 제국주의의 억압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문제삼습니다. 이 영화는 코드적인 것에 익숙해진 우리의 눈과 귀를 불편하게 만들면서 진부하게 자동적으로 연결되는(그래서 편안한) 습관들을 방해하고 아주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제시하며 관객을 도발하는 것이죠. 들뢰즈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코드를 넘어서 스스로를 코드화하지 않"는, 즉 코드에 붙들리지 않는 신체를 발명하는 것이 니체의 관심사이자 문제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보면 고다르의 시도가 같은 맥락에 있음을 알 수 있죠. 이런 작업은 선택적인 문화, 대안적인 문화의 제시가 아니라 모든 문화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문화에 대한 고민,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어떤 고정된 영토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도주선을 만들어내는 일일 것입니다.

 

니체가 문화를 비판한 것은 문화가 이미 코드화되어 있으므로 특정한 위계질서를 중심으로 한 선악판단을 그 자체로 내포하기 때문이었죠. 니체는 예술작품조차도 걸작인 것과 걸작이 아닌 것을 나누는 것과 같은, 우리의 가치평가가 만들어낸 ‘불평등’한 삶과, 그 불평등의 지배를 옹호하는 감정들을 들여다봅니다. (니체는 우리의 이성과 욕망이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도 이성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충동일 뿐이라고 봤죠. 결국은 모든 것이 감정과 정서의 문제인 것이에요. 지성이라는 형태의 정서, 의식이라는 형태의 정서만 있을 뿐이고요.) 이 불평등하고 코드화된 기존의 질서 속에서 사람들은 사유와 행동을 일정한 틀에 가둔채 편안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자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개인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매번 같은 문제의 반복들만을 볼 뿐이죠. 나는 항상 같은 문제에서 넘어지고, 세상의 많은 문제들도 언제나 그게 그거인 것처럼 보이잖아요. 이런 모든 비슷해보이는 문제들 때문에 우린 쉽게 피로해지고요. 니체는 이렇게 기존의 기준으로 모든 걸 똑같이 판단하고 해석하는 늙고 피로한 우리의 사유가 아닌,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사유,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유, 내부와 외부의 사건에서 출발하여 문제제기에 전력을 다하는 젊고 건강한 사유를 이야기해요. 중력에 짓눌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꿈쩍않는 무거움이 아니라, 몸도 정신도 편안함과 정착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걷고 달리고 방랑하는 가벼움, 이것이 니체가 생각하는 철학자의 이미지였어요.

 

“나는 손으로만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발도 항상 글 쓰는 사람과 함께하길 원한다. 내 발은 확고하고 자유롭고 용감하게 들판을, 종이 위를 달린다.” <즐거운 학문>

 

니체는 다른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여러가지의 탑을 보고 나서야 자신의 마을의 탑이 높은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되듯이, 어느 도덕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도 비슷한 방식의 일이 필요하다고 했어요(그 자리에 서서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야 볼 수 있게 된다는 거죠). ‘도덕적 편견’에 대한 사유나 철학은 그 도덕의 외부, 우리가 걷거나 날거나 기어올라야 하는 선악의 저편, 이미 우리의 피와 살처럼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과 욕망을 구성하는 명령적 가치평가 전체로부터의 자유를 전제로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해요. 그래서 니체에게는 이 중력을 거스를 수 있는 힘, 우리를 저지하고 짓누르고 억압하는 것들에서 벗어나 그 선과 악의 저편으로 날아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가벼운가의 문제, 자신 안에서 이 시대를 ‘극복’하는 문제가 중요해지죠.

 

들뢰즈가 말했듯 어떤 욕망도 그 사회의 배치를 벗어날 수 없어요.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하거나 충동을 느낀다는 것은 사실은 그 시대의 명령적 가치평가에 의해 길들여져서 이미 그것이 우리의 피와 살로, 우리 자신의 일부로 작동하는 결과인 것이죠. 그것을 떠난 순수한 욕망? 사실 그런 건 없어요. 따라서 먼저 이 시대의 욕망구성을 알아야 자기 자신도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돼요. 내 안에 그 시대와 세계가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나를 알기 위해선 그 시대에 대한 이해가 먼저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사람은 그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대로 세계를 출현시킵니다. 해석은 우리의 충동이 향하는 것으로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는 해석의 의지의 차이이기도 해요. 그래서 어떤 해석을 보면 그 해석 대상의 진실이나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해석자의 욕망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아무튼 세계는 강한 힘을 사람들을 그 중심으로 끌어내려요. 자본이 중심인 우리의 시대는 모든 것을 자본, 이윤, 돈으로 끌어당기죠. 이것들에 우리의 욕망이 따라 흐릅니다. 우린 아무 저항도 없이 그냥 그 중심에 자석처럼 달라붙어서 기존의 편안하고 습관화된 방식을 고수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니체는 훈련을 통해 중력에서 자유로워진 훌륭한 무용수가, 그 최대의 유연함과 힘을 가지고, 가장 빠른 자만이 해낼 수 있는 방랑과 모험을 지향하는 것, 이것을 철학자의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짜라투스트라>의 핵심개념이 될 ‘영원회귀'에 대한 사유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요. 이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얘기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게요. 니체는 이 세계가 차이를 갖는 여러 힘들로 가득 차 있다고 했어요. 사람의 몸이 완전한 균형을 찾는 순간 죽는 것처럼, 세상도 여러 힘이 결코 균형이 잡히지 않은 채 어떤 형태로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 형태는 수없이 여러번 반복해서 도달하게 돼요. 니체는 현상태는 이전에도 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수없이 회귀할 것이며 인간의 삶도 모래시계처럼 반복해서 뒤집히고 흘러갈 것인데 나를 만들어낸 조건 모두가 세계의 순환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잠시 짧은 중간 시간이 있을 뿐이라고 했어요. 그렇다고 아무 변화가 없이 고정된 것만 계속 반복되는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균형의 상태에선 생성이 일어나지 않아요. 안정은 일시적인 것일 뿐 끊임없는 불균형의 연속인 것이죠(여기에서 저는 동양적인 도道의 개념이 떠올랐어요. 노자에서 말하는 도의 항상성(常)이라는 것도 사실은 똑같은 상태만이 계속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끝없는 변화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죠.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 사실이자 도이고요). 내가 지금 경험하는 전에 없던 한 순간이 우주 차원에서는 이미 되풀이되는 과정 중에 있기도 하죠. 차이를 되풀이하는 세계 자체가 그 자체의 동력을 가지고 매번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신이 있어서 매번 새롭게 창조된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설명이에요). 이건 그냥 단순한 순환론적 사고가 아니라, 윤회 등을 비롯한 불교적 사유와 통하는 데가 있다고 하는데요. (제가 불교는 잘 몰라서 자세히 얘기할 순 없지만요;;) 아무튼 채운샘은 나를 만들어내는 조건 전체의 반복, 어떤 순간에는 세계 전체의 반복, 서로 이어진 힘들의 끊임없이 움직이는 전체로서의 반복과 하나의 개체 속에 우주 전체가 들어가 있다는 불교적 발상이 니체의 영원회귀의 사유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고 하셨어요.

