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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월요일 : 미셸 푸코의 철학 <1강> 후기 및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3-09 12:37
조회
372
드디어 개강했습니다! 채운쌤이 말씀하신 것처럼 니체만큼의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이 푸코를 만나러 찾아와 주셨죠. 물론 채운쌤 영향이겠지만, 저는 푸코에 대한 정체불명의 팬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몇 년 전에 스치듯 만난 이후로 인연이 없던 푸코를 이번 채운쌤 강의를 통해 다시 만나니, 제 팬심이 실체 없는 감정은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푸코님... 좋아합니다...)

잡소리는 집어치우고, 채운쌤 강의 내용 중에서 제가 흥미롭게 들었던 부분을 조금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절차탁마 들뢰즈강의에서 들뢰즈가 자신의 모든 저작에서 반복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것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며, 들뢰즈 자신이 이러한 물음을 통해 철학의 이미지를 새롭게 바꾸어낸 철학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들뢰즈님도... 좋아합니다...). 이는 아마 푸코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푸코에게는 ‘철학의 이미지를 바꾼 철학자’라는 설명에 덧붙여 ‘지식인의 이미지를 새롭게 한 지식인’이라는 수식어 또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채운쌤은 푸코가 지식인의 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간직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을 제공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콜레주 드 프랑스의 동료교수는 70년대에 두 사람의 푸코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투쟁하는 푸코와 지적 작업을 하는 푸코. 물론 ‘푸코가 공부도 열심히 하고 현실 참여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따위의 말을 하려고 동료교수가 ‘두 사람의 푸코’라는 말을 거론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푸코가 지식인의 이미지를 바꾸어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두 측면의 완전한 일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푸코에게 정치적 투쟁은 자신의 이론을 적용하는 일도 아니었고, 특권적 지식인으로서 비지식인을 대변하는 일과도 무관했습니다. 채운쌤의 강의안을 옮기자면, “‘투사 푸코’의 투쟁 경험은 ‘교수 푸코’의 지적 작업을 보다 생생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만들어주었으며, ‘교수 푸코’의 노동은 ‘투사 푸코’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매개”였습니다.

정치적 투쟁은 푸코의 지적 작업을 변용시키고 반대로 푸코의 지적 작업은 정치적 현실을 새롭게 출현시켰을 것(예를 들어 <감옥정보그룹GIP>의 조직)입니다. 푸코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지식인에 대한 푸코 자신의 관점이 전제되어 있을 것입니다. 사르트르는 주체가 어떻게 역사를 바꿀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주체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지식인은 동시대 지식을 총체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68혁명을 겪은 푸코는 지식인이 자신의 시대를 대변하여 실행하는 총체화를 믿지 않았습니다. 푸코는 경험이란 많은 경우 주체의 자기 동일성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동일성 자체가 경험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부정된다면 동일성을 바탕으로 지식을 총체화하고 시대를 대변하는 것이 불가능함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푸코는 지식인이라는 특권적 계급에 대한 어떤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푸코에게 지식인의 투쟁이란 비지식인의 대변이 아니라 자기 싸움이었습니다. 푸코는 어떤 담론, 지식과 그것을 검열하고 방해하고 막아버리는 권력이라는 구도에서만 투쟁의 지점을 발견하지 않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사회 전체의 망을 깊이 그리고 미묘하게 뚫고 나가는 하나의 권력관계”가 존재하며, 지식인들은 이러한 권력에 맞서는 주체가 아니라 “이 권력체계의 동인들(agents)”입니다. 그러므로 푸코가 보기에 지식인의 투쟁의 장은 자신의 지적 작업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적 작업의 내부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푸코는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은 그를 지, 진리, 의식, 그리고 담론의 영역에 있어서의 권력의 대상과 도구로 변환시키려는 권력의 여러 형태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권력이 누군가가 억압되고 배제되는 자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미세한 관계를 가로지른다면, 지식인의 투쟁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서 권력을 더욱 견고하게 재생산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구부려낼 것인가 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로지르는 권력을 구부려내기 위해서 지식인은 자기 동일성을 강화하고 총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경험에 마주해 자신의 동일성을 해체하고 자신의 이론을 복수화해야 할 것입니다. 들뢰즈는 푸코와의 대담에서 “총체화하고자 하는 것은 권력의 본성이고, 이론은 본질상 권력에 대립된다”고 말합니다.

이번 첫 강의는 푸코의 고결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들뢰즈는 푸코가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하는 것의 무례함이라는, 우리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준 첫 번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강의를 시작하며 채운쌤은 푸코가 어떤 ‘참을 수 없음’에서 출발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아마도 무언가를 보편화하고 총체화하고 대변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참을 수 없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믿음은 미세한 균열들을 무화시키거나 모른 척 하며 푸코를 침해하고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음이 아니었을까요?
푸코는 전쟁 직후 스무살을 맞은 자신의 세대가 “다른 세계와 다른 사회를 원할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나아가 스스로 변환하기를, 그리고 관계들을 변혁함으로써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지혜나 깨달음에 대한 기대로부터가 아니라, 푸코와 같은 ‘참을 수 없음’으로부터 철학과 만났다면 푸코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음,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채운쌤은 강의의 말미에 철학의 유무를 결정하는 것은 모든 선택과 결단이 습관과 취향에 의한 것인지, 통찰에 의한 것인지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성을 사용해서 선택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습관과 취향을 무화시키는 한계경험과 마주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겠죠. 자기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음에서 비롯된 푸코의 고결함은 습을 반복하는 것이 곧 무지이고 부자유라는 불교적 사유와도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후기는 여기서 짧게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 간식은 윤몽누나와 고영주쌤이 맡아주셨습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전체 1

  • 2017-03-10 19:05
    난데없는 고백에 오잉, 했던 1인.. 난 아직 푸코님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하게 되려나~ 어쩌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