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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를 보라] "본성을 따르는 삶의 태도로서의 아나키즘" (동사서독/건화)

작성자
규문
작성일
2017-07-23 13:27
조회
441

본성을 따르는 삶의 태도로서의 아나키즘


정건화


서론 : 본성에 대한 의문

《장자》 외편을 읽으며 가장 걸렸던 개념은 바로 ‘본성’이었다. 본성에 대한 언급은 외편 중에서도 ‘무군파(無君派)’로 분류되는 〈변무〉, 〈마제〉, 〈거협〉, 〈재유〉편에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들 무군파는 유가적 성인들의 통치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기를 인간 본성이 지켜졌던 ‘지덕의 시대(至德之世)’라고 칭하며 문명의 역사와 인간본성의 파괴의 역사를 등치시킨다.
내가 ‘본성’이라는 범주 앞에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본성을 내세우는 방식이 너무 간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건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야!’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않나?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지덕의 시대’는, 삶이 팍팍할 때 누구나 갖게 되는 한가롭고 유유자적한 전원생활에 대한 환상과는 그렇게 다른가? 게다가 정치적 논쟁에 본성이라는 차원을 끌어들이는 것은 좀 비겁한 짓이 아닐까? 본성의 차원에 비추어 보면 백이와 도척이 똑같고, 글을 읽다 양을 잃은 자와 주사위놀이를 하다 양을 잃어버린 자가 똑같고, 양주와 묵적이 똑같다. 이것을 급진적이라 해야 할지, 모든 것을 단순화하는 방식이라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혹시 무군파에 속하는 장자의 후학들은 ‘본성’과 ‘지덕의 시대’를 외치며 귀를 틀어막고 모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논의들을 방기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성이라는 문제를 그냥 지나쳐갈 수 없는 이유는, 모든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 본성을 말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채운샘이 ‘문장을 훔치다’에 인용하셨던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의 《죽음의 스펙터클》을 읽고 어쩌면 본성에 해당하는 차원에 대한 사유 없이는 저항도 자유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목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비포는 죽음을, 그 중에서도 자살(혹은 스펙터클화된 자살로서의 테러)을 다루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규제에 얽매이지 않고, 조건 없으며, 헌법을 비롯한 어떤 법조항에도 구속받지 않는” 절대자본주의 하에 자살은 일종의 풍토병처럼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살은 사회적 스트레스, 정서적 빈곤, 주의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의 결과로 풍토병처럼 확산되고 있다. 국제보건기구에 따르면 지난 45년간 전 세계의 자살률은 60퍼센트 증가했다. 자살 시도는 제외한 수치다. 실패로 끝난 자살 시도는 자살에 성공한 건수보다 20배 많다. 같은 시기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모델이 포괄적으로 도입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즉 경제 기계의 리듬에 주의의 시간을 철저히 바친 시기다.”(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죽음의 스펙터클》, 반비)



‘자살이라는 물결’, 이라고 비포는 말한다. 변형된 자살로서의 히키코모리, 경쟁에 내몰린 프랑스 노동자들의 자살, 값비싼 종자를 사기 위해 대기업에 빚을 진 인도 농부들의 자살,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충족할 수 없는 수요를 맞추기 위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중국 노동자들의 자살, 그리고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의 자살. 이러한 서로 다른 동기에 의한 자살들의 물결 앞에서, 투표를 잘 해서 ‘착한 정부’를 선출하고 제도를 개혁하고 복지를 늘리는 따위의 일은 얼마나 무력한가. 비포가 제기하는 자살의 문제는 빈곤이나 착취, 불평등과 같은 나쁜 자본주의의 불합리성에 의한 것으로만은 설명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본성의 차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절대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통계와 수치로는 좀처럼 설명되지 않는 ‘절망’이다. 비포에 따르면 죽음은 ‘자본주의가 말소할 수 없는 최후의 자연적 조건’이며, ‘금융의 침략적인 오만에 대한 최후의 보루’다. 즉 자살은 본성을 무참히 침해당한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출구이며, 가능한 유일한 방식의 저항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지금 본성을 지키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혹은 본성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이며 현실적인 문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장자》 외편에서 언급되는 ‘본성’을 정치적인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는 방식이 아니라, 돌파하는 방식으로 본성을 사유할 수 있을까? 충분히 답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게 나의 질문이다. 우선 외편에서 본성이 문제화되고 있는 방식을 살펴보자.

