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의미의 논리21-24 후기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16-04-20 12:05
조회
694
스페이스바에 글자가 자꾸 옆으로 퍼져 첨부 파일로 올립니다.

한자변환도 안되고 컴이ㅜ

후기를 이제올리다니요.  지난주 균열을 이겨내지 못한 결과입니다.

죄송합니다. 양해바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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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논리 21-24계열 후기

 

강의를 들을 땐 무릎을 치지만 매일 갈고 닦지 않는 거울엔 먼지만 쌓이네요. 늦은 후기에 더더욱 정리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들뢰즈의 언어는 따라가기가 참 어렵습니다. 채운샘은 감각을 열으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따라가기 힘들다구요. 그는 감각할 수 있는 철학책을 쓰고자 했으니까. 들뢰즈는 저 같은 무쇠감각자들을 위해 참 다양한 형태로 변주해 설명해 줍니다. 이번시간에 새로운 개념은 반효과화였습니다. 이때의 ‘반’은 anti가 아닌 대응한다는 개념의 counter입니다. 부정법의 사건이 현실화 되었을 때 물리적 차원에선 사건이 발생을 합니다. 이렇게 효과화된 사건은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서 한 측면을 만들고 있고, 여기에 대응해 현실화 되지 않고 잠재해 있는 아이온의 시간을 반효과화라 합니다. 현실화하고 남은 생성의 시간이죠 이것을 동양에서는 ‘도’ 나‘리‘, 불성의 개념이라고 설명하셨죠. ‘리’라는 본체가 늘 그렇게 있어 변화하고 살아가는 작용이 있을수 있으니까요.

들뢰즈는 이 동시성을 자연(탈물질)과 물질로, 의미와 무의미, 잠재적 장과 현실화, 효과화와 반효과화, 선험적 장과 표면, 언어적 표상에 대해 익살...등으로 어떻게든 생성의 역동성을 감각할 수 있도록 합니다. 현실 아래 우글거림은, 그 역동적 다양성은, 우리에겐 ‘문제’로 다가오죠. 일반적인 경험 표상의 지평을 벗어난 다른 방식의 문제제기로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이 되어 나타나죠. 어려운 사건이란, 언어로 딱 정의 내리기 어려운 상태인 거죠. 이게 뭐다라고 표상이 안서는 거죠. 모든 사건은 하나의 사건에 하나의 의미로 맞추어 환원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다양한 잠재적 계열들이 있게 되겠죠.

그래서 역사적 사건을 회상하는 것도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거겠죠. 들뢰즈가 68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계열, 내가 경험으로 계열화하는 6.10. 현재의 세월호를 보는 방식등등이 다 그렇습니다. 며칠 전 참관 수업에서 본, 핸드폰과 모든 가방에 조랑조랑 매달려 있던 노란 리본과 뺏지는, 동시대 비슷한 연배의 세월호 세대 아이들이 그들 나름으로 사건화 하고 있는 거였겠죠. 그래서 사건은 언제나 시작이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n승의 역량으로 존재한다고요. 근데 n승만큼 많은 그 사건이 계열화를 향해 열려 있는데 내가 현실에서 만나는 사건이 거의 뻔하고, 다양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알다시피 다양한 의미로 계열화하지 못하게 하는 어떤 힘이 있는 거죠. 양식과 상식이 만든 외부적 환경과 자신의 욕망이 그것입니다. 보통은 그 힘에 따라 내가 겪은 사건은 내 방삭으로 효과화 하죠. 그러나 내가 겪은 것으로 환원하지 않는 반효과화의 힘. 그것이 사유라고 하셨습니다.

병을 병이 아닌 건강으로 사유한 니체, 운명을 긍정하고 그 운명의 표상을 선용할 줄 알았던 스토아 학자들의 자세가 그런거겠죠.

하지만 참 무던한 우리는 안전한 게 좋습니다. 허나 책을 읽을 때 부터 울림이 왔던 자기의 균열은 그 바램에 균열을 가져왔네요. 도자기의 균열은 숨구멍인거죠.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살아가게 하는 틈인거니까. 이 파열을 봉합하려는 것은 우리가 안전하게 잘 살기 위해 입과 코를 틀어 막는 행위인거죠. 여기서 그럼, 어떤 윤리를 내와야 하는 걸까요?

“내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으며 나는 그것을 구현하려고 태어났다” 책 읽는 우리의 마음을 짠하게 흔든 부스케의 말이죠. 사건을 원하고 기다리는 부스케의 마음. 사건이 의미화 되는데, 반효과화로 남아있는 의미화되지 않은 어떤 것 때문에 이것을 겪는다는 사유. 사건은 그 자체가 파열이고 균열이니까요. 역사의 많은 멘토들이 삶의 균열을 직시하면서 살아나갔죠. 균열 앞에 흔들리지 않고 글을 쓰게 하는 마지막 힘, 그 빛나는 중심을 지켰다는 수업의 마지막 일성은, 생활의 작은 변화에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마는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했습니다. 글쓰기 앞에 극강의 균열을 느껴도 살기 위해 공부하고 써야 하는 거겠죠. 안락한 사회속에서 존재가 부정당하는 죽음을 맞이하긴 싫으니까요.

 

 

 

 

 

 

 
전체 2

  • 2016-04-20 12:48
    정옥쌤 동의 없이 일단 한글문서에서 복사해 옮겨놓았습니다^^

  • 2016-04-21 23:52
    복습 단단히 시켜주시네요^^ 들뢰즈는 정말 생성의 철학자인 것 같아요. 카리스마 니체 때는 걍 혼나는(?) 느낌이었는데, 들뢰즈는 젠틀하게 손 내밀어 주는 것 같아요. 문제는 제가 엎어져있다는 거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