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후기

7강 예술사 강좌 후기

작성자
박선영
작성일
2020-08-06 15:35
조회
178
7-예술, -정치

7강의 제목 삶-예술, 삶-정치, 제목을 읽는 순간 이건 어떤 조합으로 이루어질까 상당히 궁금해졌다. 내 의식 속에 삶과 예술은 그리고 삶과 정치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느끼지만, 예술과 정치는 서로 괴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강의 시작 전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니 지난 7번의 강의로 낯익어진 얼굴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오늘 강의를 시작하면서 채운 선생님은 특정한 가치에 의해 정의된 근대인간이 어떤 앎의 조건 속에서 탄생했는지, 이러한 조건의 고찰을 통해 근대라는 앎을 넘어가는 새로운 주체 구성의 가능성을 통해, 예술의 탄생과 죽음을 보려고 한다고 오늘의 강의 주제를 설명해 주셨다. 즉 근대적 예술도 특정한 조건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면 그 조건을 이해를 통해서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그 형성조건의 이해 속에서 또 다른 새로운 예술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각기 다른 삶 속에서 각자의 우주를 구성한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오늘 강의를 통해 함께 공부하며 어떤 새로운 사유 탄생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우선 채운 선생님의 강의를 요약해 보겠다.

근대 예술의 특징 : 과정의 상실과 특권화

우선 중세와 현대 사이의 근대 예술의 특징에 관해 설명이 있었다. 근대의 예술의 특징은 예술의 특권화로 볼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부르조아 계급층에 의해 심화되었다. 자본주의란 모든 생산물을 사유화하는 제도이다. 정신적 산물인 예술은 상품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것으로 특권화에 쉬운 조건에 있다. 근대 예술이 유난히 저항적인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는 이유는 사회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적인 것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근대에 와서 공장이 생기고 업무가 분업화되면서 모든 상품은 가격표가 매겨져서 시장에 뚝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그 상품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과정은 전혀 알 수가 없다. 근대 자체가 이렇게 결과주의이다. 결과와 과정이 분리된 근대에서 예술의 특권화는 더 심화 되었다.

안드레이 루블레프 : 어떤 과정 속에서 탄생한 것인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초상. 그 신성한 얼굴은 어디서 왔는가? 그 누구도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한 존재여야 한다는 전제하에 그 초상을 바라본다는 것과 그 초상이 만들어지는 과정, 즉 시장통에서 흥정하는 장사치, 사랑에 빠진 남자의 표정, 힘쓰는 노동자의 인상 섞인 표정 즉 다양한 얼굴을 관찰한 후 탄생한 그림이라는 과정을 알고 보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완결된 작품으로서의 사유와 그 과정을 사유한다는 것은 예술의 개인성을 넘어선 집단으로의 전혀 다른 사유가 되지 않을까 한다.

정치와 예술의 외재적 만남을 내재적 만남으로...

정치라는 것은 사회적 영역 중 가장 특권화된 것이다. 우리는 정치는 정치가의 영역이라 생각하고 있다. 모든 것을 전문가에게 맡기는 사회가 근대이다. 정치와 예술이라는 특권화된 두 영역이 만나 예술이 정치를 재현하거나, 정치는 예술을 활용하는 외재적 만남이 되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은 서로에게 외재적인 것이 예술과 정치가 아니라 서로에 어떻게 내재적이어야 하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과잉 콘텐츠, 과잉 자아 Self, 과잉 심판의 시대

스팩터클은 우리에게 스토리를 만들고 그 스토리를 그저 무기력하게 수용하게 만든다. 스팩터클은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예전의 스팩터클(spectacle)은 광장이었으나 지금은 골방이다. 지금의 매체 환경은 타자와의 소통보다 자의식Self을 강화시키는 방식이다. 모든 정보가 골방에서 가능하다. 미술도 음악도 장소에 가지 않아도 손바닥 만한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다. 신체와 작품이 만나서 고유하게 향유되는 신체성이 소거된 사회에서 우리의 자의식은 점점 강화되고 이러한 환경은 우리를 점점 관종(과잉 자아)으로 만들고 있다. 콘텐츠는 범람하고, 그 콘텐츠를 누구나 비평할 수 있는 과잉 심판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진단학으로서의 예술

예술가, 철학자는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통찰력을 가지고 그 징후들을 알아내는 능력이 있는 자들이다. 예술가는 형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인간의 감성을 읽어내는 자로써 인간의 감각이 보내는 어떤 기호를 예민하게 읽어내는 것이다. 철학자는 이미 실현된 것을 정리하고 보편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것을 보는 자이다. 조짐과 징후를 읽어내는 능력이 철학자의 능력이다. 이러한 점에서 철학자는 예술가와 동일하다.