1. 무군파(〈변무〉, 〈마제〉 중심)에서의 본성과 지덕의 시대

무군파는 무엇에 맞서 본성을 내세우고 있을까? 이것을 분명히 한다면 그들이 말하는 본성이 무엇인지도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것은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이다. 〈변무〉 1장에 따르면 인의와 예악을 내세우는 것은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조작해 내고 억지로 기워 붙이는 행위”다. 본성에 대해서 인의·예약은 여섯 번째 손가락이나 발가락의 군더더기와 같은 잉여이자 여분으로 비유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인의와 예악을 군더더기를 더하는 행위라고 하는 걸까? 여기가 흥미로운 부분인데, 〈변무〉 2장에 따르면 인의가 여섯 번째 손가락과 군더더기 살로 비유되는 까닭은, 이어진 것을 군더더기라 여기고 갈래진 것을 여분의 손가락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지극한 正道를 실천하는 사람은 타고난 性命의 실정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어진 것을 군더더기라 여기지 아니하며 갈래 진 것을 여분(餘分)의 손가락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긴 것을 남는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짧은 것을 부족하다 여기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오리의 다리가 비록 짧지만 이어 주면 슬퍼하고 학의 다리가 길지만 자르면 슬퍼한다. 그 때문에 타고난 本性이 긴지라 잘라야 할 것이 아니며, 타고난 본성이 짧은지라 이어 줄 것이 아니며 근심거리로 여겨 없앨 것이 아니다. 생각건대 仁義는 人情이 아닐 것이다. 인의를 실천하는 사람은 어찌하여 그리 근심이 많은고.”(《장자》 〈변무〉 2장, 전통문화연구회)

무군파가 말하는 ‘타고난 성명의 실정’을 지키는 일은, 본성이라는 한정된 범주를 먼저 설정한 뒤 그 바운더리를 벗어나는 것들 차단하고 그것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일이 아니라, 일정한 척도에 따라 구분 짓고 기준에 맞춰 재단하는 행위를 거부하는 일과 관련된다. 문제는 인위적인 구분을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이다. 어쩌면 장자 후학들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하는 다른 학파들을 비웃으며, 그렇게 인간본성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행위야말로 본성에 어긋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본성을 이야기하며 이들이 비판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구분과 분별을 만들어내는 외부적 척도다. 이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갈고리와 먹줄, 그림쇠와 곱자” 등의 “인위적인 기준을 세워서 사물의 자연스런 본성을 해치는 도구”들이다. 그렇다면 본성이라는 좁고 독립된 영역과 거기에 가해지는 외부의 침해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펼쳐져나가는 본성의 흐름과 거기에 가해지는 제한을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같은 맥락에서, 무군파가 그리고 있는 지덕의 시대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유토피아나 사회상태 이전의 자연상태 같은 것이 아니라, 외부적 척도와 기준에 의한 분별이 최소화된 상태다.

“그 때문에 至德의 시대에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유유자적(悠悠自適)했으며 눈매 또한 밝고 환했다. 그때는 산에는 지름길이나 굴이 없었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었다./ 만백성이 무리 지어 살면서 사는 고을을 함께했으며 금수(禽獸)들이 무리를 이루었고 초목이 마음껏 자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짐승들을 끈으로 묶어서 끌고 다니며 놀 수 있었고 새 둥지를 손으로 끌어당겨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덕의 시대에는 짐승들과 함께 살면서 무리 지어 만물과 나란히 살았으니 어찌 君子와 小人의 차별을 알았겠는가. 함께 無知하니 그 덕을 떠나지 않았으며, 함께 無欲하니 이를 일러 素樸이라 한다. 소박함을 지키면 사람의 본성이 유지된다. ”(《장자》 외편 〈마제〉 2장, 전통문화연구회)

