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카프카 읽기 후기(3주차)

작성자
강평
작성일
2019-10-06 17:58
조회
220
그냥 매일 글을 쓴다는 것

카프카 읽기 3주차. 몇 편의 단편과 장편 <성>을 읽어보니 밑도 끝도 없는 인과와 우연에 의한 전개때문인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같은 작품을 읽게 되고,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지는 이상한 끌림이 있다. 그의 장편 <성>,<소송>,<실종자>가 모두 미완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미완의 이유가 작가 사후 출간이기도 하고 전쟁 당시라는 점을 감안하면 작가의 건강이나 원고 분실 등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강의를 듣고 보니 처음부터 완성을 염두에 둔 작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편 <성>도 끝이 없다고는 하나 거기가 끝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고, 중간의 어디가 끝이라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未完이 아니라 非完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출발을 했으면 결론에 다다라야 끝장이 나고, 결론이 예상 되어야 짐을 쌀 채비를 하는 사람에게 카프카의 작품 읽기는 그 자체로 실패와 시도가 아닐까 싶다.

카프카는 그냥 쓰고, 그냥 걸었다고 한다. 그렇다면‘그냥 무엇인가를 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내키는대로, 마음가는대로, 닥치는대로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카프카를 법학박사 출신, 보험회사의 성실한 직원으로 낮에는 돈을 벌고, 저녁에는 글을 썼던, 인문학을 하고 싶은 직장인들의 롤 모델이라고 생각하기 싶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 않다. 낮에는 돈을 벌었다고는 하나 5시간 이상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로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어떤 일이 있어도 밤에는 돌아와 책상에서 매일 일기를 썼다고 한다. 글쓰기 장인 혹은 프로 글쓴이라고나 할까. 출판을 기획하지도 않았고 그냥 일기와 편지를 쓰고 가끔 단편을 써서 여동생이나 친구에게 읽어주기도 하는 등 글쓰기는 그에게 일상이었다. 카프카의 5시간 직장 생활은 버지니아울프의‘자기만의 방’과‘한 달 500파운드의 돈’처럼 글쓰기를 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계 그리고 직장인들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

카프카의 초기 단편 <돌연한 출발>,<인디언이 되고 싶은 마음>은 글을 쓰는 작가의 태도를 보여준다. <돌연한 출발>의 주인은 오직 자기만 들을 수 있는 트럼펫 소리를 듣고 최소한의 일용할 양식도 없이 길 떠날 채비를 한다. 하인은 주인에게 어디로 가는지 목적지를 거듭 묻지만 주인은 여기에서 떠나는 것이 자신의 목적지라고 동문서답, 혹은 우문현답을 내놓는다. 하인은 예비양식이 없어 걱정이 태산이지만 주인은 굶든 말든 엄청난 여행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인디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진짜 인디언이라면, 달리는 말에 서슴없이 올라타고,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땅 위에서 이따금씩 짧게 전율을 느낄 수 있다면, 원래 박차는 없었으니까, 원래 말고삐는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다듬어진 광야뿐일 때까지, 벌써 말 목덜미도 말머리도 없이’가 내용의 전부인 거의 시에 가까운, 짧고 응축적인 단편이다. 몇 번을 다시 읽어봐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멋진 문장이다.

지금, 미로 속으로 떠난다

카프카가 인디언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예비 양식도 없이 박차나 말고삐도 없이 앞에 보이는 광야로 돌연한 출발을 한 것과 달리 그 이후 쓴 작품에서는 광야를 달리는 대신 어쩌다 보니 미로를 계속해서 헤매고 있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이번 주에는 <선고>,<화부>를 주로 이야기했다. <선고>에는‘펠리체 바우어에게 바칩니다’라는 헌사가 있다. 펠리체 바우어는 2번 약혼했다 파혼한 애인인데 이 때는 그 여인과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쓴 작품이다. 펠리체 바우어에게 편지를 쓰고 나서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8시간 동안 단숨에 이 작품을 쓰고, 그 작품의 후기 같은 일기를 또 쓴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는 늘 더러운 잠옷 차림에 지저분한 침대 속에 구겨져 있고, 절친과 아버지는 오래 전에 내통하여 아들의 소식을 주고받고 있었으나 이제야 아들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심지어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살을 선고하고 그렇다고 또 그 아들은 자살을 결행한다. 이게 사랑하는 이한테 바친다는 헌사까지 있을 작품의 내용인가?