정신병이란 사유의 과정이 중단된 것이다. 무언가를 계속해 나갈 수 있다면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다. 더 이상 뭔가를 할 수 없으면 주저앉는다. 실패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할 수 없는 과정의 상실이 두려운 것이다. 몸이 환경을 매번 문제화할 수 있을 때 건강한 것이다. 문제화하지 않을 때 몸은 자정작용을 잃는다. 문제화가 안 될 때 솔루션이 없다. 들뢰즈는 철학은 문제화가 전부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과 세계를 문제화할 수 있어야 한다. 갈등을 일으키는 지점이 문제화의 영역이다. 갈등의 징후를 읽는 능력에서부터 치료가 가능하다. 인간에게 정신적, 신체적 병은 일종의 선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이렇게 우리는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정치적인 것예술적인 것’ - 랑싱에르로부터

랑시에르는 현대 철학자 중에서 가장 정치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을 사유하게 한다. 정치적인 것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예술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이야기하면서 정치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의 좌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좌파가 예술과 정치를 얼마나 정형화하였는가. 저항이 정형화되었을 때 더 위험하다는 것이 랑시에르의 기본 방침이다. 정치의 정형화란 모든 것을 가시화할 수 있는 주체로 만든다. 넌 난민이구나. 넌 가난하구나. 넌 억압 난 피억압. 넌 주류 난 비주류 이렇게 사람을 나누고 셀 수 있는 주체로 만든다. 모든 것에 우열의 감성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도와야 한다. 공정해져야 한다는 것, 공정과 평등은 비단 좌파의 의제가 아니라 우리 공통의 의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눈다.

하지만 정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랑시에르는 말한다. 가시화할 수 있고 정형화된 바깥의 그 무엇 구별 지어진 분할성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 너머의 어떤 것을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감성을 개인화할 수 없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정치란 정치가의 영역이고, 정당 활동이라고 여기지만 실은 정당 활동이란 여전히 그 정당의 틀 안에서 그 틀을 재생산하는 것일 뿐이다. 정당 활동으로 정치를 환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해방, 윤리가 모색된 활동이다. 사회적 징후에 대해 어떤 것을 문제화하는 것 이것을 논의하는 것이 정치라고 랑시에르는 말하고 있다. 예를 든다면 왜 노동자는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가? 내가 살아가는 속에서 공통적인 것을 다른 방식의 앎으로의 구성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노동자에게 노동운동에 전념하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해방에는 지적인 작업이 있어야 한다. 노동자와 문학가 그리고 노동자와 부르조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 일련의 분활선들을 깨는 것. 이것이 정치이다. 타자의 영역을 자기화하는 것으로 나에게 평등을 달라고 타자에게 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성, 공간, 시간, 활동, 형태 계급, 부의 분할이 아니고 감성의 분할. 타자를 느끼는 방식과 공간을 나누는 방식인 감성의 분할을 문제 삼는 것이 정치를 문제 삼는 것이다. 감성의 분할이야말로 내 실존의 활동과 더불어 감각적인 것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예술 또한 이런 식의 분할과 나눔의 장 속에서 만들어진다. 분할을 문제 삼는 행동 양식이 예술이 필요하다.

해방된 관계

근대 예술가와 예술을 향유하는 자들은 예술을 특별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의 특권화는 근대에 오면서 자본주의와 함께 심해졌다. 그리고 이들을 매개해 줄 비평가의 역할 또한 특권화되면서 (예전의 사제와도 같은 역할) 그들은 근대 예술 속에서 특권을 누려왔다. 비평에서 결탁의 폐단도 극심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의 과잉과 함께 모두가 비평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랑시에르가 감성의 분할을 문제 삼는 것은 공간, 시간과 맺는 관계를 벗어난 느낌의 세계는 따로 없다는 것이다. 관객은 예술작품을 그저 향유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감성의 분할과 예술을 문제 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예술의 생산자와 관객이 구분되는 위치에 있지 않다. 다른 방식의 감성을 생산해 내는 게 예술가이고, 관객은 자신의 해석에 감성의 분할을 문제 삼는 이가 해방된 관객이다. 작가는 자신은 생산한 특별한 자이고,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가장 잘 아는 자이고, 관객의 해석은 작가보다 못 미치는 기껏해서 향유하는 열등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아니다. 지식의 대등한 교환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관객은 지식의 전수 모델이 아니라 자기의 능동성을 통해 능동적 활동을 만들어 내는 무엇으로의 관계 그것이 해방된 예술이다. 예술작품은 양쪽 모두를 해방하는 매개일 뿐이다. 생산하고 소비하는 관계가 아닌 서로 능동적인 것이다. 관객을 참여를 유도하는 것은 작가의 영역이 아니다. 관객은 작가의 유도에 의해 능동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가 능동적인 생산을 해 낸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 작품은 퍼포먼스로 보아야 한다. 서로의 행위로서 이루어지는 퍼포먼스.

관객은 예술가와 다른 거리에 있기에 이러한 행위가 생겨난다.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변형시킨다. 이 모든 것을 생산해 내는 것이 해석 이런 힘 안에 관객의 해방이 있다. 우리는 향유가 아니라 자기해방의 도구로 예술을 매개로 삼아야 한다. 관객은 에술가에 의해 계몽되는 존재가 아니라 예술 또한 관객에 의해 새롭게 생산된다. 예술의 나르시시즘을 극복하는 것이 또 하나의 어떤 것의 새로운 탄생의 출발점이 된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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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8-07 11:20
    먼 곳에서 달려와주신 선영샘의 후기~!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특별한 예술이 사실 자의식이 부각되면서 생겨났다는 것이 계속 기억에 남네요. 하지만 그 나르시시즘을 돌파할 수 있는 열쇠도 예술이라는 것.