지덕의 시대라고 해서 인간과 짐승의 구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구별이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던 거다.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무리 지어 만물과 나란히’ 살았다는 점이다. 여기서 ‘나란히(竝)’가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지덕의 시대에는 만물 위에 군림하는 기준이나 만물을 위계 짓는 척도가 부재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무군파가 묘사하는 지덕의 시대에는 인의와 예악으로 대표되는 단일한 척도가 부재했기에 차이나는 모든 것들이 ‘나란히’ 공존할 수 있었다.

2. 지(知) vs 본성

“伯樂이 ‘나는 말을 잘 다룬다.’고 해서 (…) 구유와 마판에 줄줄이 묶어 놓음에 이르러 죽는 말이 열에 두세 마리에 이르고, (…) 가죽 채찍이나 대나무 채찍으로 때려 대는 억압(抑壓)이 있게 되면 죽는 말이 이미 절반을 넘게 된다.”(《장자》 외편 〈마제〉 1장, 전통문화연구회)

〈마제〉 1장의 비유는 무섭도록 강렬하다. 관습과 도덕규범의 그물망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여기에서 굽이 깎이고 낙인이 찍히고 굴레 씌워지고 다리 묶인 말의 모습으로 이미지화되고 있다. 비포가 말하는 ‘자살이라는 물결’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 비유를 인간에게로 가지고 오는 과정에서 조금은 의아한 지점과 마주하게 된다. 〈마제〉 3장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혁서씨(赫胥氏)의 시대에는 백성들이 “집에 머물 때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길을 갈 때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먹을거리를 입에 물고 즐거워”하는 등 무지하여 본성을 지키며 살았던 반면, 성인이 예악과 인의로 몸과 마음을 구부리고 꺾게 하자 “백성들이 비로소 발돋움하여 지혜를 좋아”하게 되어 이익을 추구함에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외편에서 본성과 본성의 상실이 이야기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구도가 바로 무지(無知)와 호지(好知)의 대립이다. 지혜를 좋아하는 일에 대한 경계는 〈마제〉 3장만이 아니라, 〈거협〉 4장과 〈재유〉 2장 등 외편 곳곳에 나타나 있다. 어째서 다른 모든 탐욕을 제쳐두고 지(知)에 대한 욕망을 중점적으로 문제 삼아야 했던 것일까? 사실 知에 대한 경계가 《장자》 전체의 맥락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생명은 한계가 있지만, 지식은 무한하다. 끝이 있는 것을 가지고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게 되면 위태로울 뿐이다. 그런데도 知를 추구하는 것은 더더욱 위태로울 뿐이다.”(《장자》 내편 〈양생주〉 1장, 전통문화 연구회)

〈양생주〉 1장에서 장자는 생명(生)과 지식(知)을, 정확히 말해 생명의 유한성과 지식의 무한성을 대립시키고 있다. 강신주는 ‘知’를 ‘인식’으로, ‘生’을 ‘삶’으로 번역하면서 이때 장자가 부정하는 인식이란 “모든 사태에 적용가능하다[=한계가 없다=무애(無涯)]고 주장하는 사변적, 이론적, 규범적인 인식”에 국한된다고 말한다. 인간의 인식은 ‘특정한 삶의 문맥 속에서 구성된 마음(成心)’에 근거하고 있기에 유한할 수밖에 없다. 삶이 유한하다면 인식 또한 유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인의’와 ‘성지의 규범’같은 보편성을 자임하는 관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강신주에 따르면 “‘사변적 인식’이 자임하는 보편성은 기본적으로 태생적인 유한성을 은폐하면서 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양생주〉 1장의 내용은 방대한 지식을 추구하기에는 삶이 너무 짧다는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보편성을 자임하는 관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일에 대한 경고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변적 인식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삶 혹은 생명이란 무엇일까? 프랑수아 줄리앙에 따르면 장자적 사유의 문법 속에서 生이란 형이상학적 관념으로서의 ‘삶’과는 무관한, 그가 ‘산다는 것’이라고 부르는 차원을 지시한다. 프랑수아 줄리앙이 말하는 ‘산다는 것’이란 어떤 신비로운 영역도 가리키지 않는다. 산다는 것은 다만, 노자적 道가 이름붙일 수 있는 영역을 초과해 있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 있을 뿐이다. 줄리앙은 장자적 의미의 生을, 관념으로는 붙들 수 없는 오고-감의 작용 자체로 이해한다.

