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0427 수업 공지

작성자
수경
작성일
2016-04-22 20:06
조회
669
<의미의 논리> 시작하고 저는 지난 시간만큼 이해하기 힘들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여러분들은 어떠셨는지? ㅜ_ㅜ
정신분석학에 대한 지식이 일천해 개념들도 생소한 데다 그 사이를 자유자재로 누비면서 들뢰즈가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짐작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요.
채운 쌤께서 몇 차례고 설명해주셨으나, 역시 거의 이해를 못 한 것 같고… 다만 몇 가지 생각나는 것들만 정리하려 합니다;;

일단 정적 발생과 동적 발생.
전에 살펴본 정적 발생에서 들뢰즈는 논리적 차원에서 개체의 발생 및 인칭의 탄생을 다루었죠.
이번에는 동적 발생입니다. 이는 한마디로 신체적 차원에서의 발생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심층으로부터 표면이 처음 발생하는 순간, 아직 패턴도 반복도 없는 소음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출현하는 순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명제를 다루는 정적 발생에서는 말하기와 먹기가 이미 구분된 상태였지요. 여기 동적 발생에서는 그보다 전에, 말하기가 먹기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가, 비물체적 사건이 어떻게 물체들의 상태로부터 나올 수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에서 어떻게 의식이 나올 수 있는가, 어두운 심연에서 어떻게 존재가 올라올 수 있었는가.
이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을 택합니다.
특히 유아 및 아동을 관찰 및 분석 대상으로 삼았던 멜라니 클라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 땅 속의 두더지와 다를 바 없는 상태에서 자아를 지닌 개인이 되는지를 나름의 방식으로 설명해내고 있지요.

사실 책에 이를 설명하는 엄청난 이야기들이 수두룩한데 제가 이걸 거의 이해를 못했어요.
그런 채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심층과 상층, 그리고 그로부터 출현하는 표면 — 요 세 개의 개념이 전부랍니다; 암튼 그것만 대략 이야기해보자면…
일단 채운 쌤이 수업 시간에 존재의 일의성 이야기부터 시작하신 게 떠오르는데요.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코드화되기 전 세계는 하나의 흐르는 질료 상태랍니다. (얼마 전 읽은 로브그리예의 짧은 에세이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세계는 의미 있는 것도 아니고 부조리한 것도 아니다. 세계는 단지 있는 것이다.” -<미래의 소설을 위한 하나의 길> 중)
그런데 우리가 이를 특정 문화로 코드화해 세계를 규정했을 때 비로소 그것이 특정한 세계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하지만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정말로 그 모든 것. 왜냐하면 세계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상정할 수 없으므로)은 일시적으로 절단, 채취될 뿐으로, 세계 자체는 언제나 코드들을 흘러넘치지요.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생각보다 훨씬 놀라운데, 우리가 규정하는 나, 인간, 삶… 은 늘 그 바깥에 있는 것, 우리가 ‘잠재적인 것’이라 부르는 그 흘러넘치는 것과 함께 있고 소통한다는 사실이 그겁니다.
특정 시공간에 내가 태어났을 때 나는 그래서 세계의 모든 것과 소통한다는 거죠. 내 안에 우주 있다! -0-

그러니까 일의적 존재, 즉 세계(내지 자연, 우주, 생명…) 안에서 일시적으로 출현한 존재물이 우리라는 이야기가 되지요.
바로 이 이야기에 이어 들뢰즈는 서서히 정신분석학 언어가 난무하는 숲으로 들어갑니다.

인간도 태어나서 한동안은 규정되기 전의 자연으로서 꿈틀댑니다. 자아 없이 각각의 근육과 신체 기관들이 움직이면서 먹을 것을 찾고 먹은 것을 내보내지요.
요람에 누워 있는 것은 아직까지 비인간입니다. 인간을 자아를 가진 존재로 규정한다면 말이죠.
지금 요람에 있는 것은 항문과 페니스와 목구멍입니다. 그 각각의 것이 자기와 접속할 다른 부분대상을 찾아 움직이지요.
엄마는 아직 엄마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먹이죠.
멜라니 클라인은 이처럼 부분대상으로 존재하면서 부분대상으로 엄마를 취하는 상태를 편집증적-분열증적 위치라 정의합니다. 각각의 기관이 아직 ‘I’로 수렴되지 않는 이 신체는 정말이지 분열적입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때를 이드(id, 무의식) 단계로 본답니다.
들뢰즈는 바로 이를 심층으로 간주합니다. 아직은 어떤 것 하나 절단되지 않은 무규정적 상태, 오직 흐름만 있는 심연의 장소지요.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나면 젖먹이가 엄마 목소리를 분간하는 때가 옵니다.
엄마가 더 이상 젖/젖가슴이 아니라 엄마라는 전체로 나타나는 거지요.
이때 아이는 엄마를 좋은 대상으로 여기면서 자신을 그와 동일시하고자 하고 좋은 대상이 사라질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네요. (이 부분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이야기가 한참 많았는데;)
암튼 들뢰즈는 여기를 동적 발생의 첫 단계로 봅니다. 소음에서 목소리로의 이행, 심연에서 어떤 것이 발생하려는 조짐이 시작되는 거죠. 이때 만들어지는 것은 엄마가 있는 저기 저 상층입니다. 상층에서 슈퍼에고(초자아)가 만들어지지요.

