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톡톡

[이 에세이를 보라] "이 미친, 자유의 노래" (동사서독/하동)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7-07-23 13:22
조회
367


이 미친, 자유의 노래


하동


1.들어가며

“세속이 그렇다고 하는 것을 긍정하고 세속이 좋다고 하는 것을 좋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을 아첨군이라 하지 않는다. ··· 자기를 아부꾼이라고 하면 역시 발끈하여 얼굴빛을 붉히면서도 세론에 대해서만큼은 종신토록 아첨꾼과 아부꾼 노릇을 한다. ··· 세속의 사람들과 한 무리가 되어 옳고 그름을 함께 하면서도 스스로를 중인이라고 말하지 않으니 지극히 어리석다. 자기가 어리석음을 아는 자는 크게 어리석은 것이 아니며 자기가 미혹됨을 아는 자는 크게 미혹된 것이 아니다. 크게 미혹된 자는 종신토록 깨닫지 못하고 크게 어리석은 자는 종신토록 영명해지지 못한다.” -<천지>

장자의 사유는 분명 다른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과 희구를 불러일으키는 철학이다. 인간으로서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끌어안고 있던 기본적인 전제들이나, 너무나 오래되어 본성처럼 여기고 있던 것들이 정말, 과연 그런 것들이었냐고 묻는다. 잘 생각해 보라고. 부나 명예, 재물 등 오랫동안 네가 쓸모 있다고 생각해 온 것들이 정말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는지, 네 앞에 닥쳐오는 사물이나 사태들을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 늙음과 젊음 등으로 구분, 분별하는 것이 정말이지 확고한 경계나 절대적인 기준에 따른 것인지, 그리하여 어느 한편에 죽자사자 매달리는 게 제대로 된 삶인 거냐고. 나아가 우리는 항구적인 생성 변화 속에서 매 순간 한 매듭을 짓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 하나의 고정된 불변의 존재가 될 수 없음을, 그런 생각이야말로 ‘술취한 자의 꿈’같은 게 아니겠냐고 묻고 또 묻는다. 그 꿈에서 벗어나 자연의 호흡과 리듬, 道에 자신을 일치시킬 수 있을 때, 자유와 지복의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장자가 만들어내고, 옮기고, 재구성하고 또 체계적으로 정리했을 법한 그 많은 이야기와 논의들이 나에겐 가히 미친, 자유의 노래로 다가왔다. 누구나 한번쯤 꿈꾸거나 마음에 담아두었을 법한 다른 삶의 이야기들을 장자는 그렇게 솔직하고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방식으로 토해냈다. 전통과 당위, 도덕과 의무라는 미명하에, 누구도 함부로 발설하기 힘든 삶의 비밀 아닌 비밀, 아니 그 날것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고자 할진대, 미치지 않고서야 가능할 리가 없다. ‘새로운 사상에게 길을 열어 주면서, 존중되던 습관과 미신의 속박을 부수는 것이 광기(<아침놀> 14절 중)’라고 말한 니체의 말처럼, ‘광기’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자기 시대의 습속에 맞설 수 없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누구에게는 허황되고 어처구니없는 소리로, 또 누구에게는 두려워서 감히 맞서지 못하고 달아나버리고 싶은 소리로 다가왔을 터. 하지만 그 ‘미친 소리’들에 혹해, 남들 사는 대로 그들과 한 무리가 되어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추종하고 살지 못하고,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진실에 맞춰 스스로의 삶을 보전하고 자유를 구가하고자 한 사람들이 있었다. 장자 후학들! 그들은 제각기 놓인 삶의 자리와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장자를 사유하고 가지쳐 나가는데, 하나 확실하게 눈에 띄는 건, 좌파가 됐건 우파가 됐건 다들, 무리의 도덕과 통념에 맞서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자유를 추구했던 사상가들이었다는 점이다.
나름 오랜 기간 공부를 하면서도 내가 넘어서기가 힘들었던 부분이, ‘모범적인’ 삶과 역할에 대한 강박관념들을 떨쳐내기가 힘들다는 거였다(뭐, 그렇게 인정받고 있지도 못하지만 말이다.). 장자의 말마따나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세’를 살아가면서 부득이하게 감수해야 할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에 따른 적절한 태도나 행동방식, 에티켓 같은 것들을 어디다 처박아 버릴 수야 없겠지만, 그것들의 밑자리를 크게 의심해 보거나 그것들에 붙들린 채 생기를 잃고 살아가는 나 자신을 심하게 미친 듯이 흔들어보지 못했다는 거다. 늘, 적당히 적당히, 그렇게 그렇게, 무리의 삶에 편승하고 의존하며 살아왔다는 거. 이번에《장자》를 읽으면서, <내편>의 사유가 갖는 바닥모를 깊이에 아찔함과 황홀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외편>의 그 선명함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지점들이 눈에 더 확 들어왔던 게 사실이다. 이제 그들, 장자후학들의 사유를 짚어보면서 내 ‘어리석음’을 이해하고, 나아가 ‘미혹’에서 벗어난 삶의 자유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2. 본성, 묶어둘 수 없는 그 무엇!