 

영원회귀 사유는 악령의 저주(?!)나 다름없는 예언, ‘새로운 것이란 없고 너는 너의 삶의 모든 것을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해서 살아야만 한다’는 잔인해 보이는 명령 앞에서 그 제안을 기쁨으로 수락하고 자신의 삶 전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초긍정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연결이 돼요. 이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의 무거움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이 무게를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야 하는가의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은 니체에겐 도덕이 아닌 미학의 문제예요. 걸작이라는 목적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과정 자체들의 집합들로 채워지는 삶 속에서, 그 과정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보면 인생은 걸작을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무겁게 긋는 획들이 아니라, 망칠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한 획을 긋는 순간순간이 전부인, 그런 가벼운 획들로만 이루어진 그림 그리기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모든 힘들의 전체 상황은 항상 회귀한다”고 할 때 그 활동은 영원하지만 그 산물과 힘의 상태는 유한한 것이에요. 힘의지와 영원회귀는 주체이자 행위 자체이자 행위의 결과, 이 세 가지가 동시적으로 성립하는 주체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발생 과정의 측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겪음도 나고, 내가 생산하는 것도 나라고 하면, 결국 과정이 주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그래서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의 무거움을, 우리는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즐거움으로,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창조적인 것으로, 보존의지가 아닌 힘의지로, 도박성 기대가 아닌 순수한 주사위 놀이로(매번의 던져짐을 기뻐하는 것으로), 진지한 철학이 아닌 즐거움과 웃음의 철학으로 극복해 나가는 것만이 남아 있는 거예요.

 

들뢰즈는 니체의 잠언을 웃음과 연관시켜 사유했다고 하는데요. “미친 듯한 웃음 없이 니체를 읽는 것은 니체를 읽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까지 했네요. 사람들은 코드를 뒤죽박죽으로 만들면 웃지 않을 수 없거든요. 사유와 무관하다 생각했던 무엇이 사유를 촉발할 때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사유가 시작돼요. 들뢰즈에 따르면 모든 위대한 작품은 그 자체로 이미 변이를 작동 시키며 내일의 건강을 만든대요. 현대의 자본주의는 모두가 나쁘다고 말하면서 적극적으로 추구하거나, 혹은 다 알면서도 하지 않거나, 신뢰하지 않고서 추구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거대한 냉소주의이며 동시에 위선적인 계몽주의죠. 우리는 위대한 풍자가 디오게네스의 웃음, 견유주의 자들의 기탄없는 웃음, 우울한 경멸이 아닌 홍소를 동반한 웃음, 웃는 자아가 아닌 유쾌한 에너지가 남는 웃음을 통해 우리의 진지한 자아의 무게를 소멸시킬 수 있어요. 디오게네스가 보여준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삶, 거의 자아의 해체(!)나 다름없는 매 순간은 자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죠.

 

니체는 유쾌해지기 때문에 현명해지고 싶다고 했어요. 무거운 중력을 벗어나 춤을 추듯, 걸작에 대한 부담을 벗어나 가벼운 한 획으로 그림을 그리듯, 찌푸린 인상을 펴고 유쾌한 웃음으로 자유롭게 사유하는 적극적인 철학. 웃음과 지혜가 결합된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즐거운 학문’입니다.
전체 2

  • 2016-11-11 15:21
    정말 꼼꼼한 후기네요! 배움은 곧 가벼워지려는 노력이라는 것. 채운샘이 이번에 인용하신 것 중에서 저는 "훌륭한 무용수가 음식에서 원하는 것은 비만이 아니라 최대의 유연함과 힘이다."라는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음주 간식은 혜원누나, 수정쌤, 박주희쌤입니다.

  • 2016-11-14 13:03
    영원회귀는 이해하기 어렵다면서도 꼼꼼하게 풀어내고 노자와도 연결하시니 대단합니다! ㅋㅋㅋ 곧 니체를 만날 누나에게서 어떤 웃음이 들려올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