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413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4-08 17:24
조회
676
“A가 B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는 것, 다만 세계에 “배신하다”가 존재한다는 채운쌤 말씀, 다들 어떻게 이해하셨는지요?
쉬는 시간에 아라쌤(계속 이 이름 쓰실 거져?-_-)께서 하신 질문도 이와 연관되어 있는 듯합니다.

일단 채운쌤 설명은, 부정법으로서의 ‘배신’이 잠재적으로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며, 개체들은 이를 자기 방식으로 구현할 뿐이라는 것이었지요.
존재는 일의적이라는 <차이와 반복>의 한 대목을 떠오르게도 하는 이야기네요.
헌데 이럴 경우 곧잘 따라 나오는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럼 A에게는 잘못을 물을 수도 없다는 것인가, 책임이 A에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인가, 그럼 우리는 막 살아도 된다는 건가.
이미 부정법으로서 존재하는 사건이 있다는 건 A가 그 사건의 원인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무릇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한다든지, 어떻게 해야 한다든지 하는 명제 따위가 다 사라져버린 無의 세계에 우리가 던져지는 것은 아닌가 등등.

공교롭게도 그날 아침 유쾌하지 않은 사건 보도를 접했습니다.(공통과제를 써야 하는 그 바쁜 와중에도 네이버 뉴스를 보는 나라는 인간!=_=)
친인척으로부터 몇 년 동안 성폭행을 당했고, 그런 과정에서 태어난 아기를 의도치 않게 죽이게 되었다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였어요.
자, 이럴 경우 사법계에서 밟는 절차는 명약관화합니다.
아기를 죽인 여성을 입건하고, 그녀가 가해자라고 지목한 남성도 입건해야지요. 그리고 심문과 조사 과정을 거쳐 사건을 규명한 뒤 죄질에 따라 두 사람에게 처벌이 가해집니다. 어쩌면 이 과정에서 방조죄로 피의자의 처 또한 입건될 수 있겠네요.

이처럼 원인을 밝히고 그 원인에 해당되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사건 현장에서 뽑아내 다른 장소로 격리하는 것, 이것이 범죄추리소설의 플롯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예비평가인 프랑코 모레티는 이를 두고 원상복구(라던가…? 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 않네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낱낱의 일들을 밝힘으로써 세계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밝히느냐에 따라 (이런 게 있다면)청결의 회복 정도가 달라질 거예요.
재미있게도, 그러므로 빅토리아 시대의 명탐정 셜록 홈즈가 한 일은 사실상 ‘봉합’입니다. 세계의 봉합.
발생한 하나의 사건을 깨끗하게 소멸시키는 것, 세계 내 그런 일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 양 하는 것.
이를 위해 그와 조수는 그토록 분투했던 거죠. 피를 씻어내기, 범죄자를 뽑아내기, 불결함을 박멸하기. 즉, 원인을 찾아, 그것을 없애기.

우리는 그러므로 홈즈의 마지막에서 언제나 안도합니다. 그래서 홈즈를 그토록 사랑하죠.
우리는 하루빨리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살인자 여성과 성폭행 가해자 남성이 각기 자신의 죄질에 알맞은 형을 언도받았다는 보도가 나오길 기다립니다. 그래야 안도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사건이 부정법으로서 세계 안에 있다고 말하고 나면 이제 우리는 어떡해야 하는 건가요?!

일단 이 말은, 이 세계에 ‘있을 수 없는 일’ 따위는 없다는 의미겠죠.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계는(신은, 우주는, 자연은, 비로자나불은) 그토록 풍요롭고 절대적이니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인간이 물질계 내에서 발생되는 이 수많은 현상들을 ‘표상’해 의미화 한다는 데 있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물질계 안에서 다른 물질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현상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거기에 주어 ‘I’의 자격으로, ‘I’의 사용자로서 물질계를 ‘구성’해낸다는 데.
촉감이 가져오는 전기적 자극에 반응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감각 경험을 가지고 세계는 이러저러한 장소라고 표상해내고, 그 안에서 존재들이 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의미화하지요.
의미화란 모든 현상에 대해 ‘떠든다’는 차원이 아니라고 채운쌤이 덧붙이셨던 것 기억하시죠? 하나의 신체 작용을 언어로 지시한다는 차원을 의미화라고 하는 게 아니라고요.
사실상 우리는 매순간 행위로서 자신의 의미화 작업을 보여줍니다.
니체는 이를 ‘해석’이라 불렀지요. 신체는 우리가 해석한 그 사건에 대해 다시 운동하면서 또 다른 사건들을 만들어냅니다.
아이를 죽인 젊은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내린 해석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그녀의 행위를 통해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의미화이고, 이렇게 의미화 함으로써(남자가 나쁜 놈, 하지만 피해자도 이해할 수 없다, 남자의 처는 또 어떻고, 요즘 사회가 흉흉한 탓일까, 어린 애들은 이제 어떡하누 등등) 우리도 저 사건에 어떻게든 연결되는 거죠.