장자 <내편>에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나타나지 않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性이란, 어떤 존재의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 해당 존재를 그것으로서 성립 가능하게 하는 가장 배타적인 요소나 근원적인 조건일 터. 도덕적인 이상 사회 건설을 목표로 삼은 유가에서는 일찌감치, ‘仁義禮智’를 인간의 본성으로 규정지어 버린다. 이에 비해, <장자>에서는 인간이 내장해야 할 최고의 정신적 가치로 ‘德’을 내세우고 있을 뿐, ‘인간이 이러이러하다’거나 ‘인간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성’에 대한 논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장자 철학이 이들에 비해 질이 떨어진다거나, 고민이 없었다는 것인가? 최진석은 이를 장자 철학의 ‘비본질주의’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을 특정한 존재 근거나 본질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만물은 동일한 바탕(氣)을 가지고 존재하므로 상호간에 존재론적으로 소통 관계에 있으며 상호 전화의 가능성 속에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존재들은 존재론적인 본질 개념을 근거로 구분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기’라는 단일한 조건이 잠시 뭉쳐 있는 것에 지나지 않고, 항상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있는 대기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과 존재론적으로 구분시켜 줄 수 있는 자신만의 동일성 자체가 없다. 이런 내용은 <장자> 첫 구절의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로 전화된다는 내용이나, 나비와 장자 사이의 존재론적 상호 전화를 말하는 ‘물화’ 개념에서 전제되어 있다. 모든 것은 항상 변화 속에 있고 또 변화가 멈추는 극점은 없다. 여기서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장자에게서 인간은 특별한 지위가 없다. 단지 모든 것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장자에게서 인간은 지네, 뱀, 미꾸라지, 원숭이 등등과 동등한 차원에서 논의되고, 심지어는 천지 사이에서 존재하는 인간은 산 속의 작은 돌이나 나무 정도의 위치밖에 안 되는 초라한 존재이기까지 하다. -최진석,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장자는, 인간의 생사는 물론이고 일체 만물의 생성변화를 氣의 자연적 이합집산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는 건데, 이리 되면 애초부터 ‘性’에 대한 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지게 된다. 존재 자체가 유동적이라는데, 그 어떤 고정된 본질을 상정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다 <외편>에 ‘性’이라는 글자가 불쑥불쑥 등장하게 되는 건, 아마도 당시의 담론 지형의 변화와 관계가 깊을 터인데, 바야흐로 ‘본성’의 문제로까지 전선이 확대되고 격해졌을 저간의 사정의 반영이리라. 그렇게 본성에 대한 논의가 무성했다고 해서, 이들의 철학에서 ‘性’이 딱히 뭐라고 인간을 비롯한 사물의 존재 근거로서 특정한 내용을 가진 본질로 규정되고 있지 않다. 내용상 그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다만 문명이나 도덕적 가치에 의해 재단되기 전의 본래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 말을 길들여 전쟁에, 경주에 사용하기 위해 온갖 구속과 억압을 가하고 훈련을 시키기 전까지, 말은 ‘굽으로 서리나 눈을 밟고 털로 바람과 추위를 막고, 물을 뜯고 마시며 발들 들고 뛰어다니’지 않았겠는가. 뭔가 말의 본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게 말의 본성일 수 있다는 거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길쌈을 해서 옷을 지어 입으면 밭 갈아서 먹을 것을 장만하는 것’, 기본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 외엔 욕심내지 않으며 ‘안명(安命)’하고 ‘전생(全生)’하는 게 타고나면서부터 얻은 덕(德), 즉 성(性)이란다. 다음을 보자.

