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카프카 읽기 후기(4주차)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19-10-15 10:08
조회
196
이번 주에는 카프카의 ‘변신’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변신>이라는 유명한 작품 외에 다른 작품에서도 ‘변신’이라는 주제가 반복됩니다. 사람이 벌레가 되고(<변신>), 원숭이가 사람이 되고(<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다리(교각)가 사람이 되고(<다리>), 또 양이면서 고양이인 것이 개가 되려 하는(<튀기>) 기묘한 변신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변신이라는 테마는 카프카만의 특징은 아닌데, 그가 활동했던 1920년대에는 이미 수많은 변신담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1818년에 나온 기계인간 프랑켄슈타인부터 시작해서, 곤충이 인간처럼 사고하고 의회를 조직하는 이야기(카렐 차페크, <곤충극장>)나 어느 날 한 여인이 여우가 되어 자연으로 가려 한다는 이야기(데이비드 가넷, <여우가 된 부인>) 등이 있습니다. 당대의 변신담들은 주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통해서 인간을 비꼬거나, 인간을 떠나 자연을 향하려 한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인간 혹은 문명에 대한 회의가 변신의 주된 동기입니다. 그러나 카프카의 변신에는 인간 자체에 대한 비판이나 자연에 대한 열망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자연이나 비인간이 대안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삶’ 혹은 ‘원숭이로서의 삶’ 일반이 문제일 수 없습니다. 언제나 눈앞의 구체적인 상황, 아들로서, 직원으로서, 또는 철장 속의 원숭이로서 느끼는 ‘갇혔다’라는 느낌이 문제이지 추상적인 범주가 문제가 아닙니다. 언제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주 구체적인 조건들이 변신을 추동합니다.

변신은 출구에 대한 열망에서 시작합니다. 지금 여기를 참을 수 없이 갑갑하게 느끼는 상태. <변신>과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는 그러한 ‘갇혔다’는 느낌이 공통됩니다. 그리고 아무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상태를 열망하지 않는다는 것도 공통됩니다. 단지 ‘지금’을 떠나기. 이것 외에 아무런 목표도 방향도 완료도 없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이 속 시원하지 않고 왠지 또 뭔가 걸리는 곳에 놓인 것 같고 심지어 더 안 좋은 상황에 들어선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변신이 자유를 목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자유를 원치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의 출구만을 원했습니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디든 관계없이. 저는 그 밖의 다른 요구는 하지 않았습니다.”(<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솔, 261)

철장에 갇힌 원숭이는 단지 출구만을 바랍니다. 그는 “팔을 쳐들고 가만히 서 있지만은 말아야”(261)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시작한 것은 창살 밖에서 걸어 다니는 인간을 관찰한 것입니다. ‘쟤들처럼 하면 적어도 이 창살에서는 벗어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주변을 아주 침착하게 관찰하는 것. 출구를 모색하는 일은 안팎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갇힌 자리, 가둔 힘들, 그 힘들이 요구하는 것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 등을 관찰하고 관찰하다보면 반드시 구멍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모방과 배움, 자신의 원숭이성을 가지고서는 이 창살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되는 떠남이 이뤄집니다. 그렇게 피나는 노력 끝에 원숭이는 유럽인의 평균교양에 도달합니다. 그러나 인간과 다름없이 양복을 입고 포도주를 마시는 ‘진보된 원숭이’가 왠지 씁쓸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레고르 잠자는 회사 생활을 탈출했지만 결국 자신의 방을 나가지 못하고 벌레의 몸으로 죽게 됩니다. 여동생에게 ‘그것’이라고 불리는 상태로 말입니다. 이처럼 변신 뒤에는 결코 자유라던가 유쾌한 해방감 같은 것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상태를 바라는 마음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체 1

  • 2019-10-17 23:28
    자신의 원숭이성으로는 이 감옥을 빠져나갈 수 없어.
    가만히 서 있지만은 않아야 해.
    이 절박한 마음이, 자신의 원숭이성과 대결하게 했지요. 결국 자기와의 투쟁입니다. 예비군 잘 다녀오셨남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