“개인의 생명은 죽음과 번갈아 나타나는 가운데 현실화하지 못한 형상으로부터 현실화한 형상으로의 ‘오고-감’으로서 뿐만 아니라, 현실화한 형상으로부터 현실화하지 못한 형상으로의 ‘오고-감’으로서도 묘사되고 있다.”(프랑수아 줄리앙, 《장자, 삶의 도를 묻다》, 114p)

〈재유〉편 3장에서 황제(黃帝)는 광성자(廣成子)를 만나 백성을 기르는 법을 묻지만, 흔히 그렇듯 결국 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광성자의 표현에 의하면 도는 “무궁한 문(無窮之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이라는 이미지다. 도는 유(有)와 무(無), 현실화된 것과 잠재적인 것을 쉴 새 없이 가로지르는 ‘무궁한 문’이다. 이러한 도의 끊임없는 오고-감을 표현하기 위해 〈재유〉의 저자는 안에도 밖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문으로 그것을 이미지화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도의 작용 가운데 있는 우리의 생명 역시 ‘오고-감’의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조차 결코 멈춰있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일정한 신체의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찰나에도 해체와 결합을 거듭하고 있다. 장자적 의미의 生이 ‘삶’이라고 하는, 다른 것들과의 구분 속에서 성립되는 관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의와 성지의 규범, 그리고 예악과 같은 미칠 수 없는 법도 등등. 무군파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 모든 것들은 지(知)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 묶인다. 그리고 이때의 지란  보편성을 자임하는 사변적 인식이다. 스스로가 의존하고 있는 유한한 토대를 은폐하고 무한을 가장하는 고착된 지는 무엇보다도 오고-감이라는 삶의 지평을 부정한다. 〈거협〉 4장에 따르면, 윗사람이 지혜를 좋아하고 도를 무시하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고만 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추구할 줄 모르며, 모두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난할 줄만 알고 이미 좋다고 생각한 것을 그르다고 할 줄은” 모르게 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처럼 무군파가 비판하는 ‘지혜를 좋아함(好知)’이란, 스스로가 발 딛고 있는 유한성을 인식할 줄 모르며 변화를 거부하는 고착된 태도를 뜻한다.
그렇다면 ‘절성기지(絶聖棄知)’하여 지켜내야 할 본성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 〈양생주〉편에서 언급되는 生의 변주일 것이다. 〈마제〉 1장에 따르면 사람들은 ‘일정하게 타고난 본성(常性)’이 있다. 그리고 이를 일러 ‘하늘이 놓아준 것(天放)’이라 한다. 우리가 일정하게 타고난 것, 하늘이 놓아준 것은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천방이란 “自然의 放任을 의미”한다. 우리가 타고난 것은 ‘자연의 방임’이다. 우리의 본성은, 항상된 리듬 속에서도 결코 동일한 것을 반복하지 않는 자연이 놓아준 것이다. 자연의 방임이 그 자체로 우리의 본성이기에 우리는 둥글더라도 그림쇠에 꼭 들어맞지 않으며, 모났음에도 곱자에 딱 들어맞지 않고, 굽었을지언정 갈고리에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산다는 것’이 결코 ‘삶’이라는 관념에 환원되지 않는 측면을 함축하는 것처럼, ‘상성(常性)’은 인간본성에서 어떤 외부적 가치의 척도로도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지점을 가리킨다.