“쓸데없이 사람 마음에 간섭하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야 하네. 사람의 마음이란 퇴짜를 맞으면 추락하고 격려를 받으면 고무되지. 풀이 죽었을 땐 죄수가 되고, 기세가 등등할 땐 망나니가 되기도 하고. 마음은 더 굳세고 강한 것에 대해서는 유순하게 굴복하지만, 모서리를 가지고 찔러대기도 하고, 새겨지기도 하고 마멸되기도 하지. 뜨거울 때에는 맹렬한 불꽃처럼 타오르고, 차가울 때는 얼음처럼 꽁꽁 얼어버리기도 하고. 마음은 너무나 빨리 움직여 흘끗 올려다보았다 내려다보았다 하는 사이에 사면의 바다를 두 번이나 돌고 오지. 가만히 있을 때는 깊은 못처럼 고요하고, 움직일 때에는 하늘이 정해준 경로를 따라 비행을 한다네. 인간의 마음보다 격렬하고 거만하며 묶어두는 게 불가능한 게 또 있을까?” - 그레이엄, <장자>

마음의 무상성에 대한 통찰과 리얼한 묘사가 돋보이는 이 대목을 참 좋아해 큰 소리로 암송하기까지 했었는데, 내게는 이 대목이 인간의 본성이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야생성과 생명성에 대한 적실한 표현으로 다가왔다. 다시 말해, 마음을 통해 본성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자체로 고정된 뭔가가 아닌, 특정 조건이나 상황 그리고 관계 속에서 부단히 일고 스러지기에 그 어떤 인위적인 규율이나 가치체계로 묶거나 억누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토록 다이나믹한 마음의 작용을 인위적으로 향상, 변화시키고 인의 도덕이라는 틀로 화석화시켜 온 과정이 삼왕 이후의 인류의 역사이고, 그 과정에서 인간사의 갖은 불행들이 생겨났다는 것이 <재유> 편 저자의 생각이다.

이처럼 ‘성’이라는 것을 아예 인위적으로 길들이거나 묶어둘 수 없는, 무규정적인 것으로까지 밀어붙이는 장자후학들의 사유가 대책 없고 무책임하게도 다가오기도 했다. 어쩌란 말임? 원시 상태로의 회귀? 사실, 이에 대해 아직도 뭐라 말할 자신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리 되면 인간 또한 고정된 자기 본질을 가지지 않는 존재이기에, 뭔가 도달하거나 회복해야 할 목표지점이나 이상 같은 것도 설정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를 주박하고 있던 미신적인 통념에서 벗어나, 존재의 질적 전환이나 변이 능력에 대해 새롭게 사유해 볼 가능성이 생겨나게 된다. 이야말로, 장자적 사유가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닐는지. 하지만 아직 멀었다. 본성에 대한 이같은 온전한 긍정은 인의나 문명 체계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결합되면서, 그간 우리가 발딛고 기대온 견고한 바닥과 의지처가 사실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허상이자 삶을 집어삼키는 괴물이었는지에 대한 통찰을 낳는다.

