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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월요일 : 니체 <8강>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6-11-17 21:16
조회
446
161114 니체 강의 후기

마지막 강의 후기 시작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니체의 <즐거운 학문>에 대한 강의입니다.
니체의 사유는 철저하게 역사적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역사적’이라고 할 때는 내가 따로 있고, 과거를 ‘역사적 지평’으로 설정하여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조건을 다른 감각으로 보는 것을 이릅니다. 니체가 말하는 ‘비역사적 운무’, ‘역사적 생성’이라고 말하는 시기가 그렇습니다. 이제까지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생각해서는 들어맞지 않는 시기를 만날 때 역사적인 사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니체는 철학이란 자신의 역사적 상황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가치들이 허물어지는 시기를 만나 그것들이 어떻게 무너지는 것을 직시하고 또 폐허에서 시작해야 한다고요. 자신이 사는 근대, 돈과 근면으로부터 더 많은 돈과 근면을 만들어내는 시기를 기존의 가치가 무너지는 시기로 본 것입니다. 믿음의 체계, 절대적 존재, 신념과 같은 자신이 만든 거대한 허구가 죽은 자리에 진보가 자리 잡은 시기.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역사적 진보일 수도 있겠으나, 니체가 보기에는 이 또한 신의 자리를 진보가 대신한 것에 불과할 뿐. 인간은 절대적인 믿음이 상실될 때 그 실상을 직시하기 보다는 또 다른 믿음, 또 다른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니체가 역사적인 사유를 하는 철학자라고 할 때는, 그 허구, 일시적인 믿음이 만들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다르게 사유하는 것을 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니체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결코 합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세계는 한 번도 신적(합리적)이었던 적이 없다. 이번 학기 내내 니체가 말하던 것입니다. 삶은 한 번도 우리가 예측한대로 가지 않았으며, 예측한대로 가더라도 어느새 무너진다고요. 우리의 실존 자체가 위험이며, 예측불허가 내 실존의 일부라는 것. 이것들을 보려하지 않는다면 약자인 것입니다. 허구를 짓지 않고서는 삶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니까요. 세계는 한 번도 방향성을 제시한 적이 없는데 진보라는 신념을 부여잡고, 또 세계가 인간의 진보와 기대에 따라 움직인 적이 없는데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고 실망하고를 반복하는 것. 니체에게는 모두 약자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사유를 하지 않는 것이겠고요.
삶은 무의미하며, 그 무의미를 견디는 것이 니체의 질문이었습니다. 육지와 관계를 단절했을 때, 남은 것은 무한한 대양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막막함을 견딜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산다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보통 여기서 우리 의식은 인과를 짓습니다. 사건에 이유를 붙이고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식이란 가장 늦게 도착하는 것이며, 인과는 우리가 사후에 부여하는 가치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세계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으므로 자꾸 인과를 짓고 이 세계가 합리적으로 굴러간다고 생각합니다. 인과를 만들면서 사건이 나에게 다가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니체는 내가 있는 사건을 내가 원인으로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우연히 사건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며, 내가 원인으로 있지 않는 사건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니체는 목적, 방향성, 믿음이나 신념이 아닌 힘 의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삶은 무의미하며, 그 무의미성을 견디게 하는 것은 더 숭고한 목적이 아니라 더 강력한 힘이라는 것. 실존의 힘의 감정, 위험을 얼마나 강하게 돌파할 수 있는가? 니체는 이 의지를 문제 삼습니다. 니체는 우리 몸이나 행동을 이야기할 때는 서로 다른 힘들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성적이라고 할 만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이성이 충동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충동이 이성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요. 우리 모든 행위는 모든 부분이 싸움 끝에 내린 결론이라는 것. 즉 충동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이성의 협조가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라고요. 그렇다면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 허구입니다. 이성도 충동도 ‘나’라고 하기에 충분하지 않으며 그 힘들의 싸움과 그것들이 결론내린 것이 내 행동을 결정지으니까요.
니체는 다윈주의를 비판하면서 생명의 본질은 자기보존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른 힘을 지배하려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라고요. 모든 힘은 다른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살아가려고 하고, 그러므로 나는 다른 생명에 착취당하고 또 다른 생명을 착취하며 존재합니다. 여기서 ‘나’는 없고, 이웃보다 더 낯선 타자로서의 자신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은 이렇게 가차 없습니다. 노쇠한 세포에 대해서는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 자연입니다. 오직 나의 의식만이 약한 것에 동정심을 갖습니다. 노쇠한 세포도 생명이라고(^^) 하며 망상을 짓고 동정합니다. 그 결과 병에 걸리면 병에 걸리지 않은 자를 만나서 나으려고 하기 보다는 같은 병을 가진 사람을 만나려고 합니다. 결국 약자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강자는 언제나 소수인 것입니다.
니체는 우리가 우리의 힘을 어떻게 강하게 고양시키는가, 이것만을 생각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역사 속에서 중요한 것은 선/악이 아니고, 올바른 삶이 아니고, 역사적 진보가 아니고 어떻게 힘으로 충만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뿐이라고요.
우리는 항상 외부 세계를 다르게 느낍니다. 우리는 세계를 다르게 느끼며, 그 자체로 세계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해석은 합리적 이성이 아니라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충동, 우리의 정서가 해냅니다. 그것은 목적 없이 작동하며 합리성과 관계가 없습니다. 사제는 그 충동을 억제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도덕을 말했습니다. 사제가 사라진 시절에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에게 도덕을 설교하고 있고요. 하지만 니체는 ‘행동함으로써 내버려두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일을 가능한 한 잘 해내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만드는 도덕’에 호감을 느끼며 원칙으로 삼습니다. 이건 무가치한 내 실존이 할 수 있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가치가 영원하지 않은, 일시적인 허구에 기대지 않으며, 행위의 유일한 목표를 내 존재의 고양으로 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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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1-18 07:50
    인간에게 이성이란 것이 자유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자유의지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허구가 된다는 것. 이성이란 충동을 억누르는 게 아니라 충동이 이성의 손을 들어준다는 얘기가 인상적이네요! 또 옛날에 사제가 사라졌을 때 (잘 모르지만 ㅋㅋㅋ) 사람들이 기대던 도덕의 기준 역시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사람들이 사라진 사제 대신 스스로 도덕을 설교했다는 것 역시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