3. 아나키즘과 본성 ― 어떻게 통치를 거부할 것인가

‘하늘이 놓아 준’ 것으로서의 본성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본 것은 본성이 이야기되는 층위였다. 구체적으로 본성을 지킨다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 본성이라는 개념이 제기하는 독특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리우샤오간은 무군파의 특징으로 강경한 현실 비판과 천(天)의 자연 대신 인성(人性)의 자연을 강조했다는 점을 꼽는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장자철학의 전체적인 특징이 “현실 초탈과 현실 도피”인 데에 반해 무군파로 분류되는 편들은 “현실을 도피하려 하지 않고 현실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가한다.

“장자의 착안점은 크고 구별이 없으며 일체를 초월하는 도의 성질에 있지만, 무군파가 서 있는 곳은 어떠한 침범도 받지 않을 인간 본성의 권리에 있다. 그리고 장자가 요왕과 걸왕을 같이 보는 것은 일체의 모순과 차별을 무시하여 현실을 초탈하기 위한 것이지만, 무군파가 요왕과 걸왕을 같이 보는 것은 일체의 군주 통치를 없애려는 것이니 둘의 목적에는 다른 점이 있다.”(리우샤오간, 《莊子 哲學》, 402p)

장자철학의 전체적인 특징이 현실 초탈과 현실 도피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무군파가 보다 직접적이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현실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성역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게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본성의 실체적 정의가 전면에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무군파에 속하는 편들은 본성이란 본래부터 타고난 것이며, 고금이 다르지 않고, 바꿔서는 안 되는 것임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이러한 강한 어조는 본성이라는 범주가 통치일반에 대한 거부를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천하 사람들이 타고난 성명의 실정을 누릴 수 있다면” 여덟 가지 덕목(明聰仁義禮樂聖知)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라고 말하는 구절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의 견해와 닮아있다.

“동물의 무리에서는 군집생활의 결과로 사회적 본능이 강하게 발전하며, 그 결과 본능은 가장 지속적인 속성이 되고, 이 본능은 자기보존의 본능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 이 관점이 옳다면, 인간의 도덕원리는 거의 모든 생물의 속성이며 모든 살아있는 자연에서 관찰되는 사회성의 본능이 지속적으로 발전된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표트르 크로포트킨, 《아나키즘》, 155p – ‘청년지성블로그’ 〈우리에겐 남을 위해 흘릴 눈물이 있습니다〉에서 재인용)



무군파와 크로포트킨의 공통된 견해는 인간의 삶에 국가의 통치가 필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혹은 야만과 문명을 구분 짓고 전자로부터 후자로의 이행에 당위를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부정을 함축한다. 무군파에 따르면 문명이 만들어낸 모든 가치체계는 군더더기일 뿐이며,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인간은 무리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국가라는 제도나 사회계약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이미 부여받았다. 오히려 통치는 인간의 타고난 덕을 손상시킨다는 것이 무군파의 문제의식이다. 그런 점에서 무군파에게는 좋은 통치와 나쁜 통치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이들의 관점에서 요(堯)와 걸(桀)은 한 통속(?)이다.
그러므로 실천적인 관점에서 본성을 따르는 일은 통치에 대한 거부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통치를 거부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어떻게 본성을 따라 살 것인가? 여기에 답하지 못한다면 무군파의 급진성은 상상의 영역에 머물고 말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혁명을 조직해서 국가를 허물고 지덕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이들의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에게 지덕의 시대는 문명을 낯설게 보기 위한 장치에 가까운 것이지, 돌아가야 할 고향은 아니다. 외편을 통틀어 지덕의 시대가 돌아가야 할, 혹은 새롭게 만들어내야 할 무언가로 제시되는 일은 한 번도 없다. 무군파가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자신들이 차고 있는 족쇄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지금의 세상에서는 사형당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서로 베개를 베고 누워 있고, 차꼬를 차고 칼을 쓴 죄수들이 서로 밀칠 정도로 바글거리고, 형륙(刑戮)을 당한 자들이 서로 마주 볼 정도로 많은데 유가와 묵가의 선생이란 자들은 차꼬와 수갑을 찬 죄인들 사이에서 뛰어다니며 팔을 걷어붙이며 뽐내고 있으니 아! 심하구나! 그들이 부끄럼 없이 수치를 모름이 심하다. 나는 聖과 知가 차꼬나 목에 씌우는 칼 따위의 쐐기가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지 못하겠고, 인의가 질곡(桎梏)을 채우는 자물쇠가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지 못하겠으니 어찌 증삼이나 사추가 桀이나 盜跖의 효시(嚆矢)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 때문에 성과 지를 끊어 버려야 천하가 크게 다스려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장자》 외편 〈재유〉 2장, 전통문화연구회)