3. 보편적인 가치 체계를 넘어

니체는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인간 사유의 역정 속 속에서 어째서 이것은 선하고, 저것은 악하다고 규정되는 것인가? 그의 계보학은, 말 그대로 가치의 연원을 따지고, 그 자체의 작동 근거를 파헤치는 것이다. 그랬더니, 우리가 그토록 끔찍이 신봉하는 가치 개념이라고 하는 것들이 결국, 약자의 자기 보존의 산물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강자의 힘을 그 능력으로부터 분리시키게 한다는 것이었다는 것. 니체를 잘 모르니, 더 뭐라 말은 못하겠고, 또 접근의 의도나 방향 또한 상당히 다르지만, 도덕의 본질을 그 근저에서 갈아엎을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장자 또한 못지않다. 아니, 어쩌면 훨씬 더 래디컬한 면이 있다.

“백이는 수양산 아래에서 명예를 위해 죽었고, 도척은 동릉산 아래에서 이익을 탐하다가 죽었다. 이 두 사람이 목숨을 바친 목적은 같지 않으나 생명을 해치고 본성을 손상시킨 것은 마찬가지이다. 어찌 꼭 백이를 옳다 하고, 도척을 그르다 하겠는가? 천하 사람들이 모두 목숨을 바친다. 그런데 그가 따라 죽은 것이 인의면 세속 사람들이 군자라고 일컫고, 그가 따라 죽은 것이 재물이면 세속 사람들이 소인이라고 일컬으니 따라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이 가운데 군자가 있고 소인이 있으니 생명을 해치고 본성을 손상시킴에 이르러서는 도척이 또한 백이와 같을 뿐인데 또 어찌 그 사이에서 군자와 소인을 가릴 것인가?” -<변무>

백이와 도척을 두고 그놈이 그놈이라니, 상식적인 가치 기준으로 봤을 땐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다. <내편>에서 장자 또한 선과 악의 구분에 대한 승인을 유보하고, 나아가 둘 모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음을 고려해 보더라도 세게 다가오긴 마찬가지다. 도덕에 대한 전적인 부정? 이들이 ‘무군파’라는 어마무시한 이름으로 명명되는 이유이리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두 사람의 공통점은 뭔가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렸다는 점이다. ‘인의’라는 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신성한 룰로 작동하더라도, 이것은 자연으로서의 인간에게, 즉 성으로서 애초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과 시점에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물욕의 산물이랄 수 있는 재물과 하등 다르게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들을 ‘목적’과 ‘의미’로 삼아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본성을 손상시킨다는 점에서 도찐개찐이다.
그런데, 인의 체계의 문제점은 그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고, ‘무군파’의 비판의 초점도 여기에 맞춰져 있다. 어느 하나의 가치를 절대화했을 때, 필연적으로 그것과 반대되는 가치 또한 동시에 생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그 가치들을 이용해 더 큰 악이 생산되고 정당화된다는 것을 그들은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다. 사실, 미디어나 정치 권력 등에 의해 특정 가치가 선으로 규정되는 순간, 반대편은 악이나 결여로 규정되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하여,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에 동화시키고자 하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고, 결국 그것과 다른 것 즉 ‘차이’를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모두 좋지 않다고 비난할 줄만 알고 이미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결코 그르다고 할 줄을 모르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뿌리내려 득세하게 된다. 그 결과는 무시무시하다. ‘위로는 해와 달의 밝음에 어긋나고, 아래로는 산천의 정기를 태워버리고, 중간에서는 사계절의 자연스러운 운행을 파괴하여 땅 위를 꿈틀거리는 벌레와 나비와 벌 같은 작은 곤충까지도 모두 그 자연스러운 본성을 잃고 만다.’ 이건 한가로운 비유나 수사적 장치 같은 게 아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인의나 명예, 재물 등 보편적이고 획일화된 척도를 내세우고 주장하는 자들이 끼친 악영향과 해악에 대한 이들의 날선 비판은 끝이 없다.