이처럼 젖먹이 상태의 심층, 뒤이어 나타나는 상층, 여기에 이어, 바로 그 둘 사이에서 표면이 발생한답니다.
채운쌤 설명에 따르면 표면은 들뢰즈가 ‘지대’라고 말한 바로 그것, zone입니다. 바로 이 표면이, 우리가 말하는 그 자아, 에고가 있는 곳입니다.
뭔가 신기한 이야기 아닌가요? 보통 우리는 인간 존재를 알려면 깊은 내면을 투사해야 한다고 믿는데, 자아는 밖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안쪽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자아는 표면에 있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아마도 자연으로서의 심층, 잠재론적으로 있는 모든 것이 상층의 사회적인 목소리와 만났을 때, 바로 그때 특정한 자아가 산출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어 사용자인 자아는 무의식 자체가 아니며 그렇다고 상층의 이데아도 아닙니다.
그 둘이 특정한 방식으로 만난 뒤 물체적 차원에서부터 언어적 차원으로 넘어왔을 때, 그때 비로소 인간이라 할 만한 것이 발생되는 거죠.
정신분석학에서는 이 시기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합니다.
아버지의 법(팔루스)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오이디푸스기를 제대로 통과했을 때 비로소 아이는 하나의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헤라클레스와도 같다고, 들뢰즈는 재미있는 비유를 드네요.
“오이디푸스는 심층들의 지옥 같은 잠재력을 쫓아냈으며, 상층들의 천상의 잠재력을 쫓아냈다. 그리고 오로지 제3의 제국을, 표면, 오로지 표면만을 요구했다. 이 표면으로부터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오이디푸스적 확신이, 그리고 예언을 비켜가기 위해 그가 갈무리해야만 했던 확실성이 나온다.”

그런데 들뢰즈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계열 29에 가서 그의 오이디푸스 비판이 시작되지요. 채운 쌤 설명에 따르면 대략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의도란 행위에 덧붙여진 이미지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험적으로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어서 인간이 이러저러하게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뒤이어 원인으로 그것을 지목한다는 것, 행위 이후에야 행위에 그것을 덧붙인다는 거죠.
정신분석학은 모든 아기들이 오이디푸스기를 거치고 그때 거세 공포와 욕망과 두려움 등등에 휩싸이는 것처럼 말하지만, 이는 조작된 원인이라는 겁니다.
행위는 그냥 행위일 뿐, 이런저런 것들에 의해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 …이건 <앙띠오이디푸스>에 가보면 또 반복될 이야기 같기도.

두 번째 비판은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탈성화(형이상학화) 개념을 향하고 있습니다. 채운 쌤께서는 이 이야기가 <앙띠오이디푸스>의 테마 중 하나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암튼, 정신분석학적 논의에서 윤리적 실천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욕망을 탈성화 할 것인가랍니다.
그런데 사실상 욕망이 모조리 성으로 환원되지도 않을뿐더러, 모든 욕망은 언제나 흘러넘치므로 결코 형이상학화 될 수 없다네요.
욕망을 그런 식으로 봉합하려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흘러넘치는 욕망의 과정을 제대로 보는 것, 그리고 그 욕망을 혁명적 에너지로 사용하는 것이 관건이랍니다.
뭔가 멋진 말인데 알 듯 말 듯… 이것 역시 다음 학기를 기약하도록 하죠.

자, 암튼 여기까지 오긴 왔는데 아직 끝이 아닙니다;; 페이지를 후루룩 넘겨보니 다음 시간에도 엄청나게 요상한 이야기들 천지네요. 다들 부디 열독하시길. =_=

이제 학기 끝이 보입니다. 세미나 팀이야 물론 에세이 준비를 시작하겠지만, 저녁강의만 참석하시는 분들도 각자의 공부를 위해 한 번 시도해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주변에 3학기 <앙띠> 홍보도 좀 해주시고요.

그럼 모두 다음 주에 뵙지요. 간식은 편입생 우진쌤+뒷줄 날라리 병선 되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뇽히~
전체 6

  • 2016-04-22 21:44
    ㅋㅋ 애쓴 흔적이 역력하군. 정신분석학은 골치가 아프지만... 배울 점이 있는 건 분명하니까 어찌어찌 넘어가야! 안티-오이디푸스에 가서 본격적으로 얘기될 테니 모두들 걱정마시압(걱정하시압)!^^

  • 2016-04-24 17:42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것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그런가 멜라닌 클라인의 영, 유아 시기 아동에 대한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어요. (음.. 저는 처음 알았어요^^;) 프로이트와는 달리 단계가 아니라 위치라는 표현도 이해가 더 쉬웠고요. 단계라고 하면 넘어서야 할 무엇인 것 같아서요.
    아기에게 젖을 떼는 과정은 정말 대단한 사건일 것 같아요. 엄마젖이건 젖병이건 말이예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환각까지 일으킬까.. 그게 제가 생각하는 환각은 아니겠지만요ㅋ 노에마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환각'에서는 노에마적 빈위라는 말도 나오고 노에마적 핵이라는 말도 나오고.. 네이버에 보면 '노에시스에 대해 의식 내면에서의 객관적 측면'이라고 하는데.. 이 노에마가 꽤 이전부터 나왔는데 완전 경기 일으키겠어요 @.@

    • 2016-04-25 01:31
      우리를 미치게 하는 것이 어디 노에마-노에시스뿐이랴!ㅋㅋ 이왕 언급하셨으니 이번 시간에 얘기해보기로 하지요.^^

    • 2016-04-25 10:27
      래미쌤 가끔 댓글 달아주시는 거 보면 들뢰즈 공부 열심히, 재미있게 하시는 것 같은데.. 이제 우리랑 낮에도 같이 좀 공부해주심 안되나여~ㅋㅋㅋ

      • 2016-04-26 20:09
        갑자기 늑대처럼 울부짖고 싶어요 ^-^;

  • 2016-04-26 12:00
    미뤄두다...오늘 읽어요. 후기 읽는 것조차 만만치 않군요. 암튼 그래도 초큼 상기하고 갑니당ㅌ.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