무군파의 관점에서 성인은 도둑을 낳고 외재적 척도가 되는 가치들은 백성들 사이의 다툼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죄인들이 팔에 차고 있는 수갑과 지식인들이 지니고 있는 성지의 규범은 그들 각각을 예속에 빠트린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무지가 무군파의 탄식을 자아낸다. 우리는 왕이나 국가가 채우는 수갑만이 아니라 스스로 내면화한 보이지 않는 수갑 또한 지니고 있다.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고만 하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추구할 줄 모르며, 모두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비난할 줄만 알고 이미 좋다고 생각한 것을 그르다고 할 줄은” 모를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수갑을 채우고 있는 셈이다.


아나키즘(anarchism)이란 말은 無(ἀν-)와 지배자(ἀρχός)가 합성된 고대 그리스어 아나르코스(ἄναρχος)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프루동에 따르면 아나키즘은 “지배자나 군주가 없는 상태”의 창조를 목표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를 제도적 혁명을 통해 이룩할 수 있을까? 자신이 차고 있는 수갑을 풀고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는 능동적인 과정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지배자/군주는 언제든,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많은 아나키스트들(혹은 아나키즘 연구자들)은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와 구분하고자 한다. 아나키즘은 단순히 제도적 차원에서의 무정부주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권위에 대한 거부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의 구체적 일상과 접속할 수 있는 지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무군파의 통치에 대한 거부도 마찬가지로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재유〉편 3, 4장에 연이어 나오는 황제-광성자, 운장-홍몽의 대화는 질문의 지점이 바뀌어야 함을 시사한다. 황제가 백성들을 기르고 뭇 생명을 이루게 하는 방법을 묻자 광성자는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는다. 석 달 뒤 황제가 ‘장생구시(長生久視)’를 묻자 광성자는 드디어 지극한 도를 일러준다. 운장이 홍몽에게 뭇 생명을 기르는 방법을 묻자 홍몽은 “나는 몰라, 나는 몰라”라고 하다가 “마음을 길러라(心養)”라며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무군파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어조로 문명을 비판하고 있는 〈재유〉편에 삽입되어 있는 이 일화들은, 유위정치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정치’라는 범주화된 지평이 아니라 생명(生)과 마음(心)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장자가 문제 삼는 것은 생명(生)과 마음(心)이다. 중심을 외부에서 주어진 고착된 가치들(知)로부터 자신의 생명으로 옮겨옴으로써 마음의 흔들림이 없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모든 권위에 저항하는 일이 아닐까?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훼손하는 모든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덕충부〉에서 장자가 묘사하는 ‘본래의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은’성인은,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아나키스트이기도 하다.

