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420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4-16 16:21
조회
3572
지난 수업에서는 계열 21부터 25까지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눴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야기였다고 기억하는데, 첫 번째가 존재론적 토대에 대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그에 따른 윤리적 문제를 논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략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일의성 내지 생성의 장에 대해 듣고 있노라면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싶지만 사실 이건 동양인에게 아주 익숙한 세계관입니다.
본체 혹은 비로바자불의 세계가 그 자체로 如如하게, 自在하게 있습니다. 여기서는 따로 시초를 말하거나 기원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계는 그 자체의 운동에 의해 충만하게 존재합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氣의 운동에 의해 모든 현상이 발생하고 또 소멸하지요.
불교의 화엄 사상이라든가 유교에서 논하는 理氣가 이런 이야기랍니다.
들뢰즈는 이를 생성의 장과 현실화로 개념화했습니다.
개체 이전의 차원에서 세계가 존재합니다. 특정한 몸을 받아 태어난 내가 생로병사를 겪어내기 전에, 그러니까 내가 생로병사는 이러저러한 것이고 우주란 인간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의미부여 하기 전!부터 헤아릴 수 없는 시간동안 우주는 생로병사를 겪어왔습니다.
만물이 만 가지 방식으로 생로병사를 겪는 장, 그것이 바로 우주요 생성의 장이지요.

내가 겪는 생로병사란 내가 특정한 방식으로 ‘붙든’ 사건에 다름 아닙니다.
나의 신체적 감각, 기억들, 누군가에게 듣고 배운 것 등을 바탕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포착해 의미 부여한 것이 어떤 죽음, 어떤 삶, 어떤 이별이 되는 거지요.
죽음 자체, 우주에 존재하는 죽음 자체는 시종 있어 왔는데, 특정 개체가 겪어내면서 이를 특정한 방식으로 의미 부여한다는 겁니다.(같은 무리에 있던 들개 한 마리가 죽었을 때 남은 개들이 느낄 어리둥절함을 우리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같이 걷던 개가 갑자기 걷지 않게 되고 길 위에 머무르는 어리둥절한 사건이겠죠.)

여기서 절묘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사건이 ‘시제’로 구분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내가 겪는 죽음, 내가 겪는 이별에는 시제가 있습니다. 내가 어제 겪은 일, 꿈에서 겪은 일, 겪고 싶은 일, 그리고 보다 울림이 컸던 일, 사소했던 일에 대해 내가 사용하는 말이 각기 다르고 다른 일들과 연관 짓는 정도도 다르지요.
생성의 차원에 존재하는 사건이 나를 통해 구현되고 의미화 된다는 것, 그것은 곧 내가 그것을 언어화한다는 것, 주어와 연결해 말한다는 것, 시제를 붙여 멀고 가까움을 표시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채운쌤께서는, 이 지점에서 사유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제기된다고, 사유야말로 윤리적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지난 시간 채운쌤 말씀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한 문장은, 사건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정법으로서의 사건, 생성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우리가 의미화한 사건으로 결코 환원되지 않습니다. 모든 개체는 오직 제 신체가 경험한 사건만을 알 뿐이니까요.
이것은 불가지론에 빠지는 길도, 타자에 대한 관용과 이해에 대한 얕은 수준의 설득에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이 때문에 표상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가 요구됩니다.(지지난 수업에서 말한, 현자들의 ‘표상의 선용’이 이와 연결되지요)

이번 주 읽은 인상적인 이야기는 磁器의 균열이었지요.
균열이 뭔가요? 언제 시작되었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알 수 없는 금이죠. 수많은 원인들이 착종되어 만들어진, 진행 중인 선입니다.
하지만 이 선은 봉합되어야 하는 ‘하자’ 같은 게 아니라 존재의 본질이라는군요. 청자 표면에 난 균열들이 靑磁를 살아 있게 한다는 채운쌤 말씀이 인상적이셨죠?
균열은 내 단단하고 매끄러운 표상을 흘러넘치는 생성의 차원을 표시합니다. 화산의 단단한 지표 아래에서 움직이는 용암처럼 사건은 내가 계열화해 놓은 의미를 언제라도 파열시킬 수 있습니다.
바로 이를 대면하려 할 때 비로소 사유가 시작된답니다.
채운쌤 표현에 따르면 사유란 기존에 내가 현실화한 계열들을,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계열들과 소통시키는 것. 내가 붙들어놓은 이미지와 인과에 고착되지 않고 사건을 사유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유랍니다.
…왜 그런 걸 해야 하느냐고요? 글쎄요, 죽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표상에 짓눌려 질식하거나 얼어 죽지 않기 위해 -_-

사건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말은 고전이 고전일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듯합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새롭게 현실화되는 사건의 장이 아니라면, 도대체가 종이 나부랭이에 불과한 사물을 몇 천 년 동안 사람들이 찾을 리 만무하지요.
훌륭한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의 차이가 여기 있는 듯합니다. 고만고만한 상식과 양식을 가지고 세계를 표상한 책들은 그 낮은 문턱 덕에 한시적으로는 사랑받을지 몰라도 조만간 잊히고 말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일정한 접속만을 허용하는, 일정한 욕망에만 충족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사유를 촉발하는 책은 곧 다양한 접속을 가능케 하는 책, 다양한 의미화들이 구성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권의 책이 때에 따라 달리 읽히는 정도로 그 수준을 논할 수 있다면, 고전이란 가히 최고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공부란 그런 면에서 사유 활동입니다. 문제는 고전 속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고전에서 내가 새로 현실화시킬 사건들에 있습니다. 그 현실화를 사유라 부를 수 있겠지요.

오늘은 세월호 2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어제 늦은 시각에 몇 개의 동영상과 뉴스를 찾아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제가 특정한 방식으로만 이 사건을 대면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제가 어째서 아직까지도 감정이 앞선 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지 알겠더군요. 공부가 필요합니다. 흠흠.

다음 주에는 계열 30까지 읽어오시고요, 후기는 최정옥쌤 / 간식은 수영과 쿠누쌤께 부탁드립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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