작금의 광경을 보면, 이들의 선구안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우주적인 차원의 기의 순환 체계가 파괴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본과 경쟁이라는 지배적인 척도에 사로잡혀 노예 아닌 노예 짓을 하면서 그걸 본성처럼 여기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문제! 대입과 성적이라는 절대 가치에 목을 맨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는 힘도, 매번 새롭게 펼쳐지는 사태나 관계들에 싱싱하게 반응할 수 있는 능력도 잃어버렸다. 그렇게 힘들게 학교를 나간 아이들이 이번엔 취업에 목매 학원을 전전하다 찾아와서는 차라리 그 때가 좋았느니 그립다느니 이딴 소리들을 하고 간다. 예전 같으면 온갖 ‘습기’ 머금은 말들을 마구 뿜어댔을 테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못한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리 하는 말을 겨우 집어삼키고, 그저 맥없는 ‘무위’의 몸짓과 시선을 남기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그 와중에서도 꿋꿋이(!) <장자>를 읽으면서, 그러면서 또 자괴감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내가 있다. 에잇, ‘인의’ 따위 호랑이나 이리한테나 줘버려랏!!!

4. 무위, 독유지인(獨有之人)의 자유로운 삶

이처럼 본성에 대한 논의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도덕 체계나 문명적 질서나 기술 등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을 시도했던 장자 후학들이 추구했던 삶이 ‘獨往獨來의 獨有之人(<재유> 5장)’이었다. 여기서 ‘홀로 존재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 ‘성심’과 아집에 사로잡혀 외부와 소통하지 못하는 독불장군이거나 세속을 피해 고립을 자처한 은둔자가 아님은 물론이다. ‘천지사방을 자유로이 출입하며 지상의 세계를 마음껏 노닐고 다니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는 자연의 존재 및 운행 형식, 즉 ‘道’와 일치된 경지라 할 수 있는 ‘소요유(逍遙遊)’를 사는 사람이다. 물고기 ‘곤’이 거대한 ‘붕’이 되어 무한의 시공간을 날아가는 판타스틱한 이미지로 그 서막을 열고, 그 어떤 쓸모나 이상 등과 같은 목적론적 가치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절대 자유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요유’는 <장자>라는 텍스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주제 라 할 수 있을 터. 이 ‘소요유’에 대해 최진석은 이렇게 정의한다.

“기존의 경직된 가치관이 삶의 양식을 전체적으로 원활하지 못하게 지배할 때, 그래서 ‘생명력’이 고갈될 때, 질적으로 전화하여 전혀 다른 각도에서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런 과정을 통해 전혀 다른 차원에서 누리게 되는 특별히 자유로운 정신적 경지를 말한다.” -최진석,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자연적인 생명력과 합치된 자유로운 경지를 구가하고자 하는 자에게, 삶을 붙들어매는 그 어떤 고착화된 세론이나 무리적 가치들이 용납될 수 없음은 당연지사. 세계와 다른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그들은 그것들에 기꺼이 저항하고 또 마땅히 ‘홀로 가고 홀로 온다’. 그리고 그 과정이 ‘소요유’의 삶과 분리되지는 않는다. ‘소요유’의 삶은 ‘홀로임’을 수반하는데, 이는 만물에 자연스럽게 응함으로써 그것들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고독이나 외로움과 같은 지지리 궁상의 정서와 거리가 멀다. 세계를 고스란히 자기 속에 받아들여 그 변화와 흐름과 합치될 수 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자족’과 ‘충일’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채운 샘은, 매일 새로운 태양을 맞이한다는 마음으로 새로운 적을 맞았던 루쉰을 모습을 떠올려 봐도 좋겠다고 하셨다. 맞다. ‘홀로’일 수 있는 자는 결코 외로운 존재가 아닌 거다. 그간 깨달은 자의 형상을 이미지화하면서, 알게 모르게 소외된 고독자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진저리를 쳐 본 적이 있지 않나. 내가 그랬다. 늘(!) 동경해 마지않으면서도 왠지 멀어지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심사라니, 이는 분명 ‘獨’에 대한 그릇된 표상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싶다.
<외편>에서는 ‘소요유’ 대신 ‘무위’ 개념이 등장하면서 논의는 더 풍성해진다. 逍遙 無爲也! 게다가, 노자의 사유와 만나 정치나 인간 관계의 문제 등과 같은 실천적인 차원으로까지 구체화되고 있다. 특히, <천운> 편의 경우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매뉴얼 같기도 하다.