“성인은 자유롭게 노닐어서 지식을 잉여물로 여기며, 사람을 구속하는 예의를 아교풀로 여기며, 세속의 덕을 기워 붙이는 것으로 여기며, 기술을 장삿속이라고 생각한다. 성인은 억지로 도모하지 않으니 어디에 지식을 쓰겠으며, 깎아 장식하지 않으니 어디에 아교풀을 쓰겠으며, 본래의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으니 어디에 세간의 덕을 쓰겠으며, 팔지 않으니 어디에 장삿속을 쓰겠는가.”(《장자》 내편 〈덕충부〉 5장, 전통문화 연구회)

우리는 어떻게 본성을 따르는 아나키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 덕이 드러나지 않아야 함(德不形)을 말한다. 그런데 이때의 불형(不形)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드러나지 않음’이고 두 번째는 ‘특정한 형태를 갖지 않음’이다. 나는 이 두 해석이 양립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성인의 덕은 특정한 형태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구분 짓고 분류하는 눈에는 포착되지 않는다. 불형의 덕이야말로 성인의 자유이자 저항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형태로 환원되지 않으며 기존의 척도에 포착되지 않는 덕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통치에 대한 거부인 동시에 본성을 지키는 일이다.

결론 : 무용지용(無用之用), 본성을 발명하기

앞에서 이야기한 자살의 문제를 다시 떠올려보자. 자살은 ‘금융의 침략적 오만’으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하다. 우리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어떤 추상적 영역이기 이전에 바로 우리 자신 아닌가? 자본주의는 결코 자기 힘으로 온전히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긍정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매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수록 우리는 바깥의 권위에 의존하게 되고 본성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자살이 아닌 방식으로 스스로에게서 탈주하는 일이 아닐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스스로의 본성을 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본성은 미리 주어진 별개의 항이 아니라, 항상 규정과 척도를 빠져나가며 구성되는 중에 있다. 무군파가 인의와 예약을 비판했던 것은 그것이 척도로 군림하며 거기에 맞춰 짧은 것은 늘리고 긴 것은 자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든 것을 동일화하려는 힘에 맞서 본성을 지킨다는 것은, 거기에 포착되지 않는 본성을 발명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때 본성을 발명하는 일은 쓸모없음의 쓸모를 발명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 쓸모를 대신해서 새로운 사회적 쓸모를 계발하는 것은, 새로운 수갑을 발명하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쓸모의 영역으로 다시 포획되지 않는 쓸모없음의 쓸모를 발명하는 일이다.〈변무〉5장은 대상 사물이 아닌‘자연 그대로의 내면의 자기’를 보는 일과 다른 사람의 즐거움이 아닌 자기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일에 대해 언급한다. 이 장이 보여주는 것은 스스로의 본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가치체계를 재배치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점이 아닐까.
이반 일리치는 “쓸모있는 실업(失業)을 할 권리”라고 말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수익성의 차원에서 계산되며, 직장 밖의 일상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자유는 점점 줄어들고, 무직이 “자신과 이웃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한 자유라기보다는 슬픈 게으름”이 되었다. 이에 일리치는 전문가들로부터 더 많은 것들을 보장받을 권리(=의미 있는 일을 할 자유의 상실)를 말하는 대신 실업상태에서 쓸모있는 일들을 구성할 권리를 말한다. 자본이나 전문가를 통하지 않고 우리의 쓸모를 구성하는 것, 이는 본성을 따르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전체 3

  • 2017-07-24 15:25
    건화님! 쓸모본성론 조오씁니다. 저도 쓸모를 변주시키며 '아나키스트'적 본성을 발명해보도록 하겠슴다! ^^

  • 2017-07-24 15:25
    본성을 발명하는 일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과 연결이 되겠군요. 하지만 문제는 자본주의는 어떤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서 저항해야 할 방법을 몰랐습니다. 그동안 괜히 자본주의자!라면서 기업가들만 욕했죠. ㅋㅋㅋㅋ 그런 점에서 본성의 문제로 환기시키는 것은 다르게 저항할 수 있는 지점인 것 같네요. 이반 일리치의 쓸모있는 실업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도 궁금해집니다.

  • 2017-07-24 19:10
    '직장 밖의 일상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자유는 점점 줄어들고'라는 대목에서 울컥니다.
    분노로 감정을 소모하는 방식은 결코 저항이 될 수 없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