<화부>는 <선고>보다 더 황당한 내용이다. 주인공인 카알은 나이 많은 하녀와 사고를 치고 애를 갖게 되어 부모에게 내쫒겨 미국행 배에서 하선하던 중 두고 온 우산을 떠올린다. 짐이 무거워 그 배에서 알게 된, 한마디로 모르는 사람인 어떤 젊은이에게 짐을 맡기고 우산을 찾으러 간다. 그러다 미로처럼 복잡한 배에서 길을 잃게 되고, 어쩌다 화부를 만나고 화부의 사연을 듣고서는 화부를 변호하러 나서게 된다. 마지막에는 하녀의 편지를 받고 조카를 찾으러 온 상원의원인 외삼촌을 카알이 만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로써 화부를 위한 카알의 변호는 흐지부지되고 객지에서 겪었을 생고생은 외삼촌으로 인해 면하게 되었지만 카알은 중얼거린다.‘이 분(외삼촌)이 저 화부가 나에게 해준 역할을 대신하여줄 수 있을까?’ 여기서 우산과 맡겨둔 짐은 무엇일까? 내가 비오는 날 들고 간 우산을 비가 그친 다음에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지하철 선반에 둔 짐을 반드시 집으로 들고 오는 데 실패하지 않으려면, 그 어떤 순간에도 우산과 짐에 대한 생각을 놓치지 않으면 된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귀 담아 듣느라 우산에 대한 집중력을 흩어버려서는 안되고, 오직 우산과 짐에 시종일관 집중하면 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겨우 우산과 짐일 뿐인데 말이다. 주인공 카알도 짐을 지키느라 배에 탄 5일 내내 잠을 설쳤으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이 짐에 들어 있는 옷보다 좋고, 먹을 것과 새 속옷이 조금은 아쉽지만 짐을 잃어버려도 상관없었다. 내내 지키던 짐을, 겨우 우산을 찾겠다고, 허망하게 모르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맡겨버리고 마지막까지 찾으러 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우산을 찾으러 간 것을 계기로 미로에서 화부와 외삼촌을 만나게 된다. 우산을 찾으러 갔으나 짐도 우산도 다 놓아버린 순간, 새로운 기회와 미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인과, 의미, 결론을 찾기는 어려운 것 같다. 내가 사는 세상이 내 뜻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고, 믿기지 않을 아주 작은 우연에서 사건, 사고가 소용돌이치기도 하고, 엉망진창이 되기도 한다. 지난주에 공부한 <성>에 등장한 K도 측량사로 이 마을에 오지만 끝까지 측량은 하지 않고 측량사라는 직업만 나온다. 마을에 와서 성은 어렴풋한 안개와 어둠 너머로 보이지만 가까이 가기만 했다가 휘어지며 성에 가까워지지 않으며 좁다란 골목과 더 깊숙한 눈에 빠져 나아갈 수 없다. 누가 누구에게 언제 전했는지 모를 말들은 마을 주민들 사이로 흩어지고 제 시간에, 제대로 도착하지 못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단편 <일상의 혼란>에서 A와 B는 다가가려 하지만 계속 엇갈리고 만나지 못하고 서로 화를 낸다. 그 과정은 거의 시트콤처럼 코믹하지만 일상 속에서 알아채든 그렇지 않든 매일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3주째 카프카의 작품을 읽다보니 어디가 간주이고 마침표인지 모르겠고, 몰라도 상관없고, 어느 순간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네요. 다음 주에는 <시골의사> 전편을 읽고 만나 뵙겠습니다. 다음 주가 기대됩니다.
전체 2

  • 2019-10-06 19:25
    그런데 따지고 보면 겨우 우산과 짐일 뿐인데.
    카프카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질문합니다.
    그리고 예상 밖으로 도처에 출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삶 자체가 마침표도 쉼표도 없는 과정 뿐임을 카프카는 절실히 느끼고 있었나 봅니다.
    오래간만에 강평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또한 좋습니다.

  • 2019-10-08 15:35
    카프카 읽기는 그 자체로 실패와 시도라는 말 정말 공감해요. 후기만 읽어도 재미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