“옛날 지인은 仁의 길을 잠시 빌리고 義의 집에 잡시 의탁하기는 했지만, <항구적인 생활로서는> 소요의 언덕에서 노닐며 <간신히 먹을 것을 구할 만한> 苟簡의 밭에서 먹을 것을 얻고 남에게 베푸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경지에 초연히 서 있었지요. 소요의 언덕에서 노니는 일은 하는 일이 없는 무위이고, 구간의 밭에서 먹을 것을 얻게 되면 몸을 기르기가 쉽고, 베푸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경지에 서 있는 자는 道를 함부로 말하지 않으니 옛날에는 이것을 일컬어 참된 도를 채취하는 놀이라고 했지요.” - <천운>

‘무위자’라 해서 세속과 연을 끊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에, 인의와 같은 도덕 가치나 질서 체계를 아주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를 항구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임시 처소’로만 여길 수 있다. 자연의 변화에 따라 일정한 방향 없이 자유자재로 유전 변화할 수 있기에 옛것의 일정함에 구애받거나 얽매여 애써 뭔가를 하거나 지키려들지 않는다. 그러니, 六經과 같은 성인이 남긴 텍스트를 진리로 떠받드는 것은 ‘芻狗’나 ‘찌꺼기’를 숭배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된다. ‘도’는 선험적인 법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物과 時에 응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道行之而成), 새로운 시대와 환경, 조건에서는 시세에 추응한 새로운 윤리와 질서가 만들어져야 하는 법. ‘古’가 아닌 ‘今’, ‘지금 여기’를 온전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들 논의의 당연한 귀결이면서도 어느 시대 누구나 새겨야 할 대단히 소중하면서도 실용적인 통찰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맞딱뜨리는 관계나 일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매사에 인위적인 의도나 의미, 목적 들을 부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자체의 좋고 궂음과 무관하게 관계나 일의 자연스러움 흐름을 막아 경색시켜 버리고는,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우리 자신의 생명력을 소진시키기에 이른다. 천지는 ‘不仁’하고 ‘無情’하다. 자연은 무너뜨리겠다는 의도를 갖고 무너뜨리거나, 베풀겠다는 의도를 갖고 베풀지 않지만 조화 속에서 저절로 굴러간다. 이게 ‘무위’다. 한때는 무위가 먼 고릿적 신선나라에서 들려오는 허황한 풍문이거나 관념적인 말장난으로 다가왔었다. 지금은? 애들만 지켜봐도 안다. 친절한 보살핌 속에서 통제당하는 쪽보다 ‘재유’ 가운데서 자라는 애들이 더 주체적이고 열정적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우리는 ‘무위’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다. 그건 거대한 ‘역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무위’할 수 없나? <천운>의 저자는, 우리에게 이 세계, 우주 자연과 그 질서와 리듬을 함께하는 위대한 단독자, 즉 獨有之人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심적 포부나 태도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리하여 다시, 마음이 문제가 된다.

“‘마음’ 속에 도를 받아들일 ‘주체’가 없으면 도가 와서 머물지 않고 바깥에 도가 향할 만한 정확한 표적이 없으면 도가 가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음 속에서 나오는 말이 바깥에서 받아들일 만한 조건이 되어 있지 않으면 성인은 그것을 발출하지 않으며, 밖에서 들어오는 도도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 주체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성인은 그것을 안에 간직하여 두지 않지요.” - <천운>
전체 3

  • 2017-07-23 16:37
    헐~~, 글을 쓴건 하동 선생인데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 ㅋ 공부와 글쓰기의 못된 습을 두고두고 곱씹으라는 가르침으로 찰떡같이 알아 새길게요~~^^. 포장하느라 애쓰셨네 ㅎ.

  • 2017-07-23 22:45
    "잘 생각해 보라고"... 더 추워지기전에, 알아 새겨야겠어요.^^ 고맙습니다~

  • 2017-07-24 15:17
    예전 같으면 습기 머금은 말들을 마구 뿜어댔을 테지만 지금은 못한다는 말이 하동쌤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맥없는 몸짓으로서의 무위가 아닌 창조적인 힘으로서의 무위가 뭔지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