채운쌤은 바로 여기가, 주체가 역량을 발휘할 지점이라 하십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모든 일에 대해 자기 나름으로 의미화 작업을 진행합니다.
의미화 작업을 진행하면 안 된다는 게 아니죠. 인간은 인간인 한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들뢰즈가 요구하는 것은 분열증 환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분열증적 사유를 통해 새로운 사유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가 되라는 것이라고 언젠가 수업 시간에 들었던 기억이…)

아무튼 관건은 여기 있습니다. — 자신이 사건을 어떻게 의미화 하는지를 살펴볼 것.
자신이 어떤 상식과 양식과 특정 욕망들을 가지고 현상을 계열화하는지 지켜볼 것. 무심코 내가 내리는 판단에 대해 ‘힘을 내서’ 머무르며 지켜볼 것.
만약 자신이 어떤 질서에 따라 관념을 형성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따져볼 수 있었다면, 그녀는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우발적인 행동이 비극인 이유는, 그것이 사회가 지탄하는 범죄여서가 아니라!그녀가 그런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약자라는 것을,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말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녀가 ‘사회에서 말하는’ 약자라서 비극인 것도,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성폭행 가해자가 세상에 존재해서 비극인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그 집을, 그들의 관계를,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의미화 하는지 ‘사유’할 수 없는 인간이, 부정법으로서 존재하는 ‘죽음’ ‘폭력’ ‘힘’ ‘性’ 따위를 끝내 그 같은 방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한, 겪어내지 못한, 살아내지 못한 것이 비극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건은 우리 모두가 상식선에서 정리 가능한 문장에 별다른 간격 없이 포개지게 되지요.
성폭행 피해자인 여성은 패배감과 두려움과 분노 속에서 아기와 대면하다 끝내 아기를 숨지게 했다...
들뢰즈, 그리고 채운쌤 표현대로 이는 인간이 표상을 ‘선용’하지 못했을 때 이어지는 귀결인 듯합니다.

이와 대조적인 사례로 채운쌤은 비극의 주인공들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이름은 언급이 안 되었던 것 같지만 아마 대표적인 케이스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햄릿, 맥베스 등등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 오이디푸스는 왜 위대한가요?
그가 사건 규명을 엄정하게 해서? 왕으로서 자신이 한 말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원칙주의자라서? 점점 밝혀지는 진실 앞에서 쫄지 않아서?

채운쌤은 비극의 주인공들은 존재의 균질성을 욕망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힘든 것, 자신을 상하게 할 만한 것을 못 견디죠. 우린 셜록 홈즈를 기다리는 청결주의자들입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놀랍게도 자신을 가장 해할 것이 분명한 그 위험을 피하지 않습니다.
이를 그저 용기 탓이라고 퉁치고 넘어가면 곤란합니다-_- 용기가 아닌 건 아니지만, 그 용기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게 중요하죠.
들뢰즈 및 채운쌤의 말씀대로라면 오이디푸스는 사유자로서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물론 태어나길 그는 知가 승한 인간인 모양입니다. 그러니 스핑크스 문제도 맞췄겠지요.
하지만 사유는 스핑크스 앞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된 스핑크스 앞에서 발생하는 듯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왕이 되어 통치를 하고도 한참이나 지나 깨달았던 겁니다.
이제 보니 스핑크스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구나! 내가 앎이라고, 이성이라고, 지혜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그가 무지 속에서 정해진 운명을 수행했음이 밝혀지는 순간 찾아온 거지요.
모르는 채 아버지를 죽이고 모르는 채 어머니와 동침하고 모르는 채 역병의 주범을 찾아내 추방하겠다고 외쳤던 자신.
실로 눈이 있되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머리가 있되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자신.
이를 뼈저리게 깨닫게 된 바로 그 순간이, 오이디푸스가 그간 자신이 세계 및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의미화하고 있는지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된 순간입니다.
그 상징으로서 그는 제 손으로 눈을 찔러버리지요. 그리고 자신에게 익숙한 상식과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 테베를 떠나 암흑의 세상, 곧 무규정적인 세상을 떠돌기 시작합니다.
……겁내 멋지지 않나요?!(라고밖에 멋진 추임을 더 넣지 못하는 이 무능력이라니;)

만약에 오이디푸스가 이 정도로 용감하고 힘 있는 사유자가 아니라면, 테베의 역병이라는 사건은 전혀 다른 사건이 되어버렸을 겁니다.
오이디푸스는 새로운 권력에 의해 끌어내려져 죄명에 합당한 방식으로 살해당하고, 병원균을 말끔히 청소한 테베는 ‘원상복구’되어 2막을 열겠지요.
그런데 오이디푸스의 놀라운 힘은 테베의 역병이라는 사건을 전혀 다른 국면으로 끌고 가버렸어요.
오이디푸스의 문제는 인간/행위/윤리 등의 키워드 속에서 계열화됩니다. 따라서 테베는 결코 원상 복구되지 않습니다. 다만 새로운 사건의 장으로 이행합니다.
약 2500년(...맞나?) 동안 존재해온 <오이디푸스>의 독자들에게 테베는 더러운 죄에 의해 병든 도시가 아니라 가장 급진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던져주는 하나의 문제적 장으로 거듭났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사유, 오이디푸스의 (장님으로, 사유자로, 방랑자로) 변신이 없었다면, 그가 그런 식으로 일을 의미화하지 않았다면, 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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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기는 대략 이 정도로 마치는 걸로 하고요, 다음 주에는 계열 25까지 읽어오시면 되어요~
계열 27부터는 정신분석과 연관된 논의들인데 읽기 꽤 어렵다 하시니 미리미리 읽어보심도 나쁘지 않을 듯.

후기 지정을 미리 하지 않아 이번 주 후기는 따로 없습니다. 정옥쌤께 이 시점에서 부탁드렸다가는 선생님 우시겠져 ㅎㅎ

간식은 저랑, (그날 말씀 못드렸는데;) 정옥쌤.

그럼 다음 주에 만나요!
전체 1

  • 2016-04-12 11:39
    테베가, 더러운 죄에 의해 병든 도시가 아니라 가장 급진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던져주는 하나의 문제적 장으로 거듭났다니요~~. 와~~ 정말 근사한데요.
    덕분에 수업 시간에 들은 내용을, 나와 내 주위의 일상적인 문제들과 연결지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